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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애 옆에 예쁜 애-100화 (100/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00화

바론의 말에 테런이 미간을 설핏 좁혔다.

무엇인가 이상한 느낌이 엄습했다.

내내 취한 사람처럼 굴던 것과 달리 유독, 이 화제에 대해서만큼은 발음이 똑바르고 눈빛도 의미심장한 빛을 띠고 있는 것이.

“전하. 아까부터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 건지 신이 아둔하여 헤아리기가 어렵습니다.”

기분이 나쁠 정도로 바론은 계속해서 피식거렸다.

그렇게 한참 동안 뜸을 들이다가 어떻게 된 사정인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조만간 자네가 나 대신 국경 시찰을 좀 가야 할 듯싶어.”

“……예?”

정말 생각지도 못한 생뚱맞은 소리였기에, 테런의 목소리가 절로 높아졌다.

그런 그의 반응이 퍽 기껍다는 듯 바론의 입꼬리가 위로 솟았다.

그는 언제나 부왕에게서 테런과 비교 아닌 비교를 당하며 자라 왔었다.

테런의 진중함을 닮아 봐라.

테런의 침착함을 본받아라.

테런의 신중함을 보고도 느끼는 것이 없느냐.

마치 왕재는 자신이 아니라 테런이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그러한 비교는 바론을 더 노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삐뚤어지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왕세자의 책무를 등한 시하며 오히려 더 방탕하게, 사교계의 탕아가 되는 데 열중했다.

어릴 때부터 유독 영민했고, 그 사고 이후로는 속마음마저 잘 드러내지 않는 동갑내기 친구는 어느새 라이벌이자 바론의 열등감을 자극하는 존재가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테런이 언제나 벗지 않던 철가면을 자신이 금 가게 했다는 생각에 바론은 퍽 기꺼운 마음이 들었다.

물론, 뇌가 술에 절어 있는 상태라 더 필터링하지 않고 되는대로 지껄이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원래 그 건은 전하께서 직접 가시기로 정리된 이야기가 아닙니까?”

표정을 굳힌 테런이 질문을 던졌다.

바론을 상대하는 내내 테런은 조금 심드렁한 상태였다.

물론 예법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 바론이 떨어트린 폭탄 같은 발언에 그가 처음으로 대화에 집중하며 무릎 위에 팔꿈치를 괴며 상체를 앞으로 숙이기까지 하고 있었다.

군주는 존재만으로도 그 상징성이 남달라, 국민에게 힘을 준다.

원래는 도로 보수 공사 노동으로 지친 국민들을 격려하고 기운을 북돋아 주기 위해 국왕이 직접 방방곡곡을 시찰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노령이라 장거리 이동 시 그의 건강이 크게 해쳐질 것 같아, 장자이자 장차 윌셔스 왕국의 군주가 될 바론이 대신 국경부터 시찰을 나가기로 잠정적으로 협의가 된 참이었다.

“왜 갑자기 예정이 바뀐 것입니까?”

테런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전혀 귀띔으로라도 들은 사실이 없기에 황당함이 더욱 배가되었다.

하지만 그의 그런 심각함과 달리, 바론은 얄미울 정도로 느긋했다.

어차피 더는 자기 일이 아니게 되어 그런 모양이었다.

“어디 내가 그런 걸 꼼꼼하게 하는 성격이던가? 그러니 애초에 이 사업을 맡은 실무자이자 책임자인 자네가 직접 현장을 살펴보는 것이 여러모로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네. 그래서 부왕께 나 대신 그대를 보내시라 그리 말씀드렸고.”

그는 마치 테런을 가르치기라도 하는 것처럼 빈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음률을 넣은 특유의 느릿한 말투로 유들거리며 깐죽거렸다.

테런은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진짜 전생에 무슨 원수를 졌길래, 바론이 자꾸만 제게 일거리를 늘려 주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기분이었다.

그런 테런의 마음 따윈 자신과는 조금도 상관이 없다는 듯 바론이 손을 얼굴 옆으로 들어 올리며 장난스럽게 사과했다.

“그러니 일단 미안하다는 말부터 하겠네. 한창 좋을 때의 두 사람을 갈라놓아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그러다 바론이 제 턱을 거칠게 문지르며 눈을 살짝 가늘게 뜨고는 중얼거렸다.

“그런데 말이네. 내가 약혼식 겸 레이디 클리프의 데뷔탕트 때부터 계속 들었던 생각이었는데…… 자네 취향은 참 일관적인 것 같아. 사람이 뭐랄까…… 참 뚝심이 있다고 해야 하나?”

혼자 말을 꺼내고선 음산하게 킬킬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자신이 들고 있는 잔에 술이 모두 비어 있다는 것도 모르고 입에 털어 넣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뒤 이내 지척에 놓여 있던 술병을 기울여 다시 잔을 채우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왜, 자네 약혼녀 머리 색깔 말이야.”

갑작스럽게 꺼낸 로제타에 관한 이야기에, 술잔을 쥐고 있는 테런의 손아귀에 힘이 실렸다.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꺼내시는 건지…… 의중을 헤아리지 못하겠습니다.”

낮게 가라앉은 그의 음성에서는 스산함이 풍기고 있었으나 취해서 이성이 마비된 바론은 그 부분을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뭐. 아마 맨정신이었어도 테런을 향한 도발은 멈추지 않았을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원. 사람, 시침도.”

바론은 취한 목소리로 살짝 핀잔을 주었다.

그런 뒤 무어라 말을 이었는데, 그 한마디는 마치 테런에게 불의의 일격과도 같아서 그는 자신도 모르게 호흡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클리프 영애도 붉은 머리카락이지 않나. 자네 전 약혼녀랑 똑같이 말이야.”

테런은 마치 그대로 몸이 굳기라도 한 것 같았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그저 술잔만 노려보는 그의 눈빛은 마치 잘 벼른 검처럼 서늘하고 날카로웠다.

그가 고개를 돌리며 눈빛이 닿는 자리마다 모두 베어 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테런이 든 잔 안에 담긴 술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움켜쥔 손에 지나칠 정도로 많은 힘이 들어가 그 악력에 진동하게 된 것이었다.

테런은 참았던 숨을 터트리듯 몰아 내쉬었다.

지금, 이 순간 바론의 저 말에 대체 자신이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좋을는지 알 수 없었다.

그사이, 바론은 또다시 불쑥 선을 넘었다.

“15년을 그렇게 죽은 사람 못 잊고 방황하며 헤매더니만. 기어코 비슷한 이를 이렇게 찾아내는군. 참 대단해.”

바론은 술잔을 소파 테이블에 내려 놓은 뒤, 과장되게 팔을 벌려 손뼉을 마주치기 시작했다.

그러다 입꼬리를 비틀어 피식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는데, 그 웃음소리가 테런의 마음을 마구잡이로 짓밟았다.

“전하. 취하셨습니다.”

겨우 이성의 끈을 부여잡고 있던 테런이 목이 졸린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자네도 참 자네야.”

그만하라는 뜻임을 아마도 알아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론은 멈추지 않았고 계속해서 입을 놀렸다.

“사정 모르는 사람들은 다들 자네의 그 친절하게 웃는 낯에 홀리고 속지. 하지만 생각해 보면 테런, 자네만큼 음흉하고 또 냉정한 이가 또 어디 있겠는가? 아니 그래?”

묵묵부답인 테런을 가만히 바라보던 바론이 쐐기를 박듯 한마디 더 했다.

“레이디 클리프는 아나? 자신이 랭우드 영애의 대역이라는 것을 말이야.”

그 순간 공기의 흐름이 아주 조금 달라졌다.

무슨 기척을 눈치챈 테런이 빌리어드 룸의 출입문 쪽을 바라보았다.

아주 미세하게 엄지 길이만 한 폭으로 문이 열려 있었다.

어째서 문이 열렸을 때 기척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일까.

제 주량을 과신했나 보다.

정신이 말짱한 줄 알았는데, 저 역시 술에 취해 결국 주의력이 산만하게 흩어지고 만 것 같았다.

그리고 아주 찰나의 순간, 느리게 숨을 내쉬는 옅은 숨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일반인이라면 결코 느끼지 못했을 기척이었다.

하지만 테런은 바람의 힘을 다스리는 에스테스의 가주였고, 한번 의식하기 시작하니 감각이 예민해지며 또 렷하게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빌리어드 룸의 문 근처에 있던 누군가가 조용히 방 앞에서 멀어져 갔다.

무척이나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그 걸음의 주인공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테런의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가 굳은 얼굴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전까지 혼자 미친 사람처럼 킬킬대던 바론이 깜짝 놀라며 멍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어 테런을 올려다보았다.

“테런? 왜 그러는 거지?”

테런은 바론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졸고 있는 패트릭에게로 다가갔고, 그의 어깨를 가볍게 쥐어 앞뒤로 흔들어 깨웠다.

“패트릭. 좀 일어나 보게.”

“으음?”

“시간이 늦었으니, 자네가 전하를 방까지 모셔다드리게.”

“아, 지금 몇 시…….”

잠이 묻어 가라앉은 목소리는 경황이 없었다.

하지만 테런은 패트릭이 정신을 차릴 때까지 기다려 줄 생각이 없었다.

그의 마음에 조급함이 빠른 속도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어찌 됐든 패트릭이 눈을 뜬 것을 확인한 테런은 곧바로 바론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전하. 죄송합니다.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이보게, 테런! 에스테스 공작!”

자신을 붙잡는 바론의 부름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는 급하게 방을 나섰다.

빌리어드 룸 앞은 역시나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그때 조용히 계단을 밟아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테런이 위쪽을 바라보다가 이내 아랫입술을 강하게 짓씹어 물며, 몸을 돌려세웠다.

그리고 단숨에 3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밟아 오르기 시작했다.

테런은 금세 로제타의 방 앞에 도착했다.

문은 제대로 닫혀 있지 않고 살짝 열려 있었다.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방문을 열었다.

그러자 테런이 들고 있는 촛대의 작은 불빛이 방 안으로 스미듯 번져 나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방을 모두 밝히기는 어려웠다.

밝아지지 않는 어둠의 끝에, 로제타가 앉아 있었다.

“로제타 양.”

웅크리고 있던 그녀의 실루엣이 어슴푸레 눈에 보였다.

테런은 좀처럼 안으로 걸음을 내딛지 못했다.

빛이 있는 곳과 어둠에 잠겨진 곳.

그 보이지 않는 경계가 마치 둘 사이에 절대 넘을 수 없는 어떠한 선 같았다.

“로제타 양.”

그는 마치 목이 졸린 듯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몇 번을 더 부른 뒤에야 로제타가 조용히 답을 했다.

“공작님. 저 쫓아오신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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