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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애 옆에 예쁜 애-109화 (109/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09화

* * *

리스턴 후작가.

노크 소리가 들리고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책상 위에 서류를 펴 놓고도 그쪽으로는 눈길 한번 주지 않던 마커스는 크게 숨을 들이켜며 자세를 바르게 가다듬었다.

“아버지. 부르셨다고요?”

안으로 들어온 이는 패트릭이었다.

마커스는 특유의 거만한 눈빛으로 제 아들을 바라보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 패트릭. 문 닫고 이리 좀 와 보거라.”

아버지가 또 자신을 불러 주었다는 생각에 패트릭은 만면에 미소를 띠었다.

마커스에게 호출을 당하고, 그가 무엇인가 지령을 하나씩 내려 줄 때마다 자신이 차기 리스턴 후작에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섰다는 기분이 들었다.

아주 공손히 문을 닫고 돌아선 패트릭은 양손을 착, 하고 맞붙인 뒤 마치 손을 씻듯이 비비며 조금 비굴해 보이기까지 한 모습으로 마커스의 책상 앞까지 다가왔다.

거리가 가까워지기 무섭게 마커스가 잡아먹을 기세로 물었다.

“지난번에 에스테스 영지의 사정을 살피느라 매수했던 마부 말이다. 아직도 그이와 연락하고 있느냐?”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패트릭이 잠시 기억을 더듬듯 얼굴을 찌푸렸다.

“누구를 말씀하시는……. 아! 한스 그놈 말씀이시군요.”

하지만 패트릭은 이내 죄송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지속적으로 연락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때 그렇게 에스테스 남매가 영지로 올라오고 난 뒤에 아버지께서 따로 말씀이 없으셔서 저 역시 꼬리를 잡힐까, 만나지 않고 있었습니다.”

“쯧. 도움이 안 되는군.”

그 서늘한 한마디는 패트릭의 마음 속에 조바심을 불러일으켰다.

마커스가 마뜩잖다는 듯 혀를 차기 시작하자, 그 술렁거림이 더욱 심해졌다.

“그럼 아주 연이 끊어진 게냐?”

별 기대 없이 던진 그 물음이 마치 동아줄이라도 되는 듯 패트릭이 재빨리 대답을 올렸다.

“다, 다시 필요하시면 수소문해 보겠습니다.”

“어떻게?”

“노름하던 버릇이 어디 그리 쉽게 끊어지겠습니까? 수도에 올라오고 난 뒤에도 분명 제 버릇 남 못 주고 도박장을 들락거리고 있을 테니 만나고자 하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

마커스는 얼굴을 찌푸린 상태에서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가 큰 숨을 들이켠 뒤 고개를 턱 쪽으로 당겼다.

“좋아. 한번 알아보거라. 그리고 연이 닿는다면. 가까운 시일 내에, 그자를 내게 한번 데리고 오고.”

패트릭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께서 직접 만나시려고요? 번거롭게 그러지 마시고, 늘 그랬던 것처럼 제게 시켜 주시면 열심히 수행하겠습니다.”

그 짧은 사이에도 패트릭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그도 그럴 것이 한스와 제 아버지가 직접 대면하게 된다면, 자신이 마커스에게 점수를 딸 기회가 줄어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패트릭으로서는 그 기회가 무척이나 아쉽게 느껴졌다.

그런 행동 하나하나가 자신이 미래의 가주가 되는 데 분명 큰 도움이 될 것이리라.

그래서 최대한 자신이 한스와 마커스 사이의 중간다리 역할을 하며 마커스가 무슨 생각으로 어떤 명령을 내리는지를 나름대로 판단하려고 했다.

그도 제 아비를 닮아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 알아야 하는 일종의 편집증적인 강박증이 있었다.

그런 제 속내가 드러나지 않게 최대한 조심해서 말했지만 노회한 마커스의 눈을 속일 수 없었다.

그렇게 제 아버지로부터 돌아오는 것은 호된 꾸지람뿐이었다.

“넌 입 다물고 시키는 일이나 제대로 해라!”

패트릭의 얼굴에 낭패감이 번져 나갔다.

그는 윗니로 아랫입술을 지그시 누르며, 서둘러 마커스에게 고개를 숙였다.

조금이라도 그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 죄송합니다. 아버지. 연락이 닿는 대로 바로 데리고 오겠습니다.”

“나가 봐라.”

패트릭은 무엇인가 할 말이 남았다는 듯 잠시 입술을 벙긋거렸지만, 이내 조개처럼 꾹 다물고 마커스를 향 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뒤 무거운 걸음을 떼어 문을 나섰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집무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노크는 없었다.

리스턴 후작가, 그중에서도 가주가 사용하는 공간을 이렇게까지 스스럼 없이 열고 들어오는 이는 단 하나뿐이었다.

마커스는 한숨을 삼키며 문가로 시선을 던졌다.

아니나 다를까 바론이 해맑은 얼굴로 그를 마주 보며 웃은 뒤 ‘여어.’라는 소리로 짧은 인사를 대신하며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바론은 마커스의 집무실이 마치 제 것이라도 되는 양, 긴 카우치에 풀썩 드러눕기부터 했다.

한두 번 그러는 것이 아니었다는 듯 마커스는 이제 싫은 내색도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의 앞에 앉았다.

“기별도 없이 어인 일이십니까?”

“나와 후작가가 그 정도 막역한 사이라 가능한 일 아니겠는가?”

“하지만 이리 자주 드나드시면 국왕 폐하께 의심을 사실 겁니다.”

바론이 콧방귀를 뀌었다.

“자네는 가끔 너무 심약해.”

“전하께서 대범하신 게지요.”

“흥. 부왕께서 아시면 뭐가 달라지겠는가? 이미 나이가 드셔 나 말고는 별다른 도리도 없으시거늘.”

바론은 누운 채로 발끝을 까닥이며 잠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러다 한숨을 푹 내쉬며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전부터 얼마나 사무관한테 들들 볶였는지. 그냥 이쪽으로 피난 왔네. 그러니 후작, 그대라도 입을 좀 다물어 줘. 조금 쉬다가 갈 테니까 말이야.”

매우 놀랍게도, 바론도 일단 일이라는 것을 하기는 했다.

다만 문제는 제게 주어진 권한과 권력을 남용해, 올바르지 못한 뜻과 결탁한 것에 있었다.

자질이야 어쨌든지 간에 왕세자 자리에 올라 있으니, 국왕은 바론에게 작년부터 재정관의 업무를 맡겼다.

국가 살림의 가장 기본이 되는 돈의 흐름을 파악하여 깨우치라는 뜻이었다.

정책을 수립하고, 국가사업을 실행하여 적정한 예산을 분배하기 위해선 반드시 알아야 할 일이기도 했다.

하지만 바론은 그 자리에 올라도 변하는 게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매달 품위 유지비로 받는 것보다 수백 배는 많은 나랏돈을 보고 슬그머니 욕심이 머리를 치들었다.

그러다가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착복하면 자신이 얼마든지 딴 주머니를 찰 수 있다는 생각에 빠졌다.

그때 리스턴 후작이 은밀히 제안을 해 왔고, 바론은 결국 그와 손을 잡게 되었다.

가짜 보석, 그중에서도 가짜 진주를 만들어 시중에 유통하기로 결탁했다.

미래의 군주가 될 사람이 왕국민의 등이나 처먹을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바론에게는 일말의 죄책감도 없었다.

어차피 국민의 돈은 제 돈이나 마찬가지였고, 그것이 제 주머니에 들어오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겼다.

그에게 왕국민은 돌보아야 할 어린 자식들이 아니라, 제 주머니를 채워 주기 위한 일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소위 말하는 권리만 누릴 줄 알고, 의무는 조금도 행하지 않는 전형적인 인간의 대표 격이 바로 바론이라고 볼 수 있었다.

“아, 맞다.”

바론은 잊고 있던 용건이 생각났다는 듯 짧은 추임새를 흘렸다.

그런 뒤 두 다리를 L자 모양으로 허공에 들어 올리고는 단숨에 두 다리를 내렸다.

그 반동을 이용해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운 그가 마커스를 향해 돌아 앉으며 조금 사나운 기세로 따져 물었다.

“그런데 말이야, 후작. 요새 상납금이 너무 줄어든 것 아닌가?”

랭우드 후작가의 대가 끊긴 이후로 왕실은 시중에 유통되는 모든 광물을 전문가에게 감정을 의뢰하여 진품만 시중에 유통했다.

그런데 현재 국가 공인 감정사가 바로 바론이 심어 놓은 사람이었다.

그들은 작당하여, 리스턴 후작가에서 만든 가짜 진주에 대해 상급 진품이라는 거짓 감정을 하였고, 그것을 시장에 유통해 부정한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바론은 그것을 눈감아 주는 대가로 마커스로부터 ‘상납금’이라고 부르는 일종의 커미션을 받고 있었는데, 최근 그 액수가 지난번보다 훨씬 적어져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도 더는 못 봐주지 않겠나.”

바론의 으름장에도 마커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아. 사정이 좀 있습니다.”

사무관을 피해 쉬러 왔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하고, 본론은 이것이었구나 싶은 생각에 저도 모르게 비웃음이 샐 것 같았다.

“사정이 있었으면 미리 내게 귀띔하여 상의를 했어야지.”

“차차 말씀드릴 예정이었지요. 전하께서도 그동안 잠시 몸이 안 좋지 않으셨습니까? 에스테스 공작가에서의 일로 말이죠.”

에둘러 말하고는 있었으나, 무슨 일을 가리키는 건지 바로 알아들은 바론이 거칠게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멋쩍다는 듯이 뒤통수를 북북 만졌다.

손끝에 간간이 혹이 걸리자 조금 짜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실은 모조 진주 사업은 이제 그만두려고 합니다.”

“그러면?”

바론이 성마른 목소리로 질문했다.

당장 제 주머니에 꽂히는 돈이 적어질 것을 염려한 까닭이다.

“보석이란 게 본디 희귀해서 그 값어치가 더 나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슬슬 진짜배기를 팔아야지요.”

마커스의 말에 바론이 눈살을 찌푸렸다.

“근데 그게 가능할 것이라고 보는가? 랭우드가 없어서 더는 광산이 발견되지 않는 상황이지 않나.”

“소신에게 다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니 전하께서는 심려 놓고, 기다리고 계십시오.”

마커스의 타이름에 바론이 기세를 한결 누그러트리며 물었다.

“그런데 대체 또 무슨 일을 꾸미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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