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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애 옆에 예쁜 애-101화 (101/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01화

울고 있던 것이리라 생각했는데. 그녀의 목소리는 테런이 생각했던 것보다 괜찮았고, 또 물기도 묻어 있지 않았다.

테런이 숨을 들이켜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아, 역시. 그러셨구나.”

로제타가 민망하다는 듯 살짝 고개를 떨구며 웃었다.

목소리는 분명 웃고 있는데 혼란스러움이 묻어 있다는 것을 테런은 알 수 있었다.

“기회를 주십시오. 변명할 기회. 하나부터 열까지 다 설명드리겠습니다.”

“네, 그 기회 드릴게요.”

그녀는 너무도 선선히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그 말에 테런은 입술을 달싹이며 곧장 이야기를 쏟아 낼 기세였다.

하지만 그가 목소리를 내는 것보다 로제타가 입을 여는 것이 더 빨랐다.

“그런데…… 내일 이야기하고 싶어요. 그래도 될까요?”

“……로제타 양.”

테런은 어딘가 조바심이 난 사람처럼 또 한 번 그녀를 불렀다.

그러자 로제타가 재차 말을 이었다.

“그저 조금 생각을 정리해 보고 싶어서 그래요. 내일 손님들을 배웅하고 난 뒤에 다시 이야기해요.”

로제타는 아까 빌리어드 룸 앞에서 자신이 엿들은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생각을 정리해 볼 시간이 필요했다.

마치 대치를 하는 것처럼 잠시간 서로 아무 말이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알게 모르게 고인 긴장감이 제법 팽팽했다.

그는 가라앉은 눈빛으로 로제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둠에 가리어 그녀의 이목구비가 잘 보이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생생하게 그릴 수 있었다.

허리까지 부드럽게 흘러내린 붉은 머리카락과 아름다운 아몬드형의 큰 눈.

눈과 곱고 여린 얼굴선과 백옥같이 하얀 피부가 살짝 머금은 붉은빛.

그저 떠올리는 것뿐인데도 사랑스럽다고 느껴졌다.

‘아.’

그는 나직한 탄성을 터트리며 마침내 자신의 감정을 인정했다.

‘난 이 여자에게 변명하고 싶구나.’

로제타에게 미움을 받고 싶지 않다는 감정을, 그는 비로소 직시했다.

결국, 한발 물러선 것은 테런이었다.

“……그래요.”

그는 무거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깊은 이야기를 나누기에, 지금은 적절치 못한 시간인 것 같기도 하군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해요.”

로제타가 속삭이듯 대답했다.

하지만 테런은 미련이 남는다는 듯 계속 그 자리에 서서 무엇인가 더 할 말을 찾았다.

하지만 마땅한 것을 떠올리지 못해, 결국 그녀에게 건넨 것은 잘 자라는 인사였다.

그가 주저하며 입을 열었다.

“그럼……, 잘 자요.”

“공작님께도 좋은 밤 되시길 바라요.”

로제타가 입술을 끌어 올렸다.

얼핏 들으면 다정한 밤 인사다.

하지만 둘 중 누구도 오늘 밤 쉽게 잠 못 이루리라.

테런은 미련이 남은 발걸음을 무겁게 돌렸다.

날이 밝는 게 무척이나 더딜 것만 같았다.

* * *

밤새 잠 한숨 이루지 못했으나 로제타는 이튿날, 간밤에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말끔한 얼굴로 나타났다.

“모두 좋은 아침이에요.”

상냥한 목소리와 웃는 얼굴.

로제타는 여느 때와 다름없는 것만 같았다.

사람들도 그녀에게서 딱히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

오직 테런만이 그녀의 미소가 미묘하게 경직되어 있다는 것과 눈 밑에 피로가 쌓여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당장 그녀에게 간밤에 못다 한 이야기를, 아니, 변명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손님들의 앞에서 그녀를 붙잡고 이야기부터 나눌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는 우선 성급한 제 마음을 꾹 눌러 참았다.

어디로 들어가는지 도무지 모를 아침 식사를 하고, 두 시간 뒤 하우스 파티에 참석한 손님들이 모두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그전에 먼저 공작가를 떠난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바론이었다.

그는 마지막 조찬 때도 나오지 않고 제 방에서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모두에게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않고 먼저 마차를 타고 돌아가 버렸다.

본래라면 건강이 나아질 때까지 조금 더 머무르다 가시라, 권유라도 했겠지만 테런도, 로제타도 그리하지 않았다.

그런데 바론은 같이 온 동생의 존재는 새카맣게 잊은 모양인지, 체이스를 홀로 내버려 두고 돌아갔다.

아무리 침착한 성격의 체이스라 할지라도 이 건은 적잖이 당황스러웠는지 그 마음이 얼굴에 고스란히 떠올라 있었다.

함께 손님 배웅을 나왔던 클라리사가 당황하는 체이스를 향해 새침하게 말했다.

“왕자님. 걱정하지 마세요. 에스테스 공작가의 마차를 내어 드릴 테니, 환궁하시는 데 이용해 주시면 정말 기쁠 거예요. 그래도 되죠, 오라버니?”

“물론이다마다.”

테런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긴장했던 체이스의 안색이 급격히 밝아졌다.

그는 클라리사를 바라보며 진중하게 말했다.

“공작가에서 보여 준 호의는 반드시 기억했다가 후일 갚겠습니다.”

로제타는 두 아이의 모습을 보며 입꼬리를 잠깐 끌어 올렸다가 남몰래 긴 숨을 내쉬었다.

돌아갈 채비를 마친 참석자들은 떠나기 전, 한마디씩 좋은 시간이었다고 인사했다.

“벌써 떠나야 한다니 너무 아쉬워요.”

“제 말이요.”

로제타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모두 후하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이번에 부족했던 점은 반드시 보완할 테니, 다음에도 기꺼이 응해 주세요.”

“다시 초대해 주실 날을 기대할게요.”

몇몇은 테런을 돌아보며 웃으며 말했다.

“공작님, 현명하고 아름다운 부인을 얻게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인사가 조금 길어지자 패트릭이 인상을 찌푸린 채 양해를 구하고 먼저 마차에 올랐다.

그때 하늘에서 쿠르르릉, 무거운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모두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한 박자 느리게 위를 올려다보던 로제타의 눈에 색이 진한 먹구름이 빠르게 밀려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런. 비가 내리겠어요. 본격적으로 쏟아지기 전에 어서들 돌아가시는 게 좋겠어요.”

“그럼 아쉽지만 오늘은 이만 돌아가 봐야겠어요.”

“조만간 초대장을 보내 드릴게요. 티 파티에 꼭 참석해 주세요.”

“물론이죠.”

그렇게 그들이 탄 마차가 차례로 줄지어 에스테스 하우스의 연철문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마지막 마차까지 나가고 난 뒤에야 쿠르릉, 또 한 번 무서운 천둥이 천지를 울렸다.

그제야 로제타는 모든 긴장이 풀렸다는 듯 딱딱하게 굳었던 어깨에서 힘을 뺐다.

“클라리사. 비가 쏟아지기 전에 안으로 들어가자꾸나.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이니까.”

그녀는 클라리사의 어깨를 감싸며 저택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그 뜻을 이룰 수 없었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듯 테런이 로제타의 앞을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그는 제 동생을 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클라리사. 위로 올라가 있으렴.”

클라리사는 부당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로제타와 함께 있을 기회를 빼앗겨 속상하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오라버니. 전 로제타 언니랑 같이 토토를 보러 가려고 했는데요.”

“미안하구나. 클라리사. 하지만 정말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자리를 비켜 주었으면 한단다.”

로제타는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그제야 영리한 아이는 두 사람이 아무 일 없는 척 태평하게 굴고 있는 것이 연기라는 것을 금세 눈치챘다.

잠시 테런과 로제타를 번갈아 바라보던 클라리사는 들으라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양쪽 허리에 팔을 척 올리고는 도도하게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제가 일전에 드린 말씀 기억하시리라 믿어요.”

“응?”

“로제타 언니의 눈에서 눈물이 나온다면, 전 결단코 오라버니를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테런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물론 자신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의도와 달리, 로제타가 앞으로 할 자신의 말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클라리사는 대답을 재촉하듯 그를 계속 바라보고 있었고, 테런은 결국 잠깐 사이를 두고 대답했다.

“명심하마.”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었다.

그가 쓰게 웃으며 제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자, 클라리사는 잘 좀 하라는 뜻으로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제 오라비의 팔을 툭 쳤다.

그러다 이내 한숨을 푹 내쉬고는 자리를 비켜 주었다.

같은 곳에 있던 시종들 역시도 눈치껏 흩어졌다.

이제 넓은 1층 로비에 테런과 로제타 단둘만이 남았다.

테런은 로제타에게로 한 걸음 다가 갔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긴 했지만, 그를 피해 뒤로 물러서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마음에 위안 아닌 위안이 번지는 기분이라 테런은 떨리는 숨을 들이켤 수 있었다.

“이야기, 나눌까요?”

로제타는 대답 없이 고개만 느릿하게 끄덕였다.

사실 마음은 아직 그를 보는 게 많이 불편하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괜찮아질 때까지 조금 더 시간을 끌 수 있었고, 테런도 그런 자신을 충분히 이해하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오해만큼 무용한 감정이 어디에 또 있을까.

로제타는 부정한 생각에 마음을 침식당하고 싶지 않았다.

지난밤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많이 생각해 보았지만, 결론은 하나였다.

‘공작님이 해 주실 말을 듣고 판단하자.’

자신이 테런에게 누군가의 대용품과도 같다고 한 바론의 말이 매우 충격적이긴 했다.

그래서 그 말을 듣고 방으로 올라와 테런을 대면했을 때만 하더라도 그녀는 무척이나 당황했고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머리가 조금씩 맑아지자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망나니 바론이 한 말이잖아.’

그보다는 테런을 믿었다.

그라면 분명, 자신에게 진실만을 말해 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로제타는 그동안 테런이 제게 보여 준 친절함을, 배려를, 따뜻한 웃음을 잃기 싫었고 믿고 싶었다.

그래서 그에게 약속한 그대로 아무런 오해도 하지 않은 채, 그 밤을 견뎌 내었다.

로제타가 조용히 말했다.

“듣는 귀가 없는 곳으로 가요. 여긴 너무 트여 있으니까…….”

테런은 그녀에게서 대화를 피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읽고 크게 안도했다.

“고마워요.”

테런은 로제타가 대화에 응해 준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를 전하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말대로 자리를 좀 옮기도록 할까요?”

에스테스 하우스에서 일하는 누가 감히 주인 내외의 말을 훔쳐 듣겠냐마는, 그런데도 두 사람은 2층으로 자리를 옮겼다.

목적지는 테런의 서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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