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07화
솟아오른 흙은 마치 어떤 모양을 만들려고 하는 것 같았다.
누군가 진흙을 뭉쳐 모양을 만드는 것처럼, 흙들은 어딘가에는 뭉쳐지고, 어딘가에서는 떨어지며 모양새를 가다듬어 갔다.
시간이 갈수록 형태는 로제타의 눈에 익은 형태로 변해 갔다.
그녀는 눈꺼풀을 빠르게 깜빡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술을 살짝 벌렸다.
길쭉한 얼굴, 마른 듯하지만 곳곳에 근육이 붙은 몸매.
반쯤 접힌 양쪽 귀와 등을 향해 활등처럼 휘어진 꼬리.
로제타는 마침내, 그 존재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토, 토토?”
누가 보아도 눈앞의 저 흙뭉치는 방금 땅에 묻은 토토였다.
마치 토토의 몸 위에 진흙을 들이붓기라도 한 것처럼 털 한 올 한 올의 결이 살아 있었다.
그녀는 놀라서 동그래진 눈으로 한 번 더 이름을 불렀다.
“너 정말 토토니?”
로제타가 부를 때면 언제나 반갑다는 듯 ‘컹!’ 하고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하고 바쁘게 꼬리를 흔들던 녀석이었는데, 지금은 아무런 동작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흙으로 만들어진 토토는 그저 그 자리에 선 채, 로제타를 빤히 바라보았다.
둘은 계속해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로제타는 긴장한 상태로 눈꺼풀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앞을 응시했다.
하지만 토토의 모습을 취한 ‘저것’은 그저 서 있기만 할 뿐 달려들진 않았다.
‘위협하려는 의도는 아닌가 봐.’
낯익으나 낯선 존재.
경계를 풀기도, 그렇다고 계속 긴장하기도 어려워 어정쩡한 대치 상태를 이어 가던 그때, 내내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던 개가 처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물론 로제타 쪽으로 다가온 것은 아니었다.
오른쪽 앞발을 들더니, 자신이 딛고 서 있는 땅을 긁듯이 살짝 파기 시작했다.
‘왜 저러는 거지?’
로제타는 어안이 벙벙한 눈길로 그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때, 목 뒤에서 찌릿함이 느껴졌다.
뒤이어 마치 비로소 파장이 멎었다는 듯 또렷한 말이 들려왔다.
-아직 무리인가.
목소리는 연령대를 짐작하기는 어려웠으나, 남성의 것이었다.
귀에 들리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 울리는 것만 같은 기분.
로제타는 이러한 느낌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실프와 머릿속으로 대화를 나눌 때 주로 이런 식이었다.
‘누구야?’
그녀느 서둘러 머릿속으로 말을 건넸다.
아무리 거리가 있고 또 언덕 위로 올라오지 못하고 있다고 한들, 사용인들이 근처에 있었기에 그리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녀가 건넨 말이 목소리의 주인에게 가 닿지 않는 것 같았다.
-조금 더 기다려야 하는가.
무척이나 아쉽다는 투였다.
일방적으로 저쪽이 하는 말만 로제타에게 흘러들어 오고 있었다.
토토의 모습을 한 흙덩이는 마치 한숨을 내쉬는 것처럼 고개를 살짝 아래로 내렸다.
-나중에 다시……. 머지않…… 리.
선명하게 들렸던 앞의 말들과 달리 지금의 목소리는 중간중간이 뚝뚝 끊겨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 순간, 토토의 모습을 한 흙덩이가 이내 꼬리부터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꼬리, 엉덩이, 뒷다리, 허리…….
하체에서부터 상체 쪽으로 흙이 빠르게 허물어졌다.
“……어? 잠깐만!”
당황한 로제타가 느티나무 뒤에서 돌아 나왔다.
그녀는 무너지는 것을 막기라도 하려는 듯 팔을 뻗었지만, 그런다고 해서 막을 순 없었다.
머리는 맨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다.
끝까지 로제타를 빤히 응시하며, 토토의 머리가 입을 열었고,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또 한 번 남성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다리고 있다. 그대가 ……을 부르…… 날을. 방법은…… 진심…… 부르라. 진정한 내…… 을!
마치 호통을 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온몸을 울려 버릴 것같이 쩌렁쩌렁한 그 목소리가 자신에게로 날아와 꽂히는 순간, 로제타는 목 뒤의 반점에서 화르륵 불이 붙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마지막 말을 마친 흙으로 만들어진 개는 얼굴까지 후드득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그것은 마치 벼락에 맞은 것처럼 아주 강렬한 통증을 일으켰다.
“으, 윽.”
그리고 그 아픔을 더 참지 못하겠다는 듯, 로제타는 실신해 버렸다.
그 순간 지축이 뒤집힐 것처럼 거세게 흔들리던 땅이 거짓말처럼 일시에 멎었고, 그제야 언덕 아래에 있던 사용인들이 허겁지겁 위로 올라왔다.
“아가씨!”
하지만 이미 정신을 잃은 로제타에게선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와튼과 사용인들은 서둘러 로제타를 업고 저택으로 돌아갔다.
* * *
“으, 음…….”
쓰러진 로제타는 한참 만에 눈을 떴다.
뻑뻑한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익숙한 제 방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왜 자신이 여기에 있는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아. 사람들이 옮겨 줬구나.’
나중에 와튼을 비롯한 그들에게 제대로 감사 인사를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그녀는 길게 숨을 몰아 내쉬었다.
똑바로 누운 채 그 위를 그저 가만히 올려다보며, 그녀는 눈꺼풀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그러다 뒤늦게 훌쩍이는 울음소리와 레나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정신이 드세요?”
“영애. 괜찮으세요?”
클라리사와 레나가 동시에 물음을 건넸다.
그제야 로제타는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오른쪽 사선 아래, 침대 가장자리에 고개를 파묻고 울고 있는 클라리사의 모습이 보였고, 바로 뒤에 레나가 선 채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울보 클라리사. 많이 놀랐구나. 언니 괜찮으니까 이제 그만 울렴. 걱정 끼쳐서 미안해.”
로제타는 잠긴 목소리로 장난스럽게 이야기하고 나서 누운 상태 그대로 손을 뻗었다.
그런 뒤 클라리사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속삭여 주었다.
그렇게 아이부터 달래 주고 난 뒤, 로제타는 레나에게로 시선을 던졌다.
“나 얼마나 정신을 잃은 거예요?”
“한 시간 남짓 되었어요.”
로제타는 계속 누워서 이야기하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에 일어나 보려고도 해 봤지만, 몸이 무거워 그럴 수가 없었다.
“미안해요, 레나.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서 일어나기 힘들어요.”
“괜찮으니 그냥 누워 계세요.”
로제타는 양해해 주어 고맙다는 듯 레나를 향해 미소 지어 보였다.
“지진은…… 괜찮나요? 이제 멎은 거예요?”
레나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놀라셨죠? 이젠 괜찮아요. 거짓말처럼 갑자기 멎더라고요.”
“저택에 피해는 없었어요? 누가 다쳤다거나 건물이 부서졌다거나요.”
레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걱정하시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요. 괜찮으니 안심하세요.”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로제타의 표정은 사뭇 더 심각해졌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다가 재차 질문을 던졌다.
“혹시 아까 있었던 그 지진이 다른 귀족 지구나 평민 지구에도 있었나요?”
“아뇨. 에스테스 공작저 주변에서만 일어난 것 같아요.”
로제타는 아무래도 그 흔들림이 예사 지진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걷기 힘들고 이 큰 공작저가 흔들릴 정도라면 분명 진도가 센 것이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에스테스 하우스 외의 다른 곳에서는 그 진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고 하니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전부 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자 머리가 복잡해졌다.
로제타는 심호흡을 한 뒤 차분하게 되짚어 보기로 했다.
가장 이상한 점부터 하나씩. 하나씩.
‘약혼식 때도 그랬고, 오늘도……. 지진이 있을 때마다 목 뒤가 뜨거워졌어.’
로제타는 마른침을 한번 삼킨 뒤, 레나에게 부탁을 했다.
“레나. 의사를 한 번만 더 불러 줄 수 있어요?”
그러자 클라리사와 레나의 걱정스러운 눈빛이 동시에 쏟아졌다.
“몸이 많이 안 좋으세요?”
“언니, 어디 아파요?”
“아뇨,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로제타는 잠시 말꼬리를 흐렸다.
반사적으로 그녀가 제 목덜미 아래로 손을 집어넣으며 반점이 있는 부위를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열이 오르기라도 한 것처럼 손바닥에 닿은 피부가 뜨거웠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레나가 보기엔 그저 반점이라고 했다.
그 뒤 부른 의사의 의견도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흉터라면 모를까, 일반적인 반점이 통증을 유발할 리는 없지 않은가.
신경성이라고 넘겨서 생각하려고 했지만, 갈수록 잦은 간격으로 일며 심해지는 고통을 좌시하여 넘길 수가 없었다.
의사가 해 줄 말은 뻔히 예상이 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제타는 한 번 더 정말 상처가 아닌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우선…… 알겠어요. 영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바로 의사 선생님을 모셔 올 테니까요.”
로제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나가 먼저 자리를 뜨자, 그녀는 다시 클라리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이의 눈에는 아직도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혀 있었다.
“토토는 잘 묻어 주었단다.”
클라리사는 입술을 꾹 말아 물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밥은 먹었니?”
클라리사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로제타는 짐짓 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언니랑 무슨 약속을 했었지? 끼니와 약은 거르지 말 것. 잊지 않은 거겠죠, 클라리사?”
“잊지 않았지만…… 오늘은 입맛이 없었어요. 너무 무섭기도 했구요.”
이해한다는 듯 아이의 은빛 머리카락을 한 번 더 쓰다듬어 준 뒤, 로제타는 손을 떼었다.
“자. 이제 방으로 돌아가서 식사를 하자. 클라리사. 성장기에 끼니를 거르면 안 돼.”
“언니랑 함께 있으면 안 돼요?”
“클라리사 꿈이 뭐라고 했지? 나랑 눈높이가 똑같아지거나, 아니면 더 컸으면 좋겠다고 했던 것 같은데……? 끼니를 거르면 키가 안 클 거란다.”
“힝. 알았어요, 언니. 그럼 식사하고 바로 다시 와도 돼요?”
“한 숟가락당 세 번 이상 꼭꼭 씹어서 그릇을 깨끗하게 비운다면.”
“약속할게요.”
클라리사가 먼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 작은 손가락에 로제타는 자신도 새끼손가락을 걸며 눈빛으로 한 번 더 당부했다.
마침내, 클라리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 방으로 건너가는 내내 몇 번이나 뒤도는 모습에서 아쉬운 티가 역력했다.
잠시 후, 로제타는 비로소 방에 홀로 남게 되자 잠시 멈췄던 생각을 다시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가볍게 숨을 몰아 내쉬며 정신을 잃기 전까지 자신이 봤던 것들을 하나씩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엄청난 지진과 심상치 않았던 흙의 움직임, 그리고 토토를 묻은 곳에서 만들어진 개의 형상.
한 시간 전 있었던 일은 아무래도 자연적인 현상이라기보다는 초월적인 힘의 개입이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한 사고의 흐름에 따라, 그녀가 언덕에서 들었던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무래도 땅의 정령의 것이 아닌가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