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99화
“그럼 편안한 밤 되세요, 영애.”
주저하다가 멀어지는 젤다의 발걸음 소리를 듣던 로제타가 뒤늦게 제 방문 손잡이를 잡고 힘껏 열었다.
비로소 혼자가 됐을 그때, 로제타의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르는 게 있었다.
“아. 혹시 그 정도면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녀는 어두운 방 안을 밝히는 것도 깜빡 잊고 생각을 이어 나갔다.
일전에 테런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떠오른 까닭에서였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정보를 수집하는 데 좋다고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테런에게 작위를 물려준 뒤 홀로 전국을 유랑 중인 선대 공작의 소식도 그렇게 듣고 있다고 했었다.
‘나도 젤다에게 실프를 붙일 수 있을까?’
구름을 움직이거나, 물건을 들어 올려야 하는 것처럼 큰 힘을 쓰는 게 아니다 보니, 잠깐 곁에서 지켜보게 하는 것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싶었다.
어차피 젤다가 4대 가문의 사람은 아니니 실프가 나와 그녀의 곁에 붙어 있다고 한들 그 모습을 들킬 염려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 실프가 이번엔 나와 줄까?”
로제타가 침울하게 중얼거렸다.
실프의 얼굴을 못 본 지 벌써 한참이나 되었다.
6살 때 처음 그 존재를 알게 된 이후로, 이렇게까지 오래 못 본 적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미 몇 차례나 실프의 소환에 실패했기 때문에, 로제타는 더더욱 자신이 없었다.
심란한 마음을 다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짧게 숨을 들이켠 뒤, 그녀가 비장하게 목소리를 내었다.
“실프.”
하지만 방 안은 여전히 조용했다.
“내 목소리가 안 들리니? 실프.”
로제타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재차 입을 열었다.
어둠만 가득한 이 공간에, 부디 실프의 빛 가루가 포슬포슬 떠오르기를 바랐다.
“실프, 좀 나와 봐. 제발 부탁이야.”
하지만 작은 정령에게선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허무할 정도로 조용한 제 방의 구석 어딘가를 바라보는 로제타에게서는 기운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때.
“아얏.”
그녀가 나직한 신음을 흘리며 서둘러 손을 올려 제 목덜미를 감싸듯 잡고 지그시 눌렀다.
그녀가 실프의 이름을 입에 담을 때마다 목 뒤가 달아오를 듯이 뜨거워졌기 때문이었다.
“으윽…….”
그녀는 고통을 견디듯 지그시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순간, 눈꺼풀의 막 뒤로 무엇인가 강렬한 빛이 번쩍하는 것을 느꼈다.
방 안에 불도 켜지 않았는데…….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고통이 갈수록 극심해져 제대로 된 생각을 이어 나가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로제타는 선 채로 가쁜 숨을 몰아 내쉬며 고통을 감내하려 했다.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로제타의 발 아래에서 검은 연기 같은 것이 뭉게뭉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로제타는 계속 눈을 감고 있었기에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소리 소문 없이 피어오른 검은 연기는 이내 자기들끼리 뭉쳐지기 시작하다, 한 모양을 만들었다.
마치 커다란 개의 모습이었다.
“으, 윽.”
로제타가 고통을 강렬하게 느낄수록 개의 형태가 점점 더 또렷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얼추 모습을 갖춘 연기로 만들어진 개가 감고 있던 눈을 부릅떴다.
그 눈동자 색깔은 로제타와 같은 초록빛이었다.
개는 마치 탐색이라도 하는 것처럼 로제타의 주위를 조심스럽게 한 바퀴 빙글 돌았다.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에 가려진 목덜미에서 희미한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개는 허공에 두둥실 뜬 상태로 몇 바퀴 더 그녀의 주위를 맴돌다가 이내 정면에 멈춰 섰다.
그런 뒤, 마치 하울링을 하는 것처럼 하늘로 목을 길게 빼고는 주둥이를 모았다.
연기로 만들어진 개는 로제타의 지척에서 울었으나, 그녀는 창밖 너머 늑대가 우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얼핏 환청을 듣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감이 좋지 않았다.
그렇게 늑대가 우는 소리를 듣고 난 뒤에야 로제타는 반점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조금씩 덜해져 가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한참 만에야 눈을 떴다.
그리고 그 순간, 검은 연기로 만들어진 개가 사방으로 흩어지며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하아…… 갈수록 더 아파지네.”
그녀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딱히 이유도 없고…… 도대체 왜 이럴까.”
사실 로제타는 목 뒤의 통증 문제로 의사에게 세 번 진찰을 받았다.
하지만 그때마다 딱히 문제가 될 만한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똑같은 소견을 듣고 난 뒤부터는, 같은 증상으로 의사를 찾지 않았다.
신경성 두통이나 복통이 존재하는 것처럼, 자신 역시 목덜미 쪽에서 느끼는 아픔이 피로가 많이 쌓일 때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여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로제타는 때때로 강한 아픔을 느껴도 혼자서 꾹 참았다.
어차피 몇 시간이나 지속되는 고통이 아니었기에 순간만 견뎌 내면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로제타는 목덜미를 감싼 손을 좌우로 마찰시키며 반점이 있는 부분을 손바닥으로 매만졌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던 그녀는 통증이 이내 완전히 가시자, 그제야 느릿하게 숨을 몰아 내쉬고 손을 뗐다.
메이드를 일찍 퇴근시켰기에, 로제타는 혼자서 뒤늦게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이 정도쯤은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15년을 나 혼자서 잘 해내 왔는걸.”
* * *
밤은 점점 깊어져 가고 있었으나, 로제타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왠지 모를 불안함이 그녀의 심장을 선득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런 기분은 로제타의 머리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고, 여러 가지 생각을 불러와 더 잠에 빠질 수 없게 했다.
넓은 침대 위에 이리 뒹굴, 저리 뒹굴.
누운 채로 계속해서 몸을 뒤척이던 그녀가 더는 견디기 힘들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쉽게 잠들기가 어렵겠어.”
침대에 누운 지 한참 되었지만, 그녀의 두 눈은 여전히 말똥한 상태였다.
기분도 좋지 않고, 생각도 많은 탓인 듯했다.
“휴……. 술이라도 한잔 마시면 좀 나을까.”
도무지 자연의 순리대로 자연스럽게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았기에, 로제타는 무엇인가의 도움을 좀 받고자 했다.
설렁줄을 당겨 사람을 부를까 하던 그녀는 이내 마음을 접었다.
괜히 부산 떨 것 없이 직접 내려가 가져오는 게 나을 듯싶었다.
“거나하게 취할 정도로 마실 것도 아니고, 그냥 딱 한 잔만 따라올 거니까 뭐.”
한두 잔 정도는 기분 좋게 잠들 수 있을 테고,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는 데도 무리가 없을 것 같았다.
로제타는 숄을 챙겨 어깨에 둘렀다.
어차피 밤늦은 시각이라 누군가를 마주칠 것 같지는 않았기에, 잠옷 차림인 것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로제타는 방 밖으로 나와 1층으로 곧장 내려갔다.
주방으로 향하려던 그녀의 걸음이 멈춘 것은 빌리어드 룸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 때문이었다.
모두가 잠든 시각이라 저택은 더 고요했고, 그 때문에 그 안에서 두런거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소리가 더욱더 잘 들려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곳에서 바론과 테런, 그리고 패트릭이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 시간까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길래 이리 오래 만나고 있는 것일까.
로제타는 호기심이 일었고, 조용히 뒤꿈치를 들고 빌리어드 룸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 * *
빌리어드 룸.
테런은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제 몫의 술잔을 바라보았다.
벌써 몇 병째, 공작저에서 가장 귀한 술을 비워 내고 있는 건지 몰랐다.
바론이 저녁 식사 후, 자신을 보자고 부른 이유는 딱히 없었다.
그냥 술친구 좀 해 달라는 게 유일한 목적이라면 목적이었다.
바론의 부름에 내심 무엇인가 기대를 품었던 자신이 머저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아까 약속 시각에 바론이 계단을 내려와 잠깐 할 이야기가 있으니 따라 들어오라고 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정말 그에게 용건이 있는 줄 알았다.
아까 낮에 홧김에 개를 걷어찼다,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려고 저를 부른 것은 아닌 건가 싶기도 했다.
‘물론 사과를 한다고 해도 용서받을 수는 없는 행동이지만.’
하지만 자신이 걷어찬 개에 대한 것은 그새 새카맣게 잊었는지, 바론은 토토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면 국책 사업인 도로 공사에 대해서 내게 따로 물어볼 것이라도 있는 줄 알았는데…….’
하지만 테런의 예상은 완전히 엇나갔고, 그는 그대로 바론에게 붙잡혀 몇 시간째 대작을 해 주고 있었다.
‘그냥 패트릭 녀석과 마실 것이지.’
이미 제 주량을 한참 넘긴 탓인지, 패트릭은 술잔을 아슬아슬하게 든 채 고개를 꾸벅이면서 졸고 있었다.
테런은 자신에게 소중한 존재를 걷어찬 바론과 한자리에 마주 보고 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왕족에 대한 예우를 지켜야 하기에 사감을 억지로 죽이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한두 시간 정도 어울려 주면 되겠지, 싶었지만 어림도 없었다.
그 탓에 테런은 늦게라도 마구간에 들러 토토의 상태를 살펴보려는 계획을 완전히 지워 낼 수밖에 없었다.
몇 번이나 바론에게 눈치껏 그만 자리를 파하고 일어나자고 뉘앙스를 깔았지만, 그가 못 알아듣는 건지 못 알아듣는 척하는 건지 꿈쩍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밤을 새울 거라면 집무실에서 긱스가 쌓아 놓은 결재 서류를 처리하는 편이 훨씬 낫겠어.’
몸은 피곤하더라도 그편이 훨씬 생산적이고 보람은 있을 테니까 말이다.
테런이 피곤함을 감추려는 듯 성마른 손길로 제 얼굴을 덮듯이 가리고 몇 번 마른세수했다.
숨을 길게 내쉬자 독한 알코올 냄새를 스스로 맡을 수 있을 정도였다.
테런이 주량이 세서 이 정도지, 일반적인 사람 같았으면 벌써 진작에 인사불성이 되고도 남았으리라.
“그런데 말이야, 공작.”
“예, 전하.”
바론이 반쯤 꼬인 혀로 말을 다시 걸어왔다.
테런은 피곤한 마음을 숨기고 건성으로 대답해 주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축하를 했던 적이 있던가? 자네 약혼에 대해서 말이야.”
“예. 약혼식 날 해 주셨지요.”
“아하! 그랬군, 그랬어…….”
바론은 누가 봐도 영락없는 주정뱅이였다.
“후…… 시간 참 빨라. 벌써 내일이면 왕궁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말이야.”
“부디 에스테스 공작저에서 보내신 시간이, 전하께 좋은 휴식의 시간이었길 바랍니다.”
“물론 잘 쉬었네. 이렇게 비싸고 맛 좋은 술도 공짜로 얻어 마셨고 말이야.”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다행입니다.”
바론이 술잔을 눈높이까지 살짝 들어 올리며 웃어 보였다.
남은 술을 마저 입에 털어 넣은 그가 대뜸 이런 말을 해 왔다.
“이보게, 테런.”
바론은 지금까지 꼬박꼬박 공작이라고 칭하던 것과 달리 이름을 친근하게 불러 왔다.
“예, 전하.”
그는 내내 건들거리던 태도와 달리 아주 조금 진중하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이번 주 내로 부왕께서 자네를 왕궁으로 부르실 걸세.”
“예. 그러시군요.”
“무슨 일 때문인지는 묻지 않는 건가?”
“국책 사업 때문에 그러신 건 아니겠습니까? 언제나 그랬으니까요.”
바론이 테런을 빤히 바라보다가 마치 비웃는 것처럼 피식 웃었다.
“그래 뭐. 어떻게 보면 그것 때문일 수도 있겠군. 그 결에 닿아 있긴 하니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