예쁜 애 옆에 예쁜 애 98화
조용히 숨을 죽인 채 귀를 기울이니,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진 알아들을 수 없어도, 두런거리는 세 남성의 목소리가 섞여서 들려오고 있었다.
테런과 바론, 그리고 남은 한 명은 바론의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는 패트릭 리스턴 영식일 것이었다.
“한참 전에 만났을 텐데……. 아직도 이야기가 덜 끝난 걸까?”
로제타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렇게 긴 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것을 보면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듯했는데, 그런 것이라면 빌리어드 룸은 그 공간으로 적절치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론에게 배정된 손님방이나, 아니면 테런의 서재에서 하는 것이 보안상 여러모로 낫지 않나 싶었다.
자신도 모르게 빌리어드 룸으로 향하려던 그녀는 이내 멈칫했다.
“아냐. 가지 말자.”
지금 바론의 얼굴을 보면 간신히 가라앉힌 분노가 다시 차올라, 이번에는 정말 고의로 그에게 상해를 입힐 것만 같았다.
아랫입술을 세게 물며, 그녀는 닫힌 문이 마치 바론이라도 되는 것처럼 힘껏 노려보다가 몸을 돌려세웠다.
그리고 곧장 제 방으로 올라왔다.
그런데 3층은 1층보다도 더 어두웠다.
벽에 설치해 둔 촛대의 양초가 모두 닳아 심지의 불이 꺼진 모양이었다.
“이렇게 한꺼번에 꺼지다니. 참 별 일이네…….”
그나마 이 복도의 맨 끝에 난 커다란 창을 통해 달빛이 은은하게 비쳐 들어오고 있어서 걸음을 옮기는 것엔 무리가 없었다.
무거운 마음과 달리, 그녀의 발걸음은 거의 소리가 나지 않았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니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그녀는 발소리를 내지 않고 걸었다.
뒤늦게 알았는데 그것은 전형적인 귀족 예법의 걸음새였다.
평민들은 자신의 발 크기에 맞는 신발을 때마다 구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걸을 때 발에 통증을 많이 느꼈고, 어렸을 때부터 걷는 습관이 그리 좋지가 않았다.
하지만 로제타는 누가 가르쳐 준 것이 아님에도 이미 그 걸음걸이를 익힌 상태였다.
아무튼, 그렇게 소리 없이 제 방에 가까워졌을 때였다.
로제타의 미간이 설핏 좁아졌다.
제 방 앞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 까닭이다.
그 검은 그림자는 성인 여성의 것이었으며, 마치 탐색하듯 얼쩡거리는 듯 보였다.
“거기. 누구니? 지금 내 방 앞에서 뭐 하고 있는 거지?”
로제타가 날 선 목소리로 물었다.
상대에겐 경계심을 심어 줄 정도로 크기를 키웠으되, 근처 손님방에 묵고 있는 이들의 단잠은 방해하지 않을 정도인, 세심하게 신경 쓴 목소리였다.
그녀가 물음을 건네자 어깨를 잔뜩 웅크리고 있던 그림자가 화들짝 놀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뒤를 이어 탁, 하고 방문이 닫히는 소리까지 들렸다.
로제타가 기가 찬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저 그림자가 제 방을 열어 보기까지 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화가 난 눈빛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자신의 방을 훔쳐보던 그림자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서 있었다.
로제타는 그녀의 앞에 멈춰 서서 다시 한번 물음을 건넸다.
“대답, 아직 안 했는데? 넌 누구고, 왜 내 방 앞을 살피고 있었지?”
“그게…….”
마른침을 삼키는지 꿀꺽하는 소리가 들렸다.
“잠자리를…… 살펴 드리려고…….”
목소리에서 연륜이 묻어 나왔다.
그것을 통해, 로제타는 그녀의 정체를 불현듯 깨달았다.
“혹시……. 젤다?”
여자 쪽에서 대답이 돌아오지는 않았으나, 로제타는 자신이 그림자의 정체를 맞게 추론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도대체…….”
로제타의 목소리가 바닥에 깔릴 듯 낮아졌다.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었다.
낮에 그렇게 실수를 했으면 에스테스 하우스를 떠날 때까지는, 아니, 적어도 오늘 하루만큼은 몸을 사리고 자중해야 함이 맞지 않는가?
자신이 어디까지 참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에스테스의 메이드 중 한 명인 줄 알고 낮췄던 말은 다시 높아졌다.
기분 같아선 그냥 계속 말을 낮추고 싶었지만, 젤다의 연령을 나름대로 고려해 주지 않을 수는 없었다.
“리스턴 후작가의 사용인이, 에스테스 공작님의 약혼녀인 내 잠자리를 살핀다고요?”
“그, 그게…….”
냉소 어린 로제타의 질문에 젤다는 난처하다는 듯이 말꼬리를 흐렸다.
자기가 생각해도 방금 한 변명이 도무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기 때문이었다.
로제타는 들으라는 듯 묵직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리고 피곤한 목소리로 물었다.
“젤다. 내게 관심을 품는 이유가 뭔가요?”
“과, 관심이라뇨.”
그녀의 오리발에 로제타가 눈에 힘을 주었다.
이 어둠 속에서 저의 언짢음이 과연 어디까지 보일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발뺌할 생각하지 말아요. 그렇게 티 나게 날 살펴보던 거, 모를 줄 알았어요?”
하지만 젤다에게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 점이 로제타를 더욱 화나게 했다.
“선택적으로 듣고 싶은 말만 듣고 하고 싶은 말만 하는군요. 젤다. 당신이 날 납득시킬 만한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는다면, 난 이 건에 대해서 올리비아 양과 리스턴 후작님께 정식으로 항의하는 수밖에 없어요. 설마 그것을 원하는 건가요?”
그 말은 결국 사용인의 일거리를 끊겠다는 협박과 다름이 없었다.
귀족들은 이런 경우 대개, 문제를 제기한 상대 가문의 체면과 앞으로의 관계 등을 우선적으로 고려한다.
그래서 꼬리 자르기식으로 문제를 일으킨 시종의 고용을 해지하는 것으로 일을 정리하는 게 관행이었다.
이 경우, 해고된 사용인은 그동안 일했던 가문으로부터 추천장도 받지 못하고 내쫓겼다.
그럴 뿐만 아니라 암암리에 소문이 퍼져 더는 귀족 가문에서 일을 할 수 없게 된다.
분명 젤다 역시 그런 말뜻을 알아들었을 텐데도, 두려워하거나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이상하리만치 당당했다.
마치 할 테면 해 봐라, 난 상관없다. 뭐 그런 느낌이랄까.
‘공론화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 어째서 그런 걸까?’
로제타는 차분히 속으로 생각을 이어 나가며 어둠 속에 잠긴 젤다의 얼굴에 가만히 시선을 던졌다.
‘진짜 일반적인 메이드들과는 느낌이 달라.’
묘하게 고압적이고, 묘하게 당당하다.
마치 뒤에 누군가 있는 것처럼.
그 순간, 로제타의 머릿속에 한 가지 가정이 퍼뜩 떠올랐다.
젤다를 보는 그녀의 눈빛이 한층 더 매서워졌다.
예리한 눈빛 속에는 상대의 진의를 가늠해 보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평민이 귀족을 상대로 당당할 수 있는 것은 딱 한 가지 경우밖에 없다.
‘젤다의 뒤에 리스턴 후작가가 있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어제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내 이상하게 보였던 그녀의 행동이 모두 아귀가 딱딱 들어맞는 것 같았다.
다만 그걸 사주한 게 누구인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리스턴 후작 본인일 수도 있고, 올리비아, 혹은 패트릭일 수도 있었다.
‘혹시 올리비아 영애가 그런 걸까?’
딱히 그런 것 같진 않았지만, 경계의 끈을 놓을 순 없다는 생각이 들어 함부로 판단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젤다를 상대로 자신을 감시하듯 살펴보는 이유가 뭐냐고 캐물은들, 사용인인 그녀가 고용주의 뜻을 모두 알고 행동할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건은 내 선에서 해결할 일이 아니야. 일단 지금 상황에서는 덮어야겠어.’
오히려 지금의 제가 그 사실을 지적하고 캐물으면, 상대가 더 경계하여 사실을 숨길 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로제타는 테런에게 곧바로 이 일에 관해서 이야기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리스턴 후작가가 에스테스 공작가를 염탐하려 한다는 의심에 대해서 아무런 증거도, 증인도 없었지만 그래도 테런이라면 제 말에 귀를 기울여 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돌려보내면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어.’
적당히 캐묻다가 돌려보낼 셈으로 로제타는 심호흡하듯 숨을 들이켰다.
그런 뒤, 싸늘한 목소리로 재차 물음을 건넸다.
“말하지 않을 셈인가요?”
그제야 어영부영 젤다가 입을 열었다.
“그게…… 사실 영애께 부탁을 좀 드리고 싶어서, 무례인 줄 알고 찾아 뵈었습니다.”
“부탁?”
“예…….”
젤다가 고개를 조금 더 숙이는 것이 실루엣으로 보였다.
“무슨 부탁 말인가요?”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는 생각으로 되물었다.
그러자 젤다가 또 한참 동안 말을 고르다가 뒤늦게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이직할 곳을…… 찾고 있어요. 그런데 에스테스가에 안주인이 들어오신다고 하니…… 혹시…… 부탁을 드릴 수 있을까 하여.”
누가 들어도 급조한 것 같은, 조악한 변명이었다.
젤다의 말은 횡설수설 그 자체였다.
그녀의 모습은 마치 그냥 생각 없이 입 밖으로 나오는 대로 이야기하는 것만 같다는 인상을 강하게 심어 주었다.
‘나를 바보로 보는 건지.’
젤다에게로 향한 그녀의 시선이 더욱더 삐딱해졌다.
금방이라도 혀를 차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른 채, 로제타는 작게 숨을 들이켜 몸 안에 간직하듯 호흡을 참았다.
이 밤, 복도에 촛불이 다 꺼져 어두운 상태인 것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젤다의 표정을 읽지 못하는 것처럼 그녀 역시 제 얼굴을 살피지 못할 테니까.
그래서 로제타는 읽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젤다가 자신을 증오에 가득 찬 눈빛으로 노려보다가 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세게 짓씹고 있었다는 것을.
로제타는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자신을 바보 취급하는 것은 화가 났지만, 적당히 속아 주는 척해서 돌려보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인 것 같았다.
“알았어요. 내 방에 있던 이유는 그런 거라고 생각해 보죠.”
“…….”
“그러니 그만 돌아가요. 더 이상 그대의 주인을 욕보이지 말고.”
문제 삼지 않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길 바라며 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런데도 젤다가 주저하며 좀처럼 움직이지 않자, 로제타는 경고하듯 한마디를 더했다.
“젤다. 내가 방금 한 말을 못 들었나요? 내 인내심은 여기까지예요. 내일 오전이면 어차피 후작가로 돌아가야 할 테니, 지금 조용히 당신의 숙소로 돌아가요.”
그제야 젤다가 헛숨을 들이켠 뒤 마지못해 사과의 말을 전해 왔다.
“……실례 많았습니다.”
하지만 입에 담은 말과 달리 목소리는 상당히 불손하기 그지없다고, 로제타는 생각했다.
자신에게 지적을 받는 지금의 제 상황이 몹시도 못마땅하다는 기분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저런 성격으로 어떻게 귀족 가문에서 일을 하는 걸까?’
로제타는 혀를 차고 싶은 기분을 꾹 눌러 참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올리비아 역시 젤다를 좀 어려워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올리비아 영애에게도 나를 대하는 것처럼 함부로 대한다는 건데…… 배후가 후작 아니면 패트릭 영식으로 좁혀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