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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애 옆에 예쁜 애-103화 (103/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03화

“솔직하게 말하자면, 당장 그 아이를 지우겠노란 약속은 드릴 수 없습니다. 그건 당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일이니까요.”

로제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서운하긴 해도, 그게 말처럼 쉽게 정리가 되는 감정이 아니란 것쯤은 자신도 알고 있었다.

테런은 재차 말을 이었다.

“로제타 양. 난 이게 사랑이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당신을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경직되어 있던 그의 어깨가 한층 더 부드럽게 풀렸고, 목소리도 한결 여유를 찾았다.

단 한 순간도 로제타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눈빛은 따스했다.

“그래서 감히 이기적인 부탁을 드릴까 합니다.”

“무엇을…… 말씀이세요?”

“내게 조금만 더 시간을 줄 수 있겠습니까?”

“시간…… 이요?”

로제타의 반문에 테런이 떨리는 숨을 들이켰다.

“그 아이를 지우진 못해도 묻어 보긴 할게요. 그러고 나서 당신에게 다시 고백하고 싶습니다.”

한마디 한마디에 힘을 실은 그의 목소리에서는 진중함과 진실함을 읽을 수 있었다.

“이렇게 변명하듯, 떠밀리듯 말하는 게 아니라. 당신에 대한 온전한 내 마음 하나만 가지고, 다시 말해 주고 싶어요. 그리고 이게 내가, 당신에게 처음부터 약속했던 존중입니다.”

“……공작님.”

로제타는 목까지 빨개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테런의 설명은 그 무엇보다도 훌륭했다.

사실 그대로를 말했으며, 그녀가 오해할 만한 부분이 무엇인지 미리 생각하고 확실히 아니라고 대답해 주었다.

로제타로서는 더 따져 물을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저 그녀는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제 마음이 심란하고 싱숭생숭한 것만 생각하느라 이런 고백을 받을 줄은 정말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간밤, 로제타를 괴롭히던 마음은 어느새 자취를 감췄다.

로제타에게 조용히 기쁨이 찾아들고 있었다.

애써 표정 관리를 하고 있었으나,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초록빛 눈동자는 햇살을 머금은 듯 아름답게 반짝였다.

말하지 않아도 표정에서 모든 것을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로제타는 기뻐했다.

테런의 마음이, 미처 고백하지 못했던 자신의 마음과 같아서.

그는 그녀에게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는 확신을 심어 주었다.

그것은 로제타의 마음에 평온을 찾아 주었다.

좋아한다는 고백을 들은 것과 매한가지라 그녀는 그가 원하는 시간을 얼마든지 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로제타가 막 고개를 끄덕이려고 할 때였다.

서재 바깥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고, 두 사람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끊기게 되었다.

로제타는 말하기 위해 벌렸던 입술을 도로 다물었다. 그 모습을 아쉽게 바라보던 테런은 한숨을 삼키며 밖을 향해 말했다.

“들어오게.”

노크의 주인공은 바로 집사인 와튼이었다.

그는 대화를 방해하게 돼 무척이나 송구하다는 표정으로 서재 안으로 들어와 두 사람을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각하. 클리프 영애.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 하지만 급히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

“무슨 일인가?”

테런은 되묻는 것과 동시에 묵직한 숨을 몰아 내쉬었다.

로제타와 대화 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와튼이 이렇게 직접 찾아왔다는 것은 퍽 중요한 일이 벌어졌다는 이야기였다.

그 용건이 무엇인지 몰라도 지금은 로제타와의 대화가 더 중요했기에, 그냥 빨리 듣고 내보낼 생각이었다.

집사의 말을 듣기 전까지, 테런의 생각은 분명 그러했다.

와튼은 두 사람의 눈치를 잠시 살폈고, 주저하다가 매우 어렵게 말을 꺼냈다.

“각하, 그리고 영애. 이런 말씀을 올리게 되어 무척이나 유감입니다. 토토가…… 죽었습니다.”

“뭐?”

“……뭐라고 하셨어요? 지금?”

로제타와 테런이 동시에 와튼을 올려다보았다.

그들은 방금 들은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제발 다음에 열릴 와튼의 입에서 아니라고, 자신이 잘못했다고 정정하는 말이 나오기를 고대했다.

와튼이라고 어찌 그들의 간절함을 읽지 못했을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가 전해야 할 말은 슬프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와튼 역시 토토를 아꼈던 만큼 침통한 마음을 안고 무거운 음성으로 어떻게 된 사정인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 숨을 거두었다고 마구간지기가 보고를 해 왔습니다. 토토의 나이가 워낙 많다 보니 회복하기가 무척이나 힘에 부쳤나 봅니다.”

그 순간 창밖에 번개가 번쩍 일었고, 뒤이어 커다란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기다렸다는 듯 세차게 쏟아지는 빗줄기가 모두의 침묵을 대신하여 빈 소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그래. 결국, 버티지 못하고 그렇게 됐군.”

조용히 중얼거리는 테런의 목소리는 메말라 있었다.

큰 감정의 고저가 엿보이지 않았지만, 담담한 그 모습에서 오히려 깊은 절망과 슬픔이 느껴졌다.

테런은 큰 숨을 들이켰고, 그 탓에 그의 가슴이 넓게 평평해졌다.

그렇게 들이마신 숨을 한참이나 몸 안에 간직했다가 길게 내쉬며, 그가 고개를 떨구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로제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세요?”

어찌 되었든 그가 걱정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괜찮아야죠.”

애써 입꼬리를 끌어당겨 보지만 도무지 웃는 것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테런은 갑자기 피로가 몰려오기라도 한 것처럼 한 손으로 눈 앞머리를 꾹꾹 누르며 말했다.

“아무래도 우리의 남은 이야기는 조금 더 나중으로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테런이 조심스럽게 꺼낸 이야기에 로제타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양해해 주어 고맙다는 듯이 그녀를 향해 입꼬리를 늘인 그가 힘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부탁이 있습니다. 나 대신 올라가 클라리사에게 이야기를 대신 좀 전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할게요.”

“고마워요. 난 아무래도 마구간으로 바로 가 보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그의 목소리는 마치 한숨 같았다.

로제타는 테런을 이해했다.

토토와의 추억이 가장 많이 쌓인 것은 누가 뭐래도 그였으니까.

비록 클라리사에게 토토의 죽음을 어떻게 알려야 하는지에 대해선 저 역시 막막했지만, 적어도 지금은 테런에게 토토를 애도할 시간이 조금이라도 주어지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서 가 보세요. 전 조금 이따 클라리사와 함께 갈게요.”

“고마워요.”

테런이 헛숨을 들이켜며 무릎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잠깐 새에 부쩍 더 피로한 얼굴이었다.

“모시겠습니다, 각하.”

와튼이 곧장 서재 문을 열어 테런에게 안내를 했다.

그렇게 두 남자가 떠나고 난 뒤, 로제타는 서재에 홀로 남게 되었다.

그새 빗줄기가 더 굵어진 모양인지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가 더욱 사납고 크게 들렸다.

“나도…… 가 봐야지.”

로제타는 한숨을 푹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가가 시큰해졌지만, 자신이 울면 클라리사가 더 많이 울 것만 같아 꾹 참을 수밖에 없었다.

* * *

로제타는 훌쩍이는 클라리라사의 어깨를 끌어안다시피 하며 마구간으로 향했다.

사실 로제타는 아직 여덟 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에게 벌써 죽음을 보여 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 저만 오려고 했다.

「싫어요! 저도 갈래요! 토토는 저한테도 가족이란 말이에요!」

하지만 클라리사의 뜻이 워낙 완강했다.

게다가 뒤늦게 소식을 듣고 방을 찾아온 카밀라 역시 마음이 쓰인 모양인지 마지막 인사는 하고 오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이렇게 동행하게 된 것이었다.

우산을 쓰고는 있었으나 바람을 동반한 비라 사방에서 쏟아졌다.

드레스가 생각보다 많이 젖어 걷기가 어려웠지만, 둘 중 누구도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

“클라리사. 이제 울음을 그치렴. 토토가 먼 길을 잘 떠날 수 있도록 마지막 인사를 건네줘야지.”

“흑, 네. 그럴게요, 언니.”

“언니랑 한 약속 기억하지? 마지막 인사만 건네고 바로 방으로 올라가는 거야.”

“……네.”

로제타와 클라리사가 막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그녀들은 마구간에서 나오는 테런과 긱스를 마주했다.

로제타는 서둘러 처마 아래로 들어갔고, 우산을 접어 물기를 털어 낸 뒤 두 남자를 마주했다.

테런은 아까 서재를 나설 때와 달리, 재킷을 입지 않고 베스트만 착용하고 있었다.

“오라버니.”

“공작님. 어디 가세요?”

테런이 쓰게 미소 지었다.

“왕궁에서 사람을 보내왔습니다. 아무래도 바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네요.”

“폐하께서, 사람을 보내셨다고요?”

테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제타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녀는 국왕이 무슨 용건으로 테런을 불러들이는 것인지 그 내용을 짐작하고 있었다.

어젯밤 빌리어드 룸 앞에서 바론이 그에게 흘린 이야기를 엿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상해. 왜 바론이 직접 가지 않고 공작님을 보내려는 거지?’

그 저의를 가늠할 수가 없어 로제타는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하더라도 바로 이상함을 느꼈다.

하지만 곧바로 이어진, ‘로제타가 테런의 전 약혼녀의 대용품’이라는 뉘앙스의 이야기가 너무 충격적이어서 그 부분은 새카맣게 잊고 있던 터였다.

‘하여간에 바론은 도움이 안 돼.’

소리 없는 로제타의 불만이 바론에게로 뻗어 나갔다.

“인사할 시간이 충분하지는 못했지만, 토토도 이해해 주겠죠.”

로제타가 눈썹을 살짝 내려트렸다.

오랜 친구이자 가족 같은 존재를 잃은 사람에게 주어진 애도의 시간이 무척이나 짧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에 이렇게 묻고 말았다.

“폐하께 양해를 구하시고 내일 들어가 보시면 어떨까요? 아무래도…… 안 되려나요?”

테런이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그라고 그 방법을 고민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국왕이 보낸 사자에게 ‘기르던 사냥개가 죽었습니다. 급한 용건이 아니라면 내일 찾아뵈고 싶습니다.’라고 말을 전해 달라고 하면 어떨까?

국왕이 과연 저를 이해해 줄까 싶었다.

아마 그러면 국왕은 겉으로는 안된 일이라고 위로해 줄 것이다.

하지만 은연중에 언짢은 티를 내지 않을까.

가장 무난한 결과는 테런을 위로한답시고 새로운 사냥개를 선물로 하사할 것일 테고.

아마도 테런이 무엇에 슬픔을 느끼는 건지 본질적으로 이해하지 못할 공산이 컸다.

왜 그가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는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아하게 생각할 터였다.

토토와 긴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들에겐 그 죽음이 가족을 잃은 슬픈 일이지만,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겐 한낱 가축의 죽음일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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