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14화
노파의 말에 로제타가 슬그머니 손을 올렸다.
테런이 살짝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자, 손으로 가리고 있는 입술의 끝이 살짝 위로 올라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실례라는 생각에 차마 대놓고 웃진 못하고 있었지만, 꼭 다문 그녀의 입술에서 금방이라도 맑은 웃음소리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용하지는 않나 보구나.’
로제타는 입술을 한 번 더 안으로 말며 생각했다.
그녀는 점술사가 정말 점사를 본 것이 아니라, 자신과 테런의 옷차림을 보고 신분을 짐작해 적당히 둘러 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의 실제 신분이 남작 영애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한 의심은 아직까진 오로지 자신 혼자만 품은 터였다.
랭우드 후작가의 대가 끊겼다는 사실은 이미 15년 전에 공표됐을 터.
그렇다면 윌셔스 왕국에서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집단은 야만인이라 불리는 파스트라인뿐이라는 것을 이 점술사라고 모를 리가 없었다.
그래서 로제타는 저더러 고귀하다는 점술사의 말이 아부라고 생각했다.
그러는 사이 노파는 눈을 가늘게 뜨고 더듬더듬, 느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머지않아 큰일을 해내시겠습니다.”
“내가?”
“예. 그리고 누구보다도 존귀해지실 테지요.”
로제타가 또 한 번 입술을 말아 물며 웃음을 참아 냈다.
이번엔 꽤 아슬아슬했다.
다행히 테런이 점술사의 말을 중간에 끊었다.
“듣기 나쁜 소리는 아니군.”
테런은 안주머니에서 은화를 한 개 꺼내서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점사를 봐 준 값으로 치르기에는 상당히 많은 액수에 노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돈을 보는 순간 집중력이 깨어진 탓인지, 수정 구슬 안에서 어지러이 서로 얽히던 실 같은 빛줄기는 한순간에 사라져 더는 보이지 않았다.
“덕담을 들은 값이니 챙기게.”
“가, 감사합니다. 나리.”
점술사는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테런과 로제타를 향해 인사했다.
“그럼 이만 갈까요?”
“네, 재미있었어요.”
로제타가 고개를 끄덕이자, 테런이 다시 안내를 시작했다.
그때였다.
“아가씨.”
점술사가 조용히 입을 열어 뒤돌아서려는 로제타를 붙잡아 세웠다.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춘 뒤, 그녀가 다시 노파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로브를 쓰고 있어 눈 밑까지 드리워진 그늘에 잠긴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몸조심하십시오.”
웃음기 하나 엿볼 수 없는 딱딱한 목소리였다.
그 순간, 로제타는 왠지 모를 긴장감을 느꼈지만, 그 감정이 그녀에게 머무른 것은 아주 찰나에 불과했다.
왜 제게 저런 말을 하는 것인가, 진지하게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금세 어딘가로 휘발되어 사라졌기에, 로제타는 그 경고를 가볍게 들어 넘겼다.
그래서 노파를 향해 둥글게 눈을 휘어 보이며 저 역시 대답해 주었다.
“고맙네. 자네도 사는 동안 건강하길 바라겠네.”
그 뒤 더 이상 아무런 흥미도, 미련도 없다는 듯 테런의 손을 잡고 뒤돌아섰다.
어쩌면 어서 피크닉 바구니를 가지고 테런과 함께 나룻배를 탈 생각으로 조금 들뜬 것도 이유에 포함될지 몰랐다.
* * *
유명인이니만큼, 테런은 얼굴만으로도 일종의 프리 패스를 할 수 있는 남자였다.
카페엔 사람이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두 사람보다 먼저 주문한 사람들이 있었다.
자신들의 몫을 받기까지는 조금 기다려야 되나 싶었는데, 그를 알아본 카페 주인이 가장 먼저 피크닉 박스를 내어 주었다.
테런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했지만, 카페 주인은 거듭 공손히 피크닉 박스를 바쳤다.
계속 거절하여 그의 시간을 뺏으면 기주문자들이 물건을 받는 속도가 늦어질 것 같았다.
결국 테런은 이번만 먼저 받겠으니, 다음에는 이러지 말라는 당부의 말을 남긴 채 바구니를 받아 들었다.
“제가 들까요?”
“안 될 말씀입니다.”
테런은 로제타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하다 못해, 행여 그녀가 제게서 뺏어 들지도 모른다는 것처럼 바구니를 든 손을 멀찍이 떨어트렸다.
“어머. 자상하시기까지……!”
“클리프 영애라고 했나요? 공작님의 약혼자 되시는 분은 참 좋겠어요.”
“부럽네요, 솔직히 말이에요.”
그런 그의 모습을 본 근처에 있던 귀족 여성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보탰다.
스치듯 그들의 목소리를 들은 로제타는 왠지 모르게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럼 갈까요?”
“그래요.”
테런은 빈손으로 로제타를 꼭 잡은 채 그녀의 보폭에 맞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나룻배를 탈 수 있는 선착장은 생 각보다 카페에서 가까웠다.
테런은 배를 묶어 놓은 밧줄을 정 리하고 있던 관리인에게 말을 걸었다.
“배를 탈 수 있겠는가?”
“어이구, 공작님.”
그러자 관리인이 테런을 알아보고는 쓰고 있던 모자를 냉큼 벗고 인사를 올렸다.
“며칠 전 내린 비로 강물이 조금 불기는 했습니다만, 유속이 빠르지는 않아 괜찮으실 것 같습니다.”
테런의 미간이 좁아졌다.
강물이 불었다는 말에 타지 않으려고 했지만 로제타가 고집을 부렸다.
“전문가가 탈 수 있다고 하고, 또 유속이 빠르지 않다고 하니 타고 싶어요.”
백 보 양보해서 타협을 보았는데, 로제타가 직접 노를 젓는 게 아니라 전문 뱃사공이 동승하는 것이었다.
조금 아쉬웠지만, 로제타는 기분 전환을 하고 싶었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테런의 타협안을 받아들였다.
“또 이렇게 배를 태워 드릴 수 없게 되었군요.”
로제타가 농담 섞인 한마디를 하자 테런이 짐짓 얼굴을 굳히며 진지하게 받아쳤다.
“안전이 무엇보다도 제일 중요합니다.”
“그럼 아쉽지만 또 다음 기회를 기약해요.”
테런이 먼저 배로 내려갔고, 그녀에게 팔을 뻗었다.
그의 손을 지지대 삼아 조심스럽게 내려오자, 무게를 더한 배가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크게 위협적인 수준은 아니었다.
두 사람이 모두 자리에 착석하고 난 뒤 사공은 배를 묶어 둔 밧줄을 풀었다.
그가 크게 노를 한 번 저으니 배 머리가 부드럽게 물살을 가르며 시원할 정도로 멀리 흘러갔다.
“좋네요.”
비록 비가 온 뒤라 강물은 조금 탁했지만, 바람이 제법 좋아 로제타는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를 불렀다.
그녀가 구경하는 사이, 테런은 카페에서 받아 온 식탁보 같은 천을 살짝 깔고 그 위로 바구니에서 음식을 꺼내기 시작했다.
로제타는 테런과 함께 쿠키를 먹고 도수 낮은 와인도 한 잔씩 나누었다.
그렇게 강 한 바퀴를 크게 돌고 다시 선착장 가까이로 돌아왔을 때였다.
“잠깐만 기다……!”
너울거리는 곳에서 계속 술을 마시고 음식을 먹은 탓인지 속이 살짝 울렁거렸다.
그래서 뱃사공의 말이 끝나지도 않았음에도 로제타는 땅이 보이자 마음이 급해져 앉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험합니다, 아가씨!”
뱃사공의 목소리가 한 박자 늦게 로제타에게 닿았다.
그와 동시에 수면이 크게 넘실거리더니 그들이 탄 배가 갑자기 위로 들렸다.
그 바람에 전혀 예상치 못한 속도가 더해졌다.
배는 마치 뒤에서부터 떠밀리듯 생각한 것보다 빠르게 선착장 쪽으로 밀려갔고, 이내 뱃머리가 콩, 선착장에 닿았다.
그 충격에 나룻배는 다시 뒤로 조금 밀려났고, 로제타의 몸은 금방이라도 고꾸라질 것처럼 앞으로 쏠렸다.
“꺄악!”
그녀의 몸이 크게 휘청였다.
테런이 서둘러 일어나 로제타를 뒤에서부터 끌어안듯 잡았지만, 이미 앞으로 쏠리기 시작한 상체를 일으켜 세울 수는 없었다.
“괜찮습니까?”
로제타의 허리가 90도로 꺾였다. 그 순간 로제타의 긴 머리카락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그리고 그녀의 흰 목이 일시적으로 드러났다.
테런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떴다.
얼핏 그의 눈에 어떤 모양을 갖춘 검붉은 자국이 스친 것만 같았다.
그래서 그것을 더 눈여겨보려고 했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도,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로제타가 곧바로 제 목덜미를 손으로 덮어 가리며 당황한 얼굴로 상체를 일으켜 세웠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혹시나 테런이 자신의 목덜미에 있는 반점을 봤을까 봐 노심초사하는 눈치였다.
그사이 사공이 능숙한 솜씨로 배를 조정해 뱃머리를 다시 선착장에 가져다 대었다.
그런 뒤 테런과 로제타를 비끼듯 지나 자신이 먼저 나무 데크 위로 뛰듯이 올라갔고, 툭 튀어나온 굵은 나무못에 배와 선착장을 잇는 밧줄을 칭칭 동여매기 시작했다.
배는 여전히 수면의 움직임을 따라 넘실거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한결 위태로움이 가라앉고 안정적이었다.
그제야 테런은 나지막이 숨을 몰아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땅을 밟기 전까지는 조심하세요. 물 위라 위험합니다.”
“……네, 그렇게 할게요. 죄송해요.”
“잠깐만 앉아 있어요.”
테런은 로제타를 다시 자리에 앉힌 뒤 자신이 먼저 데크로 올라섰다.
“자, 이제 내 손을 잡고 올라오십시오.”
그런 뒤 곧장 로제타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녀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의 손을 잡자, 단단하게 감싸 쥐었다.
테런은 안정감 있게 그녀의 몸을 끌어당기듯 뭍으로 올렸다.
단단한 갑판을 딛고 서자, 그제야 로제타가 한시름 덜었다는 표정으로 길게 숨을 몰아 내쉬었다.
“한결 속이 편안하네요.”
테런을 향해 미소 지어 보인 뒤, 로제타는 먼저 앞을 향해 나아갔다.
깊은 빛으로 가라앉은 테런의 눈동자가 그런 그녀의 뒤를 좇았다.
이미 머리카락으로 가리어진 그녀의 하얀 목덜미를 헤집고 싶다는 듯 집요한 눈빛이었다.
그렇게 테런의 피콕블루색 눈동자는 복잡함이 어지럽게 뒤섞여 어둑하게 빛났다.
* * *
한스는 잔뜩 움츠린 어깨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의 눈 밑은 마치 검은 물감을 덕지덕지 발라 놓은 것만 같이 어둡고 퀭했다.
사위가 어둑해 자세히 분간하기는 어려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온 곳이 대저택이라는 것은 알아 볼 수 있었다.
“여, 여기는……!”
“조용히 해.”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며 놀라던 한스는 앞에서 들려오는 신경질적인 경고에 도로 입술을 합, 다물었다.
한스는 두려운 눈으로 앞을 바라봤다.
어두운색의 로브를 입고 있는 남자가 다시 등을 보이며, 자신을 기다려 주지도 않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는 게 보였다.
‘도대체 나를 어떻게 찾아낸 거지……?’
한스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