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02화
그 층은 온전히 가주의 공간이기 때문에 보안이 가장 잘되는 곳이었다.
서재로 들어가기 전, 테런은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긱스가 그 안에 갇혀 일을 하고 있었다.
“긱스. 잠깐 자리 좀 피해 주게.”
고개만 내밀지 말고 안으로 완전히 들어오셔서 어서 밀린 결재나 해 달라고 잔소리를 하려던 긱스가 벌렸던 입술을 도로 다물었다.
상관의 표정에 어려 있는 심각함과 진지함을 읽어 냈기 때문이었다.
그는 눈치껏 긴말을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무실 밖으로 나오니 테런으로부터 서너 걸음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로제타가 보였다.
그녀는 애꿎은 바닥의 카펫만 발끝으로 꾹꾹 누르고 있었다.
긱스는 로제타를 향해 예의를 차리 듯 짧게 묵례하고는 테런을 향해 정중히 말했다.
“편히 이야기 나누십시오.”
테런이 고맙다는 듯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어차피 서재에서 이야기를 나눌 것이라 집무실에 긱스가 있어도 상관은 없었지만, 그래도 이 층에 아무도 없는 편이 가장 마음이 놓일 것 같아서 그리하였다.
긱스의 뒷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테런은 서재로 걸어갔다.
“들어가시죠.”
테런은 오른손으론 문을 잡고, 왼손으로는 그녀에게 서재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평소라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일이다.
하지만 오늘따라 테런의 앞을 지나가야 한다는 게 못내 긴장되었다.
하지만 의미 없는 실랑이로 시간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로제타는 어깨를 아주 살짝 움츠린 뒤 안으로 들어 갔다.
서재는 전체적으로 아늑한 분위기였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코끝으로 훅 끼치는 종이 냄새는 예민한 로제타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누그러트렸다.
‘정말 크구나.’
서재의 규모에 로제타의 집중력이 다소 흐트러졌다.
그만큼 가주의 서재는 그 위용이 엄청났다.
2층과 3층, 두 개의 층을 텄다고 말은 들었는데 직접 보니 그 규모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컸다.
하늘을 찌를 듯 높다란 책장이 삼면을 둘러싸고 있었고, 남쪽의 벽면은 전체적으로 긴 창문을 설치해 채 광이 좋게끔 했다.
물론 오늘은 날이 흐려 햇빛 대신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는 모습만 생생하게 보였지만.
그렇게 로제타가 서재에 잠시 정신이 팔렸을 그때, 등 뒤로 작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그녀의 앞으로 돌아온 테런이 안락해 보이는 소파를 가리켰다.
“편하게 앉아요.”
그가 권하는 곳에 로제타가 앉자, 그제야 테런도 맞은편에 착석했다.
그는 로제타의 눈치를 살피듯 잠시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떨어트렸다.
그는 허벅지 위쪽에 양쪽 팔을 괴듯이 하고 상체를 조금 수그렸다.
그런 뒤 제 손을 힘껏 깍지 끼어 맞잡았다.
아무래도 주제가 주제니만큼 입을 떼기가 어려웠다.
두 사람 다 서로의 눈치만 보듯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때 로제타가 먼저 물음을 건넸다.
“제가 여쭙고 대답하시는 게 편하실까요?”
테런이 크게 숨을 들이켰다.
이내 고개를 내저은 그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아뇨. 배려는 감사합니다만, 제가 당신께 털어놓고 싶습니다.”
로제타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그녀는 방금 테런이 한 말 중에서 ‘털어놓다’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사용했겠지만, 그 말에서 로제타는 테런이 지금 이 자리에서 제게 거짓을 말하지는 않겠구나 하는 묘한 확신이 들었다.
잠시 주저하던 그가 마른 입술을 열었다.
“솔직히…… 무슨 말을 어디서부터 꺼내야 할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테런의 표정과 목소리는 차분했다. 하지만 손은 아니었다.
깍지를 낀 손에 점차 힘이 실리고 있었다.
그러다 테런은 왼쪽 엄지로 오른쪽 엄지의 거스러미를 긁듯이 까득이기 시작했다.
아랫입술을 치아로 힘껏 씹듯이 누른 그가 또 한 번 숨을 들이켜고 난 뒤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신의 마음이 상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제가 로제타 양의 입장이었대도, 그런 말을 들었으면 화가 났을 거예요. 그런데 내가…… 그대가 잘못 들은 거라고, 오해라고,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고 부정을 먼저 해야 하는지, 아니면 미안하다고 사과부터 해야 하는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전 화가 나지 않았어요, 공작님. 그저 진실을 알고 싶을 뿐이에요.”
테런이 떨구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냥 털어놓을게요. 부디, 들어 줘요.”
로제타가 ‘네.’ 하고 속삭이듯 작게 대답했다.
“제겐 약혼녀가 있었습니다.”
마른침을 삼키듯 입술을 한번 꾹 닫은 그는 한동안 다시 말하지 못했다.
“그녀는 랭우드 후작가의 영애였고,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집안이 정해 준 정혼자였습니다.”
오랜만에 스스로 꺼내는 이야기였다.
“정략결혼이긴 했지만 저희의 사이는 좋았습니다. 저는 그 아이를, 그리고 그 아이도 절 마음에 두었습니다. 어렸지만…… 아주 많이, 서로를 좋아했습니다.”
거기까지 말한 뒤 테런은 힐끗 로제타의 안색을 살폈다.
방금 전 제 말로 그녀가 상처를 받은 얼굴을 하고 있진 않을지 걱정된 탓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고 그저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테런은 그런 로제타의 모습에서 안도감을 느끼는 것과 동시에 조금의 서운함을 느꼈다.
테런은 심호흡을 한 뒤 다음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아이는 15년 전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고, 그 후로도 저는 그 아이를 마음에서 잊지 못했습니다. 내가 지켜 주지 못했다는 자책감 때문에 더 놓을 수 없었던 건지도 몰라요.”
“15년 전이면, 공작님도 어리셨을 때예요.”
생각보다 오랜 세월 동안 자책감이 그를 괴롭혀 왔다는 생각에, 안타까움을 느낀 로제타가 한마디를 거들었다.
하지만 테런의 입가에 지어진 쓴 미소를 걷어 낼 수는 없었다.
“에스테스의 가주가 검은색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지고 태어나듯, 랭우드 후작가의 후손들도 붉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그래서 그 아이의 머리도 붉었지요. ……지금, 제 눈앞의 당신처럼 말이에요.”
허벅지 위에 얌전히 놓인 로제타의 손에 작은 힘이 실리더니 이내 주먹이 쥐어졌다.
그녀의 손안에 잡힌 드레스가 보기 흉한 주름을 만들어 내었다.
그 뒤, 테런은 토해 내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하지만 그뿐입니다.”
얼핏 간절함이 어린 듯한 목소리였다.
테런은 할 수만 있다면 그 아이의 존재를 그냥 계속 기억 속에 영원히 묻어 두고 싶었다.
그 누구도, 하물며 자신도 사는 동안 두 번 다시 꺼내지 않을 생각이었다.
지나간 그 추억들을 다시 헤집는 순간, 또 아플까 봐 겁이 났다.
하지만 테런은 자신이 아프지 않기 위해서, 눈앞의 이 여자를 아프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당신과 그 아이…… 로제는 다른 사람입니다.”
그는 이제껏 본 적 없는, 크게 흔들리는 눈동자를 들어 로제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부정할 수 없고, 그럴 마음도 없습니다. 당신이 가진 머리 색은 분명 윌셔스 왕국에선 보기 힘든 것이고, 그래서 더욱 그 아이와 닮아 보였습니다. 비슷한 이름, 똑같은 머리카락 색과 눈 색. 그래요, 로제타 양. 고백건대, 처음엔 당신을 볼 때마다 그 아이가 떠올랐습니다.”
로제타는 조용히 헛숨을 들이켰다.
테런은 쓴 미소를 지었다. 아니, 그만 미소 지었다고 생각했다.
입꼬리는 제대로 올라가지 않아, 마치 비틀린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뿐입니다. 내가 정말 누군가의 대용품이 필요했더라면, 조금 더 제대로 된 쓰레기 짓을 했을 테니까 말이에요. 예를 들자면, 당신을 만나기 전에 아렌트 외곽에 살고 있는 파스트라인을 데리고 오거나 한다는 식으로 말이죠.”
말을 하면서도 저 역시 떨떠름한지 테런의 표정이 몹시 안 좋았다.
로제타는 그가 그럴만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에 조용히 말을 보탰다.
“하지만 공작님은 그러지 않으셨죠.”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저급하고 저열한 인간까지는 되고 싶지 않으니까요.”
테런이 자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답했다.
그러다 용기를 끌어모으기라도 하는 것처럼 크게 숨을 들이켠 뒤 떨군 고개를 다시 들어 올렸다.
“그러니 이것만은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더욱 몸에 힘을 주었다.
더없이 진중하다는 인상을 심어 주는 자세였다.
로제타가 제게 집중하자,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저 우연일 뿐이에요. 내가 좋아하게 된 두 여자가, 같은 머리 색과 같은 눈동자 색인 것은.”
그 순간 로제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녀는 느릿하게 눈꺼풀을 깜빡이며 저도 모르게 반문부터 했다.
“네? 지금 뭐라고…….”
“좋아합니다, 로제타 양.”
당황한 그녀와 달리, 테런은 시종일관 침착했다.
로제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이제껏 보았던 그 어떤 때보다 더 따스했고, 애정이 담겨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꼭 하고 싶었어요.”
그녀에 대한 사랑과 마음을 고백하는 그의 목소리는 나지막했고, 울림이 있었다.
그는 제 감정에 취해 들뜨지도 않았고, 조급해하지 않았다.
평소 말하는 그대로의 말투와 속도로, 계속해서 차분히 말을 이어 나갔다.
“지난밤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창문만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빨리 해가 뜨길. 그래서 조금이라도 빨리 당신을 만날 수 있길.”
담담한 목소리에 어떠한 열기가 살짝 어려 있었다.
“사려 깊은 당신이니, 분명 내게서 어떠한 말을 듣기 전엔 오해하지 않으리라 생각은 했어요. 하지만 내가 도저히 견딜 수가 없겠더군요. 당신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아서. 당신에게 어서 빨리 변명하고 싶어서.”
로제타는 손을 도저히 어찌할 바 모르겠다는 듯 쥐었다가 펴기를 반복했다.
“어느 순간부터, 어딜 가 무엇을 보든 붉은색만 보면 당신의 얼굴만 떠오릅니다. 당신과 함께 있으면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나로서 웃을 수 있어요. 그토록 긴 시간 날 괴롭히던 지난 과거가, 이제는 제법 희미해지기도 합니다.”
로제타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기분이었다.
심장에서부터 시작된 간지러움이 천천히 위로 올라 목이 간지러웠다.
그건 마치 민들레 홀씨가 그녀의 목구멍에서 자라 들이마시고 내쉬는 숨결에 따라 흔들리며 간지럽히는 기분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조용히 달아올랐다.
그런 로제타를 보는 테런의 얼굴에 툭, 하고 꽃망울이 터지듯 웃음이 번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