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05화
“하지만 전국적으로 땅이 파헤쳐져 있는 실정입니다. 이럴 때 큰비가 내리게 된다면 땅이 무너지는 등 큰 사고가 일어날 확률이 높아집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폐하, 1년 뒤로 미루 시지요. 그때쯤이면 공사도 얼추 끝나지 않겠습니까?”
그때 내내 입을 다물고 병든 닭이 조는 것처럼 앉아 있던 바론이 버럭 성질을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아! 그러니까!”
길어지는 대화로 인해, 자신이 여기에 더 머물러야 하는 상황이 무척이나 짜증이 나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자네더러 직접 시찰을 가라고 하는 거지 않나!”
“바론! 입 다물어라.”
제 아들에게 짧은 경고를 남긴 국왕은 다시 테런에게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철부지인 이 녀석보다는 그대가 더 믿음직스러워 그렇네. 원래라면 내가 직접 가 보는 편이 좋겠지만…… 요새 나이가 들었다는 걸 여실히 느끼고 있어서 말이야.”
국왕이 쓰게 웃었다.
“참 민망한 말이지만, 이 녀석을 보냈다가 현지에서 사고라도 치면 내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는지라…….”
국왕은 한심스럽다는 눈길로 제 옆에 앉아 있는 아들을 돌아보았다.
매일 술에 절어 살고, 귀족가의 여식 혹은 유부녀들과 풍문이나 일으키며 사는 바론이 한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지금이야 자신이 정정하니 귀족들이 제 눈치를 보며 쉬쉬하지만, 그도 머지않았음을 알고 있다.
심지어 바론은 물의 힘도 제대로 터득하려 하지 않았다.
왕가에서 태어난 아이니만큼 분명 재능은 있었지만, 정령과 동화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물의 정령인 엘라임도 바론의 소환에 응하지 않고 있었다.
다음 대 국왕이 되기 위해선 엘라임의 인정이 반드시 필요함에도 바론은 ‘제깟 게 날 인정하지 않으면 뭐 어쩌겠어?’라는 심보로 전혀 노력하지 않았다.
국왕의 입장에선 여러모로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고, 하여 이번 우기 때 바론을 국경으로 시찰 보내 민생을 살펴보게 하려고 했다.
하지만 바론은 내내 시큰둥해하다가 결국 최근에 가지 않겠노라고 선언을 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국민들이 가장 신뢰하는 또 다른 가문의 수장을 보낼 수밖에.
이 일로 왕가의 체면이 상하고 에스테스 공작가의 위신이 더욱 굳건해지겠지만, 그 복을 발로 찬 것은 바로 제 아들이었다.
그런 와중에 우기 행사마저 취소해 버린다면 왕실의 권위와 위엄이 더더욱 떨어지며 지지도와 충성심마저 낮아질 것이기에, 국왕의 입장에선 우기를 취소할 수가 없었다.
국왕이 또 저를 한심하게 보며 혀를 차자 바론은 뚱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제 아버지가 테런과 저를 대놓고 스스럼없이 비교하는 일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의 비틀린 마음이 썩은 미소로 드러났다.
“그러니 부탁함세, 공작. 내가 그대 약혼녀의 데뷔탕트도 왕궁에서 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지 않았는가?”
테런이 멈칫하더니 새삼스럽다는 눈빛으로 국왕을 돌아보았다.
분명 그때는 약혼 선물이라며 흔쾌히 제 청을 받아 주는 것이라고 했으면서, 이제 와 은근슬쩍 말을 돌리고 있었다.
테런은 한숨과 함께 떨떠름함을 삼켰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맙네.”
바론이 기지개를 쭉 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건들대며 입을 열었다.
“어쨌거나 유감이네, 공작. 시찰에서 돌아오기 전까지는 결혼식이 미뤄질 테니 말이야.”
테런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으나 굳이 바론의 도발에 대응하지 않았다. 그럴 가치가 없었다.
“그럼 이야기가 마무리된 것 같으니 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애초에 왜 나와 있는지도 모르겠구요.”
국왕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음에도 바론은 먼저 자리를 떴다.
그런 제 아들의 오만불손함에 국왕은 잠시 혀를 찼다.
그런 뒤 다시 테런을 바라보며 부탁을 이었다.
“시찰 때는 우리 체이스도 함께 데리고 가게.”
아직 어린아이였지만, 그래도 왕가의 일원이었다.
테런 혼자서만 왕국민의 신뢰를 얻게 할 수는 없으니, 궁여지책으로 어린아이의 동행까지 떠맡겨 버린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테런의 입장에선 제멋대로인 바론을 수행하는 것보단 체이스 쪽을 상대하는 것이 훨씬 수월한 일이었기에 이 부분에 대해선 진을 빼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마디를 덧붙였다.
“폐하. 제가 폐하의 부탁을 흔쾌히 들어 드렸으니, 다음번엔 제 쪽에서 드리는 작은 부탁을 하나 들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부탁?”
국왕은 생각보다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그게 무엇이지?”
“감사합니다. 그건 훗날 말씀드리겠습니다.”
뭐 어딘가의 채굴권이나 섬이나 하나 달라고 하는 거겠지 싶었던 국왕은 그쯤이야 선뜻 내어 줄 수 있다는 생각에 재차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에스테스 하우스에서 출발한 리스턴 후작가의 마차가 도착했다.
올리비아와 한 공간에 있기 싫다는 듯, 패트릭은 마차가 멈추기 무섭게 계단이 설치되지 않았음에도 벌컥 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이동하는 동안 내리기 시작한 비에, 후작저의 바닥에 물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패트릭이 뛰어내린 곳도 하필이면 그곳이었다.
신발과 양말, 그리고 바지 밑단이 흥건하게 젖자, 패트릭은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이런 썩을!”
사납게 혀를 차며 그는 시종들을 향해 소리를 쳤다.
“우산 안 가지고 오고 다들 무엇 하고 있어!”
시종들이 혼비백산 뛰어와 패트릭과 올리비아의 머리 위로 우산을 씌워 주었다.
그사이 마차 계단이 설치되었고, 올리비아가 그것을 밟으며 조심스럽게 내려왔다.
땅을 딛고 설 때쯤 패트릭은 이미 씩씩대며 저택 안으로 들어간 뒤였다.
올리비아는 흘깃, 제 뒤를 돌아보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따라오고 있는 젤다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불편함을 안고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오늘 아침, 짐도 자신이 싸야 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건, 젤다가 그래도 그 짐가방을 들어 주었다는 점이었다.
적어도 남들 눈에는 메이드로 보이고 싶긴 한가 보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행여 물에 젖을까, 드레스를 살짝 걷고, 조심조심 현관으로 들어서던 올리비아는 로비에 서 있는 마커스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아, 아버지.”
웬일로 그가 마중을 나온 것인가 싶었다.
“지금 돌아왔어요.”
하지만 마커스는 올리비아의 인사는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그는 제 딸에게는 시선 한 자락 주지 않고, 그 뒤를 건너다보며 성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젤다. 이쪽으로.”
그 부름에, 올리비아의 뒤에 서 있던 젤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것 좀 들어 줘요.”
그녀는 자신이 들고 있던 짐가방을 올리비아에게 자연스럽게 건네주었다.
얼떨결에 가방을 든 올리비아는 다소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지나쳐 마커스를 따라가는 젤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진짜 뭐 이런 메이드가 다 있나 싶었다.
* * *
마커스는 문이 닫히기 무섭게 젤다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신을 기억하는 눈치던가?”
젤다는 대번에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알아보지 못하더군요.”
그 대답에 마커스는 잠시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가 눈매를 굳혔다.
“너무 어릴 때라 기억을 못 하는 건가?”
“여섯 살이 어린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기억을 못 하는 나이는 아니에요. 신생아 때라면 모를까.”
젤다는 조용히 중얼거리듯 제 의견을 하나 덧붙였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하나 있었어요.”
“이상한 점? 그게 뭐지?”
“그 아이가 스쳐 지나가려던 내 손을 잡으려고 했어요.”
“손을? 왜 갑자기?”
젤다가 미간을 찌푸린 상태로 바락 성질을 내었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아니, 내 말은 그 행동에 무슨 의미가 있냐는 거야.”
젤다는 골몰하는 표정으로 신중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15년 전 내가 그 아이를 버릴 때, 매몰차게 손을 내쳤거든요. 그걸 기억하고 그런 건가 싶었는데…… 표정을 보아하니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그냥 몸이 기억해서 그런 행동을 한 건가 싶기도 하고. 어휴, 나도 모르겠어요.”
“젤다. 그냥 당신이 지레 찔려서 괜히 의미 부여하는 건 아니야?”
“뭐, 그럴 수도 있겠죠.”
젤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마커스는 짜증스럽다는 듯 한 손으로 머리를 북북 긁으면서 이야기했다.
“당신이 올리비아를 따라 공작가에 가 있는 동안 난 사람을 시켜 그 클리프 남작가라는 곳을 알아봤네.”
“소득이 있었나요?”
“특별한 것은 없어.”
마커스는 책상으로 가서 다섯 장 정도 되는 서류를 들고 와 젤다의 앞에 던지듯 놓았다.
“좀스러운 치들이라, 만약 그 계집이 랭우드의 후계자라는 것을 알았다면 돈줄을 쥐었다고 생각하고 곧장 수도로 올라와 폐하를 알현했겠지. 하다못해 자기들의 주군 가문인 에스테스 공작가를 찾아갔거나.”
마커스가 알아본 결과 클리프 남작가는 절대적으로 돈이 부족한 곳이었다.
그러니 자기들 손에 랭우드의 마지막 핏줄이 쥐어졌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면 어떻게든 관련자들을 찾아내 돈을 뜯었을 게 분명했다.
그 가운데서 로제타 역시 자신의 핏줄이 무엇인지 모를 리가 없었을 것이다.
마커스는 말을 이었다.
“당신이 누군지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다고 했지? 그러면 분명 어릴 때의 기억을 잃은 것일 테야. 만약 자신이 누구에게 버림받았는지 기억을 하고 있었더라면, 당신의 얼굴을 절대 잊으려고 하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지.”
젤다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 생각도 그래요. 어린 나이에 화재에, 그 추웠던 날씨에……. 나름 충격적인 일들의 연속이었겠죠. 그러니 기억을 잃고, 내가 그 아이 옷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대로 자신이 클리프 남작의 사생아인 줄로만 알고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마커스는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 재차 질문을 던졌다.
“올리비아의 시녀로 동행했으니, 비교적 그 아이와 가까이 있을 수 있었겠지? 그 애를 살펴봤나? 반점은? 나타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