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08화
‘뚝, 뚝 끊겨서 제대로 알아듣기가 힘들었는데. 뭐라고 한 거지?’
왜 자신이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느냐에 대해선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실제로 자신이 에스테스 공작가의 핏줄을 잇지 않았음에도 그동안 실프와 대화를 하고 그 아이의 힘을 사용해 왔기 때문이었다.
테런의 말마따나 자신이 감이 좋아 정령의 모습을 보고, 그들이 내는 소리를 기민하게 알아듣는 것이라면 다른 원소의 정령이 하는 말도 알아들을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실프처럼 머릿속으로 제게 말을 걸어오던 어떤 목소리.
로제타는 그 음성을 떠올려 보려 부단히 노력하다가 문득 이런 의문을 품게 되었다.
‘아냐. 잠깐만. 그보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게 있어. 어째서 땅의 정령이 내 앞에 나타난 거지?’
이상하게도 자꾸만 마음이 술렁거렸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 말도 안 돼.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녀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했다는 듯 일부러 피식 웃었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떠오른 한 가지 가정을 도무지 내팽개치지 못하고 자꾸만 끌어안고 있었다.
‘아직, 아직은 아니야. 아무것도 단정 짓지 말자. 조금 더 알아봐야 해. 모든 게 확실해져야 해. 그게 먼저야.’
로제타는 숨을 들이켰다가 제 몸 안에 가두듯 호흡을 멈췄다.
그러나 심장 박동은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 * *
노크와 동시에 문이 벌컥 열렸다.
“다친 데는 없습니까?”
방 안에 들어온 테런이 로제타를 보자마자 가장 먼저 한 말이었다.
로제타는 놀라지 않았다.
이미 창밖에서 말이 길게 우는 소리를 들어, 그가 돌아왔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와튼에게 테런이 돌아오면 뵙고자 한다는 뜻을 전해 달라 미리 말해 놓았는데,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바로 3층으로 올라온 것만 같았다.
로제타는 침대 위에 여러 개의 베개를 겹치듯 세워 놓고는 그것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그녀는 그렇게 앉은 채로, 테런이 들어온 쪽을 바라보며 인사를 건넸다.
“오셨어요?”
테런은 다시 성마른 목소리로 재차 질문을 던졌다.
“다친 데는요? 지진이 크게 났다고 들었습니다.”
로제타의 침대 가까이 걸음을 옮기는 동안 그의 눈동자는 분주히 움직이며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괜찮아요, 저는.”
그 대답을 듣고 나서야 테런은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로제타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침나절엔 분명 단정하게 빗어 넘겼던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그의 반듯한 이마를 감추듯 덮고 있었고, 그의 넓은 가슴은 거친 호흡 때문에 빠르게 부풀었다가 꺼지기를 반복했다.
“사실 부탁이 있어서 뵈면 좋겠다고 말을 남겼어요.”
“무슨 부탁입니까?”
로제타는 곧장 본론을 이야기하지 않고 살짝 돌려 다른 질문을 먼저 꺼냈다.
“그전에, 공작가의 서재에 어떤 자료들이 있나요?”
“다양한 것들이 있죠. 무엇을 보고 싶어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지간한 장서는 다 있을 겁니다. 왕실 서고 못지않은 서재는 에스테스의 자랑이기도 하니까요.”
“그럼 공작님. 제게 그 열람 권한을 주실 수 있으세요?”
“물론입니다.”
의외로 선뜻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모습에, 로제타는 껄끄러운 이야기를 꺼낸다는 듯 눈썹을 아래로 살짝 내려트리고 한결 차분한 목소리로 다시 운을 떼었다.
이대로 모른 척 서재로 들어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볼 수도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테런이 자신을 존중하며 지난 과거를 이야기해 주었듯이, 자신 역시 그를 존중하는 태도를 보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불편해서, 다시 정확하게 말씀드리고자 해요.”
로제타는 이불 위에 올려 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헛숨을 들이켰다.
그런 뒤 테런을 바라보며 똑바로 응시했다.
“제가 보고 싶은 것은 랭우드 후작가와 관련된 자료예요. 그것을 봐도 되나요?”
그 순간 테런의 얼굴은 마치 불의의 기습을 받아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한 사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맴돌았고, 테런은 한숨을 삼켰다.
꼼지락거리는 자신의 손가락만 보고 있던 로제타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공작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보지 않을게요.”
테런은 그녀에게 전 약혼녀에 대한 마음을 묻어 보겠다고 약속해 주었다.
그러니 로제타의 입장에서 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제법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테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가 랭우드 후작가만 콕 집어 이야기하는 데에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여겼다.
그가 침착한 눈빛으로 로제타의 옆 얼굴을 훑어보았다.
그런 뒤 가만히 숨을 몰아 내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네?”
“랭우드 후작가의 일을 알아보려는 이유가 뭔지 궁금해요.”
그 순간 로제타의 새빨간 입술이 고집스럽게 닫혔다.
그녀의 얼굴에 곤란하다는 빛이 잠시 떠오르더니 이내 다시 입술이 열렸다.
“그건 아직…… 말씀드릴 수 없어요.”
그러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조심스럽게 살펴보며 물었다.
“만약 제가 이유를 설명하지 않으면, 그 가문에 관련된 일을 살펴보는 것에 대해서 허락하지 않으실 건가요?”
테런이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어떻게 그러겠습니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담담하게 대답한 그가 로제타를 향해 애써 눈을 휘었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그가 로제타의 방을 나갔다가 잠시 후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작은 열쇠가 하나 들려 있었다.
“받아요. 서재로 들어갈 수 있는 열쇱니다.”
로제타는 그것을 천천히 말아 쥐며 어딘가 엉성하게 팔을 내렸다.
그런 뒤 흘깃, 테런의 옆얼굴을 훔쳐보았다.
그는 애써 여유로운 척을 하고 있었다.
로제타는 힘을 주어 다문 테런의 입술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깊이 숨을 들이켠 뒤, 목소리를 가다듬고 또렷하게 말했다.
“약속드릴게요.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찾아본 뒤, 다시 이야기 나눠요, 우리.”
테런이 떨리는 숨을 들이켰다가 이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쩌겠는가.
그녀의 말을 들어주는 수밖에, 저는 도리가 없었다.
* * *
그날부터 테런은 똥 마려운 강아지가 되었다.
벌써 나흘째였다.
서재는 집무실의 바로 옆에 있기에, 그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었다.
핑곗거리도 마음껏 만들 수 있었다.
보고 싶은 책이 있어서.
확인해야 할 자료가 있어서.
예전에 서재에 두고 간 서류가 있는 것 같아서.
하지만 테런은 그 어떤 변명도 갖다 붙이지 않았고, 로제타를 방해하지 않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집무실 의자를 박차고 서재의 문 앞까지 갔지만, 그가 용기를 낸 것은 딱 문손잡이를 힘껏 쥐는 것까지였다.
테런은 오늘도 오전 내내 집중하지 못하다가 결국 발작하는 것처럼 집무실을 나섰다.
그런 그를 따라 나온 긱스는, 또 문 손잡이만 잡고 우두커니 서서 내려다보고 있는 테런을 향해 답답하다는 듯 말을 건넸다.
“그러지 말고 남자답게 그 문을 딱 여십시오. 예? 옆에서 지켜보기 답답해서 그럽니다.”
“그런 건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는 진짜로 남자답지 못한 시정잡배들이나 하는 짓이고.”
로제타의 의사에 반하는 일을 하지 않겠다는, 완곡하지만은 않은 어법이었다.
긱스가 어이없다는 듯 테런을 바라보았다.
“그러면요! 시간은 계속 흘러가는데 계속 밖에서 이러고만 계실 겁니까?”
긱스가 열이 받아서 버럭 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테런이 살짝 찌푸린 표정으로 긱스를 돌아보았다.
그는 빈손을 얼굴 높이까지 끌어 올린 뒤 검지로 제 입술을 지그시 누르며 ‘쉿’ 하는 동작을 취해 보였다.
여기서 소란을 일으키게 되면, 서재 안에서 자료를 살펴보고 있을 로제타가 신경을 쓸 테니 조용히 하라는 뜻이었다.
긱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무엇인가를 참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가까스로 목소리를 낮춘 그가 물었다.
“그럼 제가 대신 열어 드릴까요?”
“……됐네.”
테런은 숨을 들이켜며 작게 대답했다.
하지만 말에 담긴 내용과는 달리 그는 여전히 손잡이에서 손을 떼지 못했다.
긱스는 그런 제 상관을 질린다는 듯 곁눈질하다가 한숨을 삼키고 돌아섰다.
“전 갑니다아.”
어차피 자신이 이곳에 같이 있느냐 없느냐는 테런에게 중요한 사항이 아니었다.
저러다 제 감정을 못 이겨서 서재 안으로 들어가면 좋은 거고, 아니면 집무실로 돌아와서 일하겠지 싶었다.
“뭐가 저리 어려우신지.”
긱스가 짧게 혀를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