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04화
테런은 클라리사의 어깨에 튄 빗방울을 다정한 손길로 털어 주며 말했다.
“너무 많이 슬퍼하지 말아라, 클라리사. 토토가 더 많이 아파하지 않고 가게 된 것이 다행이라고, 우리 그렇게 생각하자.”
클라리사는 새빨개진 코로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테런은 제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다시 로제타에게로 시선을 들어 올렸다.
푸른 눈동자는 흙탕물이 일기라도 한 것처럼 조금 탁하고 가라앉아 있었다.
“미안합니다.”
그런 말씀은 마시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로제타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세요. 기다릴게요.”
목적어가 생략되어 있었지만,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아듣지 못할 테런이 아니었다.
그가 헛숨을 들이켠 뒤 굳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긱스가 눈치껏 우산을 펴 들었고, 테런이 그 아래로 들어갔다.
두 남자는 곧 굵은 빗줄기를 헤치며 본관으로 향했다.
분명 무거운 마음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을 테런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로제타는 한숨을 삼켰다.
퍼붓는 빗줄기에 시야가 제한된 상태였지만, 그래도 그의 어깨와 목덜미에 지나치게 힘이 실려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이 너무도 잘 보였다.
한참을 그렇게 테런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던 로제타는 들어오라는 와튼의 말과 자신의 손을 살짝 잡아끄는 클라라사의 행동 덕에 비로소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마구간 안으로 들어가자, 마른 지푸라기들이 습기를 먹은 듯한 눅눅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이미 안에는 토토의 소식을 들은 레나를 비롯한 사용인 여럿이 와 있었다.
그들은 로제타와 클라리사를 보고 서둘러 손수건이나 제 손등으로 눈에 고인 눈물을 훔쳐 내고는 축축하게 젖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 왔다.
“공녀님, 로제타 아가씨. 오셨어요?”
“토토는……?”
클라리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사용인들은 차마 입은 떼지 못하고 모두 한 동작으로 자리를 비켜 주며 눈짓했다.
주춤주춤 걸어 나가던 클라리사는 이내 축 늘어진 토토를 보고 결국 오열하듯 주저앉았고, 로제타 역시 손수건으로 서둘러 눈물을 찍어 내었다.
“클라리사. 공작님이 한 말 기억하지? 토토는 좋은 곳으로 갔을 거야. 우리도 잘 보내 줘야지.”
클라리사는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 내었다.
그러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마지막 인사를 또렷하게 전했다.
“흐흡. 잘 가, 토토야.”
로제타가 장하다는 듯 아이의 어깨를 두드려 주자, 클라리사가 이내 더는 못 보겠다는 듯 토토에게서 몸을 돌려 로제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렇게 제 품에 얼굴을 묻은 채 눈물을 쏟아 내는 아이의 작은 몸을, 로제타는 차분한 손길로 다독여 주었다.
들썩임이 가라앉았을 무렵, 로제타는 클라리사에게 말했다.
“클라리사. 이제 방으로 올라가자. 레나, 부탁해요.”
레나가 서둘러 그들에게로 다가왔다.
“네, 클리프 영애. 공녀님. 자, 이제 저랑 같이 가세요.”
하지만 클라리사는 레나의 손을 바로 잡지 않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혀 촉촉한 눈동자로 로제타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언니는요?”
눈물을 흘린 탓에 뺨에 엉망으로 붙어 버린 그녀의 은빛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로제타가 말했다.
“나는 토토의 마지막을 함께 보내 주고 따라 올라갈게.”
클라리사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고, 순순히 레나의 손을 잡고 마구간을 나섰다.
그렇게 아이가 멀어지고 난 뒤에야 로제타는 토토를 다시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개의 몸 위에 덮여 있는 것이 천이나 붕대가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저건 공작님의 상의가 아닌가요?”
와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각하께서 이곳에 도착하시자마자 토토의 붕대를 풀어 주고, 직접 재킷을 벗어 그 위에 덮어 주셨습니다. 늦게 보러 와서 미안하다고, 당신의 옷을 입고 조심히 가라는 인사를 남기셨지요.”
아마도 테런 딴의 배려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토토도 아마 좋아했으리라.
좋아하는 주인의 냄새에 쌓여 행복하게 길을 떠날 수 있을 테니까.
로제타는 천천히 몸을 낮추고는 개의 머리 부분을 쓰다듬었다.
“잘가, 토토. 만나서 반가웠어. 언젠가 우리 또다시 만나자.”
차오르는 울음을 꾹 참으며 마지막 인사를 건넨 뒤, 그녀는 테런이 벗어 놓고 간 재킷을 끌어 올려 토토의 머 리를 덮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다시 몸을 일으킨 로제타는 숨을 길게 내쉬고는 와튼을 바라보았다.
“와튼. 이제 이 아이는 이제 어떻게 하나요?”
습하기도 하고, 또 계속 토토를 이 상태로 놔둘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무슨 의도로 그런 질문을 한 것인지 단박에 알아들은 와튼은 곧장 대답을 내놓았다.
“각하께서는 화장하든지, 매장하든지 둘 중 하나의 방법으로 하는 게 좋겠다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로제타는 잠시 고민했다.
어차피 비가 내리고 있기 때문에 화장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비가 내리지 않았어도 토토를 태우는 건 아마 싫었을 거야.’
그녀는 다시 와튼을 바라보았다.
초록빛 눈동자에 더없이 진지한 빛이 어려 있었다.
“제가 결정해도 되나요?”
와튼은 고개를 끄덕였다.
“각하께서도 그리 부탁하신다고 말씀 전하셨습니다.”
“그래요. 그러면…….”
로제타는 마음을 굳혔다.
“토토는 매장하도록 하죠.”
그녀의 말에 마구간에 있는 모두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 가끔 토토가 생각나면 찾아가 보고 싶다고 말할 곳이 있었으면 하고 내심 바랐기에 로제타의 결정에 더없이 안도했다.
“꽃과 물을 좋아했던 아이니까, 저택 뒤편의 개울가에 묻어 주기로 해요.”
묘지는 저택 안에 만드는 것이 아니기에 바깥에서 찾는 게 좋았다.
다행히 어제 피크닉을 다녀온 개울가가 에스테스 하우스에서 가까운 편이라 적당한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영지의 에스테스 파크에 있는 호숫가에 데리고 가고 싶었다.
하지만 가는 길이 너무 멀었다.
겨울도 아니기에 이동 중에 시신이 부패할 수도 있었기에 그것까지는 욕심을 내지 않기로 했다.
“그럼 아가씨. 바로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하지만 비가 오는데…….”
로제타가 바깥을 내다보았다.
열린 문 사이로 여전히 쏟아지고 있는 빗방울이 눈에 들어왔다.
“저희의 친구이기도 한걸요. 이 정도는 거뜬히 합니다.”
모두가 연장을 하나씩 챙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도 함께 갈게요.”
“감기 걸리실 텐데…….”
제게 쏟아지는 걱정에 로제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토토는 저한테도 좋은 친구였는걸요.”
* * *
“오. 공작. 왔군.”
“윌셔스에게 광영을. 영원히 찬란하고 존귀하실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일어나도 좋네.”
테런의 인사에 국왕은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서 이리로 와 앉게.”
왕궁에 도착한 테런은 알현실이 아니라 내실로 안내되었다.
그 말은 곧, 오늘의 만남이 공식적이라기보다는 사적인 자리라는 뜻이었다.
국왕의 옆자리에는 오늘 아침나절 먼저 돌아갔던 바론이 앉아 있었다.
그는 아직도 술이 덜 깼다는 듯 찌푸린 얼굴로 금방이라도 누워 버릴 것처럼 비스듬하게 의자에 기대었다.
그 뻔뻔한 얼굴을 보는 순간, 테런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저치 때문에 아끼던, 소중한 존재가 오늘 무지개다리를 건너고 말았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그는 남몰래 심호흡하며 자꾸만 툭 하고 끊어지려 하는 이성을 단단히 붙잡았다.
그렇게 애써 표정과 수선한 마음을 가다듬으며 국왕이 권한 자리에 앉았다.
“갑자기 불러서 놀랐을 것 같네.”
“아닙니다, 폐하.”
“그런데 공작. 얼굴빛이 매우 안 좋군.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건가?”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정말 괜찮습니다.”
오늘따라 딱딱한 그의 음성이 이상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국왕은 다시 묻지 않았다.
뭐 사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왕국은 곧장 테런에게서 관심을 거둔 뒤 그를 부른 이유를 꺼냈다.
“바론 이 녀석이 공작저에 다녀온 뒤 말하더군. 나보다 빨리 그대에게 말을 흘렸다고 말이야.”
테런의 시선이 바론에게 가 닿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숙취로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픔에도 불구하고 그를 향해 비릿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렇게 과음을 했는데도 기억이 끊기지 않았다는 게 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테런은 모르는 척 뒤로 빼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예. 사실 그 말을 전해 듣고 무척 놀랐습니다. 시찰자는 바론 님으로 예정이 되어 있던 것 아니었습니까?”
“그래, 그랬지.”
국왕은 염치없다는 듯 살짝 말꼬리를 흐렸다.
힘주어 다문 입술을 이리저리 비틀던 그가 다시 말을 꺼냈다.
“그래서 상의를 하고 싶어 공작을 급히 불렀네. 자네도 알다시피 이제 곧 우기에 접어들지 않나.”
윌셔스 왕국에서는 왕가와 에스테스 공작가가 협업해 2년에 한 달씩 우기를 만들어 내었다.
농업에 종사하는 이들에게 도움을 줄 뿐만이 아니라, 수목을 자라게 만들어 임업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강수량이 늘면서 수온이 평소와 조금 달라지기 때문에 강에 다양한 어종들이 찾아오기도 했다.
여러모로 이득이 많기에 비가 많이 오더라도 왕국민들이 고대하는 시기였다.
게다가 본격적인 우기가 시작되기 전에 우천제라는 행사를 국가 차원에서 여는데, 이때 대대적으로 식량을 풀기 때문에 왕가에 대한 충성심도 높아지기도 했다.
작년은 쉬었고, 마침 올해가 우기를 만들어 내야 하는 해였다.
하지만 테런은 걱정이 앞섰다.
비가 오면 필연적으로 도로 보수 공사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테런은 도로포장 공사의 책임자로서 무엇보다도 안전을 우선시하고 싶었다.
“예년보다 비가 자주 왔습니다. 농사는 평작이겠지만, 올해는 그냥 지나가심이 어떻습니까?”
하지만 생각보다 국왕의 뜻은 완고했다.
“격년으로 하던 행사야. 모두 고대하고 있을 터인데 이렇게 갑자기 취소한다고 하면 그 반발과 원성을 어찌 감당하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