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12화
“거래요?”
그가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왕세자 전하 대신 국경 시찰을 다녀오면, 폐하께 그 대가로 무엇인가를 요구할 생각입니다. 폐하께서 이미 받아들이셨기에 아마 승인이 날 겁니다.”
도대체 무엇을 요구할 생각이기에 테런이 이토록 큰 수고로움을 감수할 생각인 건지 로제타는 궁금했다.
호기심이 어린 눈빛으로 그녀가 물었다.
“어떤 걸 요구하실 생각인지 여쭤봐도 되나요?”
테런은 물론이라는 말과 함께 시간 끌지 않고 시원하게 대답을 해 주었다.
그는 자신의 세계를 둘러싼 모든 것을, 그게 아무리 작은 일이라고 할지라도 이제는 그녀와 공유하고 싶었다.
“클라리사를 바론 전하와 파혼시키고자 합니다.”
“정말이신가요?”
놀란 토끼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로제타를 향해, 테런은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할아버님들끼리의 약속이라고 한들, 왕세자 전하에게 제 동생이 너무도 아까웠거든요. 클라리사가 자라 결혼하게 된다면 그때는 지금보다 더한 마음고생을 할 것 같았고, 저는 그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로제타는 조심스럽게 물음을 이어 갔다.
“그런데 폐하께서 허락하실까요? 에스테스 공작가가 왕가에 등을 돌리기 위해서라고 곡해하실 수도 있잖아요.”
그 역시 그 부분을 미리 생각해 두었던 건지 망설임 없이 답을 이어 나갔다.
“파혼의 이유로 댈 만한 것은 많지 않겠습니까? 열다섯 살이라는 심각한 나이 차이, 그리고 허약한 클라리사의 건강 등 말입니다. 왕실은 무엇보다도 대를 잇는 것이 중요하니까 말이죠.”
테런의 말대로였다.
핑계는 갖다 붙이기 나름이었다.
하지만 로제타는 우려되는 부분이 하나 더 있었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엔 클라리사의 귀에 들어가지 않는 편이 좋겠네요. 아이가 상처 입을까 봐 걱정이 돼요.”
“아예 귀에 들어가지 않을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니 본격적으로 말이 오가기 전에 클라리사를 불러 천천히 이야기를 해 보아야죠. 하지만 제 동생이라면 분명 파혼하고 싶다고 대답할 겁니다.”
로제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보기에도 클라리사는 테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부터 끄덕일 아이였다.
‘바론이 정붙일 기회조차 안 줬으니까.’
원작에서 클라리사가 파혼을 당하고 슬퍼한 이유는 바론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일방적인 통보에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언제나 어린 클라리사를 무시했고, 자신의 나이가 위라는 이유로 항상 그녀에게 위압적으로 굴었다.
바론이 싫었지만, 약혼이 깨지지 않은 이상 결혼해야 하기에 어린 마음은 언제나 저 혼자 감내하듯 참아 왔다.
하지만 일방적인 파혼 선언을 받고 나자 허탈함과 함께 서러움이 물밀 듯 터져 나왔다.
자신이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가.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무시를 받아야 하는가.
자신은 그렇게 대해도 되는 사람인가.
어리다고 어찌 자신이 무시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겠는가.
그랬기에 클라리사는 비참함을 안고 수도원으로 떠난 것이었다.
원작의 내용을 곱씹어 생각해 본 로제타는 씁쓸함과 바론에 대한 못마땅함을 삼키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사이 테런이 말을 이었다.
“사실 가장 원만한 방법이 하나 더 있긴 합니다. 만약 폐하께서 제게 한 약속을 깨고, 파혼만은 도저히 안 되겠다고 물고 늘어지시게 된다면 그때 사용할 방법이지만요.”
“그게 무엇인가요?”
로제타가 궁금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테런이 양손에 검지를 세우고 적당히 거리를 벌린 뒤 이내 교차하듯 X자를 그려 보이며 말했다.
“클라리사의 약혼자를 바꾸는 겁니다.”
“……네? 그게 무슨.”
테런은 짧게 목을 고른 뒤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클라리사의 의향을 물어보는 게 순서겠습니다만, 만약 그 아이가 괜찮다고 한다면 바론 전하보단 체이스 왕자님이 여러모로 낫지 않겠습니까?”
“아……!”
로제타의 눈이 반짝였다.
하우스 파티 때, 바론을 따라온 체이스의 똘망똘망한 모습이 곧바로 떠올랐다.
클라리사를 바라보며 얼굴을 붉히던 모습을 분명 자신도 눈여겨보았었다.
둘 사이의 기류가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기에 테런의 말이 더욱 솔깃하게 들렸다.
하지만 무엇보다 신중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들뜬 기색을 내보이지 않으려 노력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만약 왕가와 꼭 인연을 맺어야 한다면, 저도 그편이 좋은 것 같아요. 그래도 공작님. 일을 진행하시기 전에 꼭 클라리사의 의향을 물어봐 주세요. 이미 한번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문 간의 약속으로 약혼을 맺었고, 그로 인해 아이가 많이 슬퍼하고 있으니까요.”
“물론입니다.”
그의 든든한 약속을 들으며 로제타는 진심으로 안도하며 다행이라고 중얼거렸다.
“이미 눈치채신 것 같았지만, 전 오래전부터 클라리사와 왕세자 전하의 약혼이 탐탁지 않았어요. 그래서 이 혼사를 무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늘 공작님께 여쭙고 싶었는데……. 이런 말씀을 들으니까 마음이 한결 놓이네요.”
테런은 조용히 기뻐하는 로제타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따라 미소 짓게 되었다.
그러다가 그는 다시 얼굴을 굳히고 낮은 목소리로 운을 뗐다.
“로제타 양.”
그는 자세를 가다듬은 뒤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이제 우리 이야기를 하죠.”
“우리…… 얘기요?”
“그래요.”
자신에게로 쏟아지는 테런의 흔들림 없는 눈빛에, 로제타는 조금 압도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테런은 로제타가 돌려준 열쇠의 끄트머리를 잡고 눈높이까지 천천히 들어 올렸다.
“들려줄 수 있겠습니까? 이걸 빌려 가, 서재에서 랭우드 후작가와 관련된 자료를 찾아본 이유에 대해서 말입니다.”
“아…….”
로제타는 말끝을 살짝 흐렸다.
처음엔 생각이 정리되는 대로 그에게 이야기를 꺼낼 생각이었는데, 어쩐지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차마 그에게, 어쩌면 자신이 랭우드에서 사라진 마지막 아이일지도 모르겠다는 말이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그 무엇으로도 스스로를 증명할 수 없음에 더욱 망설여지는 듯했다.
‘이 세계에는 친자 감별법 같은 것도 없잖아.’
만약 있다고 한들 어떻게 대조할 것인가?
15년 전에 있었던 화재 사고로 랭우드 후작 부처가 한날 죽었다.
그러니 로제타가 누구의 핏줄이다, 하는 것을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현재 아무도 없었다.
로제타는 한숨을 삼켰다.
물론 자신에게 갑자기 나타난 반점이 있다곤 하지만 그것만으론 증거가 되지 못했다.
‘가장 확실한 증명법은 내가 땅의 힘을 각성하고 쓸 줄 아는 것일 텐데…….’
하지만 그녀는 아직 땅의 힘을 쓸 줄 몰랐다.
테런의 서재에서 아무리 자료들을 뒤져 보아도 각성하는 방법이 나와 있는 책 같은 것은 없었다.
얼마 전 토토의 무덤에서 보았던, 흙으로 만든 것 같은 개의 모습이 혹시 땅의 정령인 노아스의 현신인 것은 아닐까 싶었다.
왕궁에서 본 정령신상 중 땅의 노아스가 늑대의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 기억나면서 앞뒤가 맞아 들어가는 기분을 느꼈다.
‘내가 잃어버린 6살 이전의 기억만 찾을 수 있다면……. 그러면 좋을 텐데.’
로제타는 침울한 기분으로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 정말 랭우드의 영양이 맞다면, 테런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양가적인 감정이 그녀를 괴롭혔다.
좋아해도 속상할 것 같고, 믿지 못해도 속상할 것 같았다.
그의 질문에 좀처럼 입을 열지 못하고, 도리어 시간이 갈수록 얼굴빛이 침울해지자 테런은 가볍게 숨을 몰아 내쉬었다.
그는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며 얽어 대는 그녀를 보며 다정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정 말하기 힘들면 하지 않아도 됩니다.”
로제타가 슬그머니 시선을 들어 올렸다.
“정말요……?”
테런이 따뜻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하면, 찾아볼 수도 있는 거니까.”
로제타의 눈동자에 미안한 빛이 어렸다.
엄연히 따지자면, 최근 며칠간 그녀가 캐낸 것은 테런의 과거가 아닌 자신의 과거 쪽이었다.
하지만 어젯밤 레나로부터 그가 자신이 서재에서 나오기 전까지 얼마나 애타게 자신을 기다렸는지에 대해 설명을 들었던 터라 더욱 마음이 쓰였다.
그녀는 적어도 이 부분은 명확히 해야겠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단순히 공작님의 과거가 궁금해서, 혹은 흥미 본위로 알아본 것은 아니라는 점을 꼭 말씀드리고 싶어요. 제가…… 그렇게까지 비겁하고 저열한 성격을 가지지는 않았어요.”
무엇인가 더 말하고 싶은 게 있었지만, 로제타는 현명하게 입술을 다물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의심을 테런에게 밝히기엔 아직 좀 이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만약 내가 랭우드의 자손이 맞다면…… 어떻게 바람의 정령인 실프를 다룰 수 있게 된 거지?’
해소되지 않은 질문은 점점 쌓였고, 그녀가 알아봐야 할 것도 그만큼 늘었다.
로제타는 적어도 하나라도 확실해지면 테런에게 밝히는 게 좋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녀가 한숨을 삼켰다.
그사이 테런이 진중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 뒤 그는 로제타가 절대 부담을 느끼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오늘은 시간 괜찮으십니까?”
“저요?”
테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유가 되면 오후 반나절은 온전히 제게 내어 주실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갑자기 왜…….”
테런이 콧잔등을 살짝 긁어내리며 말했다.
“내일부터는 시찰을 떠나기 전에 막바지 준비로 정신이 없을 것 같습니다.”
“아…….”
벌써부터 드는 진한 아쉬움에 로제타가 자신도 모르게 작은 탄식을 흘렸다.
무심코 찻잔을 들어 올린 테런은 찻물이 식었다는 것을 깨닫고 도로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떠나게 되면 한 달 이상을 보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니 난, 긱스가 뭐라고 하는 오늘만은 당신과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로제타의 볼이 붉어졌다.
“공작님께 이렇게 저돌적인 면이 있으셨는지는 미처 몰랐네요.”
“부담스러우면 조심하겠습니다.”
로제타가 입술을 동시에 살짝 안으로 말아 넣고 금세 풀었다.
“예상 밖일 뿐이지, 싫다곤 안 했어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에 테런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럼 준비하고 다시 만날까요?”
로제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사랑스럽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테런이 한마디를 더했다.
“당신이라면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지만, 그래도 금세 다시 얼굴을 보여 줘요.”
기다리는 시간 동안 그녀를 볼 수 없음이 무척이나 아쉽다는 듯한 목소리였다.
퍽 진지한 그의 표정을 잠시 눈에 담은 로제타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고백 비슷한 것을 받은 그날 이후, 테런에게서 어딘가 벽이 하나 소리 소문도 없이 허물어져 없어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그의 모습이 기꺼웠다.
자신에게 테런이라는 존재가 그러하듯, 그에게도 저가 점점 더 많이 스며드는 것만 같아서 마음이 기쁨으로 물들었다.
외출하기로 결정한 뒤 두 사람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런이 먼저 문가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그런 뒤 로제타가 자신의 앞을 지나갈 때 고개를 살짝 숙여 속삭이듯 말했다.
“그리고 다녀오면 그걸 정리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나가려던 로제타가 걸음을 멈추고 테런의 쪽을 돌아보았다.
감을 잡지 못하겠다는 듯 살짝 고개를 기울이기도 했다.
“‘그것’이라고 하시면……?”
“계약서 말입니다.”
테런이 로제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답했다.
“전 로제타 양의 의중을 따르고 싶습니다. 어떤 결정이든 존중하니, 주저하지 말고 생각하는 대로 말해 주세요.”
로제타는 조금 망연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수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