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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애 옆에 예쁜 애-106화 (106/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06화

젤다가 기억을 더듬으려는 듯 미간을 좁혔다.

그녀는 마치 쥐어짜 내 얼굴에 주름을 만들어 냈으나 딱히 유의미한 기억을 떠올리지는 못했다.

“딱히 눈에 보이는 부분에는 없었던 것 같아요.”

“같아요가 아니라, 제대로 살펴봤어야지!”

윽박지르는 마커스의 행동에 젤다가 눈에 뿔을 심고 마주 노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살펴봤죠, 나도! 하지만 내가 그 계집애의 옷을 억지로 벗기겠어요, 뭘 하겠어요? 피부가 드러난 부분밖에 살피지 못하는 거 뻔히 알면서 왜 이렇게 닦달을 해요?”

짜증스러운 한숨을 길게 내쉰 마커스가 초조한 듯 집무실을 걸어 다니다가 말했다.

“만약 나타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면 천운이고, 불행히도 이미 몸 어딘가에 그 표식이 나타났다면 하루라도 빨리 우리 쪽으로 데리고 오는 수밖에 없지. 반점이 나타났다곤 해도 당장 힘을 쓸 수 있는 건 아닐 테니까 말이야.”

“그런데 마커스. 랭우드의 후계자는 대체 어떤 때 힘을 각성하는 거죠?”

“그건 나도 몰라. 그저 성인에 가까운 나이가 되면 진정한 후계자에게 반점이 나타난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이야.”

그렇기에 랭우드는 다른 가문과 달리 후계자를 어렸을 때부터 지정해 두지 않았다.

다만 직계일수록 반점이 나타날 확률이 높았다.

만약 현 가주에게 아이가 없다면 랭우드의 핏줄을 이은 방계 중에서라도 꼭 한 명이 나온다는 사실만 문헌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을 뿐이었다.

“그건 젤다 당신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그러니 15년 전에 그 계집애를 없애 버리고 당신 아들을 홀로 후계자로 만들 생각이었던 거잖아.”

“지난 이야기를 왜 다시 꺼내는 거예요?”

젤다의 눈이 매서워졌다.

그녀는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 살을 파고들며 진한 자국을 남겼다.

15년 전, 당시 가주의 남동생인 브라이언과 결혼한 젤다는 슬하에 조지라는 어린 아들을 하나 두고 있었다.

하지만 제 남편이 가주가 아니었기에, 조지가 다음 대의 랭우드를 이을 후계자가 될 확률이 지극히 낮았다.

사생아로 자랐던 젤다는 언제나 본처 소생인 자식들에게 밀리는 삶을 살았다.

제 아들 조지는 사생아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앞에 나서는 삶을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아들이 자랄수록 젤다가 품은 불만은 점점 더 강해졌고, 그녀는 마침내 삐뚤어진 모성을 발휘했다.

당시 6살이던 조카, 로제를 없애 차기 랭우드 후작 자리를 제 아들에게 쥐여 주기로 한 것이다.

그 계획을 마커스와 모의했었다.

유쾌하지 않은 기억을 떠올린 젤다는 기분을 환기하기라도 하듯 길게 숨을 내쉰 뒤 재차 마커스에게 물음을 던졌다.

“그런데 마커스. 당신 정말 그 계집애를 납치할 수 있겠어요?”

근심이 가득 묻은 젤다의 질문에 마커스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럼.”

“에스테스 공작이 그 아이 옆에서 도통 떨어지려 하질 않았어요. 쉽지 않을 거예요.”

연이은 젤다의 경고에도 마커스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오히려 어딘가 자신만만해 보였다.

“곧 떨어지게 될 테니 그 점은 걱정 하지 않아도 돼.”

“되게 자신 있는 투네요.”

“그럼.”

마커스가 비릿하게 웃다가 은근한 목소리로 속사이듯 말을 이었다.

“에스테스 공작이 곧 수도를 비울 예정이거든.”

* * *

다행히 빗줄기는 조금씩 잦아지다가 완전히 그쳤다.

구름은 아직 두꺼워 해가 나진 않았으나, 움직이기엔 나쁘지 않았다.

“다시 내릴 것 같지는 않습니다. 지금 움직이면 좋을 것 같은데 아가씨 생각은 어떠신가요?”

“공작님을 기다리지 않아도 될까요?”

와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고 하시면서, 괜히 당신을 기다리느라 토토를 이 상태로 내버려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군요. 그러면…… 좋아요. 다들 출발하죠.”

로제타와 사용인들은 연장을 챙겼다.

와튼은 테런의 재킷을 잘 여며 토토를 안아 들고 모두의 뒤를 쫓았다.

에스테스 하우스의 후문으로 이동한 그들은 곧장 개울가로 향했고, 물에서 조금 떨어진 언덕 위 느티나무 아래에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그리고 로제타는 그들의 근처에 서서 심각한 표정으로 땅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비가 내렸으니, 원래라면 파낸 구덩이에 흙탕물 같은 것이 고여 있는 게 정상이었다.

하지만 시종들이 퍼낸 곳은 흙이 조금의 물기만 머금고 있는 게 다였다. 물 같은 건 전혀 고여 있지 않았다.

‘심각한데.’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지반의 물이 다 아래로 빠지고 있는 현상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새 사용인들은 구덩이를 적당한 깊이로 다 팠고, 와튼이 그 안에 토토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잘 가렴, 토토.”

“편히 쉬거라.”

모두가 마지막으로 짧은 작별 인사를 나눈 뒤 다시 흙을 덮기 시작했다.

그렇게 땅이 원래의 높이를 되찾았다.

“그럼 저희는 먼저 내려가 보겠습니다.”

“그래요. 모두 고생 많았어요.”

로제타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만 혼자 둘 수 없었기에 와튼이 남아 있었다.

로제타는 그를 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와튼. 잠깐 혼자 있을 시간을 줄 수 있을까요?”

와튼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언덕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렇게 와튼도 아래로 내려갔다.

물론 눈에 보이는 위치에 서 있긴 했지만, 그래도 거리가 제법 되었다.

로제타는 한번 뒤집어 파냈기에 주변보다 흙이 붉은, 토토가 묻힌 곳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더는 할 것이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몸을 돌려 발을 떼기가 어려웠다.

곧 풀이나 꽃이 자라겠지만 지금은 너무나도 휑해 보였다.

이 위에 토토를 기리는 작은 비석을 하나 세우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찮을까 몰라.”

그녀는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사용인들이 흙을 잘 덮고 단단하게 밟은 것을 제 두 눈으로 확인까지 했지만 로제타는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랭우드 후작가의 대가 끊겨 윌셔스 왕국의 지반이 점점 약해지고 있다고 한 테런의 말이 떠올랐다.

그것 때문에 혹시 토토를 추모할 수 있는 이곳도 사라져 버리면 어떡하나 싶은 걱정도 들었다.

부디 이 땅만큼은 온전하길.

로제타는 절실하게 정령의 가호를 바라며 기억을 더듬었다.

‘땅의 정령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기억나지 않는 이름을 떠올리려 애쓰던 그녀의 표정이 순간 밝아졌다.

“아, 그래 맞아. 노아스!”

그녀가 불현듯 떠오른 이름을 육성으로 내뱉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앗, 또…….”

목 뒤에 있는 반점에서 뜨거움이 확 일었다.

이때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강렬한 통증이었다.

그것은 마치 화한 느낌이기도 했다.

그리고…… 쿠구구궁!

그녀가 서 있는 땅이 세차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어? 어……?”

로제타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그녀가 서 있는 부분에서부터 시작된 진동은 마치 너울이 치듯 퍼져 나갔다.

다만 그 진폭이 생각보다 좁아 체감하는 흔들림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로제타는 질겁하며 몸에 중심을 잡으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지진을 느낀 사용인들과 와튼이 기겁하며 로제타가 있는 쪽으로 다시 뛰어 올라오려고 했다.

하지만 땅의 흔들림이 너무 거세 성인 남성인 그들 역시 넘어지지 않기 위해 팔을 허우적거릴 뿐 도통 걸음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난 괜찮아요! 조심해요!”

목소리를 높여 사용인들에게 소리를 쳐 대답해 준 뒤, 로제타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겨 커다란 느티나무의 기둥을 꽉 잡고 섰다.

왕궁에서보다 훨씬 더 심하게 진동하는 땅에 절로 마른침이 삼켜졌다.

머리 위에서 느티나무 잎이 서로 몸을 부대끼는 소리가 쉴 새 없이 큰 소리로 들려왔다.

그러다 문득 기이함을 느꼈다.

‘뭔가…… 이상한데?’

로제타는 곧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가 품은 의문이 아무래도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은 개울가라고는 하나 언덕 위와 공작저와는 반대편에 위치한 쪽으로 내려가는 길에 나무가 많이 심겨 있었다.

작은 숲이라고 봐도 좋은 그곳에는 토끼나 다람쥐, 두더지나 오소리 같은 동물들이 살고 있었고, 나무에는 새들이 머물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땅이 흔들리고 있는데도 그 숲에 사는 새나 동물 중 한 마리도 겁을 먹고 튀어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무척이나 이상했다.

원래 동물들이 사람보다 더 자신의 안전에 예민하게 굴어 전조 증상을 느끼고 도망간다고 알고 있었는데, 전혀 그런 낌새가 엿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 거지?’

그리고 이상한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로제타는 제가 딛고 선 곳의 땅의 흔들림이 점차 약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제가 밟고 선 곳만 그러할 뿐, 다른 곳은 여전히 심각했다. 비틀거리고 있는 사용인들의 모습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마치 그들이 로제타에게 접근하는 것을 막는 것 같기도 했다.

“도대체……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그때였다.

방금 전 토토를 파묻었던 곳의 흙의 움직임이 이상했다.

푸스스스. 푸스스스.

워낙 위쪽의 나뭇잎이 시끄러워 자칫 잘못했다간 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놓쳤겠지만, 로제타는 용케 그것을 잡아냈고 그 덕에 다시 땅으로 시선을 줄 수 있었다.

푸스스스.

마치 땅이 호흡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바람이 빠지는 소리 같았다.

그리고 그 작은 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토토를 묻은 곳이 들썩였다.

한번 헤집었다가 다시 덮어서인지 아무래도 다른 땅보다 무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 같았다.

그 움직임은 마치 물이 끓는 것 같기도 했고, 거품이 사정없이 일어나는 것 같기도 했다.

“왜, 왜 이러는 거야?”

기이한 현상에 로제타는 덜컥 겁이 났다.

그녀는 느티나무를 방패 삼아 슬쩍 몸을 뒤로 물렸다.

흙의 움직임은 위협적일 정도로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몽글몽글한 느낌으로 올라왔다가 내려가는 것을 반복했는데 지금은 마치 역류하는 물처럼 아래에서부터 푸슉푸슉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점점 위로 솟아오르는 흙의 높이가 높아졌을 때였다.

로제타는 미간을 좁혔다.

지금 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광경을 도무지 믿기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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