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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애 옆에 예쁜 애-111화 (111/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11화

* * *

이튿날.

준비를 마친 로제타는 거울 속 제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양 볼에 숨길 수 없는 홍조와 긴장과 떨림, 기대가 한데 어우러진 초록빛 눈동자가 보였다.

그런 제 모습이 낯설고도 어딘지 모르게 부끄러워 로제타는 살짝 시선을 아래로 깔았다.

그런 뒤 자신에게 힘이라도 주듯 양쪽 뺨을 손바닥으로 감싸듯 살짝 때리며 심호흡했다.

“으. 떨린다.”

테런에게 고백 비슷한 것을 받은 뒤 처음으로 느긋하게 시간을 들여 만나는 것이었다.

그가 로제타에게 확신을 주자마자 토토의 죽음과 국왕의 부름. 그리고 지진 등 제정신을 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큰일이 연달아 몰아쳤다.

그래서 오늘의 만남이 더욱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로제타는 한 번 더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쉰 뒤 마침내 화장대 의자에서 일어났다.

곧장 방문을 연 그녀는 이내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머!”

그녀의 눈앞에, 익숙한 복도의 모습이 아니라 무슨 벽 같은 게 떡하니 출입구를 막고 있는 것이 보인 탓이다.

로제타는 반사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그제야 제 앞을 가로막은 것이 벽이 아니라 사람의 가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테런이었다.

“공작님? 여기서 뭐 하고 계세요?”

테런 역시 이렇게 갑자기 문이 열릴 줄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던지 눈을 굴렸다.

입매를 길게 늘인 그가 조금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음. 좋은 오후입니다, 로제타 양.”

그는 엉거주춤하게 허공에 들고 있던 팔을 살짝 아래로 떨어트렸다.

자세로 보아, 아무래도 노크를 하려던 순간 로제타가 벌컥 방문을 연 것 같았다.

테런은 뒤로 물러선 로제타의 발을 슬그머니 확인했다.

서글서글한 눈매에 아주 살짝 서운함이 맺혔다.

하지만 그는 능숙하게 표정을 감춘 뒤, 로제타를 향해 입을 열었다.

“놀라게 해 드릴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그저 모시러 왔을 뿐이에요.”

로제타가 얼떨떨하게 대꾸했다.

“여기에서 티룸까지 가는 데 넉넉히 10분이면 되는데도요?”

“네, 그런데도요.”

테런이 슬며시 입꼬리를 끌어당겨 미소를 지었다.

그저 로제타를 조금 더 일찍 만나고 싶어서 찾아왔다는 말은 삼켰다.

어제저녁, 레나에게 로제타가 만나고자 한다는 말을 들은 뒤부터 그는 내내 조금 들뜬 상태였다.

도저히 오후까지 기다릴 자신이 없어, 그냥 아침에 만나고 싶다고 의사를 도로 전할까 하다가도 말았다.

로제타에게 부담이 될까 염려된 탓이다.

그렇게 거의 반나절을 안절부절못하다가, 이렇게 그녀의 방까지 찾아오고 말았다.

테런이 로제타를 향해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갈까요?”

그 손끝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녀가 방에서 완전히 나왔다.

문을 닫고 난 뒤에야 그녀는 잠시의 망설임 끝에 제 손을 얹었다.

걸음을 옮기는 도중에는 서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티룸에 도착하고 난 뒤에도, 메이드들이 다과와 차를 내온 뒤, 자리를 비켜 줄 때까지 두 사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잔을 잠시 내려다보던 로제타가 먼저 조용히 말을 꺼냈다.

“오랜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요. 사흘? 나흘? 정도 되었나요?”

최근엔 계속 서재에만 틀어박혀 자료를 살펴보는 것에만 온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었기에 로제타는 날짜가 얼마나 지났는지 감이 제대로 오지 않았다.

그녀가 긴가민가해하고 있자 테런이 곧바로 정정해 주었다.

“오늘로 정확히 닷새입니다.”

“어머.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흘렀나요?”

깜짝 놀란 로제타가 조심히 테런의 얼굴을 살폈다.

짐짓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차를 마시고 있었지만, 눈 밑에 어린 수심이 깊어 보였다.

최근 이러저러한 일들이 있다 보니, 아무리 침착한 테런이라도 마음이 많이 상했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아픈 기억을 들추는 것보다, 로제타는 방에서 챙겨 온 것을 테이블 위로 올리는 것을 선택했다.

서재 열쇠였다.

그녀는 그것을 테런의 쪽으로 슬그머니 밀며 말했다.

“여기, 서재 열쇠예요. 선뜻 빌려주신 덕분에 잘 사용했어요. 이제 돌려 드릴게요.”

테런은 그 열쇠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손을 뻗어 조심히 가져갔다.

무엇인가 할 말이 남았다는 듯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로제타 쪽이었다.

“우선 먼저 드릴 말씀이 있어요.”

손안에서 열쇠를 굴리고 있던 테런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시선을 다시 로제타에게로 던졌다.

“무엇입니까? 편하게 말씀하세요.”

로제타는 고맙다는 듯 미소 지으며 한숨을 삼키듯 입술을 다물었다.

그런 뒤 찻물을 한 모금 들이켜고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어제 잠자리에 들어서야 뒤늦게 생각난 게 있었다.

여러 가지 정신없는 일이 겹치고 따로 알아볼 것이 있어서 그동안 새카맣게 잊고 있던 일이었다.

그녀가 얼굴을 굳히자 심각한 일이라는 것을 눈치챈 테런이 더욱 집중했다.

“공작님. 혹시 지난주 하우스 파티를 열었을 때, 리스턴 후작가에서 온 메이드를 기억하세요?”

테런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여겨본 것은 아니었으니 생김새는 물론 잘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다른 귀족들이 데리고 왔던 시종들보다 유독 연배가 높았기에 바로 기억이 났다.

“혹시 리스턴 영애의 수발을 들기 위해 함께 온 중년의 여성을 말하는 겁니까?”

로제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우스 파티 이틀째 밤, 그 여자가 제 방을 훔쳐보고 있었어요.”

“……뭐라고요?”

테런의 미간이 흉할 정도로 구겨졌다.

“그게 정말입니까?”

“네. 조금의 거짓도 없이 사실이에요. 그랬을 뿐만이 아니라 머무르는 내내, 제 행동을 관찰하듯 지켜보았죠. 제 주인이 따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에요.”

거기까지 말을 마친 로제타는 조심스럽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사실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제가 느낀 불쾌감을 토로하기 위해서가 아니에요.”

“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말해 주세요. 리스턴 후작가에 정식으로 항의해야겠습니다.”

테런의 목소리에는 언짢은 기색이 한가득 묻어 있었다.

하지만 로제타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부터 고개를 저었다.

“제 생각에는 항의해도 소용없을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있습니까?”

“그 메이드가 제 방을 훔쳐보는 걸 발견했을 때, 제가 이미 한번 경고했었어요. 이 무례를 후작가에 정식으로 항의하겠다고요. 하지만 그녀는 꿈쩍도 하지 않는 눈치였어요.”

테런은 여전히 미간을 모은 채 팔짱을 꼈다.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표정이었지만, 로제타가 하고 있는 말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빠짐없이 듣고 있었다.

“고용주의 귀에 자신이 잘못한 일이 흘러 들어갈 것이라는 경고에도 그런 것은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구는 태도가 무척이나 마음에 걸리더군요.”

“확실히…… 이상하군요.”

잘못을 저지른 사용인이 당당하게 굴 수 있는 것은 분명 든든한 배후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로제타는 조용히 자신의 의견을 덧붙였다.

“전, 리스턴 후작가에서 공작가를 염탐하려 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을 했어요. 하지만 리스턴 영애나 영식에게선 절 살펴보려는 기색을 느낄 수 없었기에……. 조심스럽지만 리스턴 후작님께서 사주하신 일은 아닐까 의심되어요.”

테런의 눈빛이 사뭇 날카로워졌다.

현 단계에서는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어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자신의 생각도 로제타가 한 것과 같았기에 무심코 고개를 끄덕여 버렸다.

“가능성 있는 이야기입니다. 같은 4가문이긴 하지만, 에스테스는 리스턴 후작가와 그리 사이가 좋은 편이 아니거든요. 문제는 갑자기 왜 이러냐는 것인데…….”

테런이 말꼬리를 흐리며 생각에 잠겼다.

로제타는 언제나 부드럽기 그지없던 눈매를 딱딱하게 굳히고 말을 이었다.

“숨겨진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우선은 공작님께서 알고 계시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어요. 그쪽에서 대체 어떤 저의를 가지고, 무슨 일을 꾸미는 건지는 알지 못하지만 모르고 당하는 것보단 대비를 해 두는 쪽이 여러모로 손해는 없을 것 같아서요.”

“잘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떠나기 전 보안을 강화하는 편이 좋겠네요.”

테런은 리스턴 후작가 쪽의 동태도 동시에 살펴봐야겠노라고 마음을 먹었다.

다른 나라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바람의 힘을 보내는 것처럼 리스턴에 힘을 쓸 수는 없었다.

후작가는 에스테스와 마찬가지로 4가문 중 하나라 불의 가호를 받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로제타는 테런이 무심코 뱉은 그 말에 남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그녀는 목덜미가 조금 뻣뻣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잠시 주저하던 그녀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레나에게서 왕세자 전하를 대신해 떠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 테런이 곧바로 다시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는 조금 경직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바로 말하려고 했는데, 당신이 그날 갑자기 쓰러져서 말할 타이밍을 놓쳤습니다.”

그 뒤는 자신이 곧바로 서재에 틀어박혔기에 마주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로제타가 담담히 고개를 끄덕인 뒤 재차 물음을 던졌다.

“언제 떠나시나요?”

“모레입니다.”

“생각보다 빨라…… 조금 갑작스럽다는 느낌이 드네요.”

테런은 담담하게 대답하고 로제타를 지그시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그래도 전 당신의 얼굴을 보고 갈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 말에, 로제타가 부끄럽다는 듯 시선을 살짝 깔았다.

“어떻게 그런 말씀을 아무렇지 않게 하세요…….”

“아무렇지 않아 보입니까?”

테런이 입술을 씩 끌어 올렸다.

“멋없어 보이겠지만, 이래 봬도 심장이 얼마나 빨리 뛰고 있다고요.”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 또다시 마음이 설레기 시작한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저를 보며 둥글게 휘는 그의 눈웃음에 로제타는 입이 말랐다.

수줍음에 그녀는 눈을 살짝 내리깔고 혀를 날름 내어 마른 것만 같은 아랫입술을 훔쳤다.

같은 마음이긴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고백받은 것은 자신임에도 로제타는 오히려 제가 더 안절부절못하는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느낌이 또 그렇게 싫지만은 않아 문제였다.

로제타는 떨리는 손을 뻗어 찻잔을 들어 올렸다.

마른 입을 한 번 더 찻물로 축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국경 시찰 말인데요. 거부하실 수도 있지 않으셨나요?”

너무 티 나게 말을 돌린 건 아닌가 싶었지만, 다행히도 테런이 별다른 반응 없이 말을 받아 주었다.

그는 크게 숨을 들이켜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거부할 수도 있었죠. 거듭 안 가겠노라고 말씀드렸으면 더 권하지도 못하셨을 겁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 권유를 받아들이신 건가요?”

질문을 건네는 로제타의 얼굴에 의아함이 어려 있었다.

테런이 관자놀이를 살짝 긁다가 이내 답을 내어놓았다.

“폐하께 거래를 하나 청하고자 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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