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10화
퍽 재미난 질문이라도 들었다는 듯 마커스가 마른 웃음을 터트렸다.
“전하의 말씀만 들으면, 제가 천하의 둘도 없는 악당처럼 느껴집니다.”
“사실에 가까운 말이지 않나?”
새삼스러운 지적이라는 듯 바론이 빈정거렸다.
마커스는 웃음을 갈무리하고 한껏 낮춘 목소리로 말했다.
“어찌 됐든 지금은 시기상조라 전하께 아무런 말씀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일이 얼추 정리되어 조금이라도 가닥이 잡힌다면 그때 말씀드릴 테니 답답하시더라도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우리 사이에 정말 이러긴가?”
“죄송합니다.”
바론이 서운하다는 기색을 티 냈으나, 마커스의 입에서 이런 얘기까지 나온 이상, 그가 더는 입을 열지 않으리라는 것도 않았다.
“알겠네. 오래 기다리게 하지만 말게.”
“명심하겠습니다.”
그랬기에 못마땅한 마음을 감추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달칵, 무엇인가를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뚫어져라 책만 바라보고 있던 로제타가 그쪽으로 시선을 던지자, 고소한 향기와 함께 하얀 김이 피어오르고 있는 찻잔이 제 곁에 놓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제가 방해했나 봐요.”
“아, 레나. 들어오는 소리 못 들었는데.”
로제타의 말에 레나가 쟁반을 앞으로 모으듯 들며 차분하게 말했다.
“노크는 두 번 정도 했는데, 아무래도 못 들으신 것 같았어요.”
“책에 너무 집중했나 봐요.”
로제타가 민망한 듯 웃으며 대꾸했다.
빠르게 눈꺼풀을 깜빡이니, 눈물이 마른 눈이 따끔따끔했다.
“몰래 차만 두고 나가려 했는데 들켜 버렸네요.”
레나가 민망하다는 듯이 웃으며 말하자 로제타가 따라서 미소 지었다.
“방해는요. 덕분에 이렇게 쉬는 거죠. 차 고마워요. 안 그래도 목이 말랐는데, 덕분에 잘 마실게요.”
로제타는 방금까지 보고 있던 책에 책갈피를 끼워 내려놓고 찻잔으로 손을 뻗었다.
한 모금 머금으니, 입 안에 향긋한 레몬 향과 동시에 달콤함이 퍼졌다.
“레몬티에 꿀을 넣었군요.”
“집중하실 땐, 단것이 좋으니까요.”
로제타는 눈을 살짝 아래로 깐 뒤, 동의한다는 듯 미소를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 모금 더 마시고 나서야 찻잔을 내려놓은 그녀가 시선을 돌려 서재 창을 내다보았다.
땅거미가 지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벌써 저녁인가 보군요.”
“오늘은 식당에서 식사하시겠어요?”
레나가 조심스럽게 물음을 건넸지만, 로제타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번거롭겠지만, 이곳으로 샌드위치를 가져다줬으면 해요. 아니면 수프 한 그릇도 충분하고요.”
레나가 걱정하듯 눈썹을 내려트리며 말했다.
“매일 이렇게 부실하게 드시면 건강이 상할 거예요, 영애.”
“계속 이렇게 먹는 것도 아니고 고작 며칠뿐인걸요. 아마 오늘 밤까지만 보면 다 볼 수 있을 거예요.”
로제타가 입술을 길게 늘인 뒤, 레나를 향해 ‘부탁해요.’라며 한 번 더 확인하듯 이야기했다.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직감한 레나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주방에 그리 전할게요.”
“고마워요.”
저녁 식사에 대한 이야기가 마무리 되었으니, 로제타는 레나가 곧 서재를 나가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예상과 달리 레나는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다.
마치 양발에 못이 박히기라도 한 것처럼.
그 모습을 왜 그러냐는 듯 바라보던 로제타가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레나. 괜찮으니까 편하게 말해요. 들을 준비는 되어 있답니다.”
부드러운 미소를 띤 로제타의 목소리에 레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로제타는 직감적으로 레나가 테런의 전 약혼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아무래도 뒤늦게 테런과 로제타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게 된 모양이었다.
그 점에 대해선 이제 더 이상 딱히 유감이 없었기에 로제타는 가벼운 마음으로 대답해 줄 수 있었다.
“섭섭했지만,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곤 생각하고 있어요. 이해합니다.”
로제타는 자신이 레나를 신뢰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문제는 차치해 두었다.
그것과 상관없이 레나는 애당초 테런의 사람이었다.
자신이 에스테스 공작의 약혼녀가 되지 않았다면 만날 일 없었을 것이다.
그녀가 굳이 자신의 주군인 테런에 관한 안 좋은 이야기를 입에 올릴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굳이 먼저 꺼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거야.’
로제타가 굳이 알지 않아도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녀가 테런의 전 약혼녀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 모르는 채로 지내는 편이 더 나으리라 판단했을 수도 있다.
로제타 역시 수차례,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그에 대해선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요. 내가 레나의 입장이었어도 곤란했을 거예요. 막상 말을 하려 해도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하나 난감했겠죠.”
“정말…… 면목 없고, 감사해요. 영애.”
레나가 울먹이며 중얼거렸다.
그러다 한마디를 더했다.
“클리프 영애. 정말 주제넘지만 한 말씀 더 드려도 될까요?”
“당신의 조언은 언제나 내게 유익한 뼈와 살이 되었죠. 기탄없이 말해 줘요.”
로제타가 무슨 말이냐는 듯 웃으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레나가 큰마음을 먹었다는 듯 조금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
“공작님이 애타게 기다리고 계세요.”
“아…….”
레나는 조금 더 힘을 주어 말했다.
“공작님께서 떠나실 날이 머지않았어요. 애타게 기다리고 계신데, 얼굴이라도 한번 보여 드려 주세요.”
그 순간 로제타의 얼굴이 다시 위로 들렸다.
미간이 살짝 좁아져 있었다.
“네? 그게 무슨 말인가요? 공작님께서 떠나다니요?”
“아…….”
레나가 눈동자를 살짝 굴렸다.
“모르셨어요? 전 아시는 줄 알았는데……. 이걸 어쩌나.”
손으로 벌어진 입술을 살짝 가린 그녀가 이내 설명을 이었다.
“공작님께서 왕세자 전하를 대신해 국경 지대에 시찰을 가게 되셨어요. 곧 우기를 만들어 내실 계획이라, 체이스 왕자님과 겸사겸사해서요.”
로제타의 눈꺼풀이 빠르게 깜빡였다.
‘아 참. 그랬지.’
며칠 전, 빌리어드 룸의 문밖에서 바론이 그에게 자신을 대신해서 국경 시찰을 나가라고 했던 말을 분명 들었다.
로제타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심하고 있자, 레나가 조바심이 난 목소리로 한 번 더 권유했다.
“영애.”
로제타는 자신이 보고 있던 책을 잠시 눈여겨보았다.
어차피 이것이 랭우드 후작가에 관한 마지막 자료였다.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가 내쉬며 레나에게 말했다.
“레나. 바쁘지 않다면 말 좀 전해 줄래요?”
레나의 얼굴색이 밝아졌다.
“물론이에요.”
“공작님께, 내일 오후에 잠깐 뵐 수 있는지 여쭤봐 주세요.”
“아무리 바빠도 그 시간만큼은 꼭 빼시라고 제가 말씀드릴게요.”
“아뇨, 그러지는 말고…….”
“아뇨! 두 분은 꼭 만나야 해요.”
힘이 잔뜩 들어간 레나의 말에 로제타가 못 말린다는 듯이 웃어 버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부탁할게요.”
“네, 걱정 마세요.”
그렇게 레나가 나가고 난 뒤에 로제타는 생각에 잠겼다.
랭우드 후작가의 일만 알아보느라고 우선순위에서 제쳐 두고 있던 바론의 일이 떠올랐다.
“도대체 원작이 어떻게 틀어지려고 이러는 거지?”
재차 한숨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분명 원작에서는 바론이 국경 시찰을 나간다.
물론 소설에서도 가기 싫어서 등 떠밀리듯 길을 나서긴 했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랐다.
진짜로 가기 싫다고 뻗대어서, 기어코 자신 대신 테런과 체이스를 보냈기 때문이었다.
“시찰을 가지 않으면 제니스를 만나지 못하게 될 테고, 그럼 바론은 영원히 개과천선을 못 하게 되는 건가?”
바론이라는 망나니 캐릭터는 여자 주인공을 운명적으로 만나면서부터 성격이 180도로 전환된다.
그런데 그 스스로 그 기회를 발로 뻥 차 버렸으니, 개과천선할 기회가 영영 사라져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막돼먹은 놈한테 이 나라를 맡겨야 한다니……. 너무 암담하다.”
로제타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엄지로 꾹꾹 누르다가 덮었던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아무튼, 그건 내일 공작님이랑 이야기를 나눠 보자.”
로제타는 억지로 책에 시선을 주며 남은 분량을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탐독했다.
마지막 책장을 덮었을 땐, 이미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각이었다.
“다 읽었다.”
눈은 무척이나 피로하였지만, 이상하리만치 정신은 또렷하였다.
로제타는 서둘러 책들을 원래의 자리에 꽂아 넣고, 촛불을 불어 끈 뒤 서재의 문을 잠그고 나왔다.
자신이 알아낸 것을 빨리 정리하고 싶어서 마음이 급했다.
3층의 제 방으로 올라온 그녀는 곧장 책상에 앉아 종이와 깃펜을 꺼냈다.
펜촉이 잉크를 머금자, 그녀는 하얀 종이 위에 자신이 알아낸 것들을 하나씩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1. 나는 여섯 살 이전의 기억이 없다.
2. 랭우드 후작가의 피를 이은 자는 모두 붉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다.
3. 랭우드 후작가는 15년 전 의문의 전소 사고로 가문의 직계가 모두 죽었다.
로제타는 3항까지 쓴 뒤 자신이 특별히 주목해야 할 단어나 문장들에 밑줄을 긋거나 동그라미를 쳤다.
그녀가 체크한 것은 ‘붉은 머리카락’, ‘여섯 살 이전의 기억이 없다’, 그리고 ‘15년 전 의문의 전소 사고’였다.
그런 뒤 4항을 마저 쓰기 시작했다.
4. 당시 랭우드 후작의 외동딸인…….
하지만 로제타는 문장을 끝까지 완성하지 못했다.
그녀는 거기까지 쓴 뒤 크게 숨을 들이켰다.
떠올리고 싶지 않았지만, 저절로 테런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어렸지만…… 아주 많이, 서로를 좋아했습니다.」
로제타가 살그머니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
랭우드 후작 영애의 이름을 써야 하는 종이의 빈칸을 바라보고 있던 시선은 자꾸만 도망쳤다.
깃펜을 쥔 손에 더욱 힘이 실리며 반듯하게 깎은 손톱이 손바닥 살을 파고들었다.
로제타는 묵직한 속을 덜어 내고 싶다는 듯 길게 숨을 몰아 내쉰 뒤, 의식적으로 소리를 내어 중얼거렸다.
“집중하자. 딴생각할 때가 아니란 말이야.”
한 번 더 심호흡을 한 뒤 그녀가 다음 구절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4. ……‘로제 안나 랭우드’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
아주 큰 일을 끝냈다는 듯 그녀는 쓰는 동안 강하게 물고 있던 아랫입술을 그제야 풀어 놓았다.
5. 당시 랭우드 후작의 동생인 브라이언 랭우드의 처, 젤다 랭우드가 행방불명되었다.
마침표를 찍기 무섭게 로제타가 미 간을 좁히며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젤다라……. 하우스 파티 때 리스턴 영애를 따라온 메이드의 이름도 젤다였는데.”
며칠 전 만났던 그녀를 기억해 내는 순간 로제타는 마치 학습이라도 된 것처럼 젤다가 자신의 손을 매섭게 쳤던 그때의 감각을 떠올렸다. 여전히 불유쾌한 기분이었다.
그 감각을 지워 내고 싶다는 듯 로제타는 세차게 고개를 좌우로 흔든 뒤 혀를 찼다.
“그건 우선 넘어가자. 일단 제일 중요한 것은 이거야.”
로제타가 숨을 크게 들이켠 뒤, 입술을 꾹 물고는 마지막 문항을 적기 시작했다.
6. 적법한 랭우드의 후계자에겐 신체 한 군데 반점이 나타난다. 그 시기는 대략 성인식 전후다.
“반점…….”
로제타는 자신도 모르게 가장 마음에 걸리는 단어를 중얼거렸다.
그런 뒤 홀린 듯이 깃펜을 손에서 놓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천천히 화장대 앞으로 이동했다.
거울에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는 제 모습이 비쳤다.
창문을 열어 놓지도 않았건만, 어디서 바람이 불어오기라도 하는 건지 조용히 타오르며 방 안을 밝혀 주던 촛불이 크게 일렁이며 잠시 어둠과 빛이 뒤섞였다.
그 때문에 로제타는 한동안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간신히 촛불이 잠잠해지고 나서야 로제타는 천천히 손을 위로 올려,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벗기 시작했다.
옷을 벗는 그녀의 표정이 사뭇 비장했다.
드레스는 매우 가벼운 소리를 내며 스르륵 그녀의 발치로 힘없이 툭 떨어졌다.
로제타는 물고 있던 아랫입술을 놓치듯 풀며 다시 고개를 들었다. 긴장으로 굳어진 제 어깨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떨리는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붉은 머리카락을 하나로 모은 채, 오른쪽 어깨 위로 넘긴 뒤, 그녀는 화장대 거울 앞에서 천천히 돌아섰다.
그런 뒤 작은 손거울을 들어 올려 화장대 거울에 비치고 있는 제 뒷모습을 겨냥했다.
목덜미의 초승달 모양의 반점은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보다 그 경계가 더욱 선명하고 진해 보였다.
손거울에 비친 그 반점을 지그시 바라보던 로제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그거…… 나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