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15화
눈앞의 남자는 몇 차례 만난 적이 있는 이였다.
늘 로브를 둘러쓰고 나타났던 남자.
그는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어도, 한스는 그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얼굴을 가리고 있어 단 한 번도 생김새는 확인할 수 없었지만, 남자가 귀족 신분이라는 것을 짐작하는 것에 그리 큰 어려움은 없었다.
남자와 거래를 하기로 결정했어도 만날 때면 항상 주인 일가인 에스테스 공작 남매의 정보를 팔아넘기는 것이 양심에 걸렸다.
대면하기 직전까지만. 남자가 내미는 돈을 보는 순간 거짓말처럼 그런 감정이 싹 사라졌다.
자신이 남자에게 제공하는 정보는 매우 소소한 일상 이야기였기에 종국에는 ‘뭐 어때? 괜찮겠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팔아넘기는 정보가 중하지 않은 데 비해 부수적으로 얻는 수입이 짭짤하다 못해 넘칠 정도였다.
그랬기에 한스는 남자와의 만남을 쉽게 끊지 못했었다.
에스테스 파크의 한 주점에서 마지막으로 만난 이후, 다시는 저를 찾아오지 않았기에 반년은 족히 훌쩍 넘기고 재회한 것이었다.
다만 가끔 남자의 존재가 생각이 나기는 했다. 주로 돈이 아쉬울 때였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로브를 쓴 남자가 주고 간 금액은 일을 하지 않더라도 십 년은 족히 먹고 살 만큼의 거액이었으나 한 달 만에 모두 잃게 되었다.
도박 때문이었다.
노름은 한 번 발을 들이면 두 번 다시는 끊기 힘들 정도로 강한 중독성을 가진 놀이였다.
마지막, 마지막으로 한 판만 더……!
그렇게 야금야금 횟수를 늘려서 도박을 하던 한스는 수중에 남았던 푼돈마저 모조리 날려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빚까지 지고 나니 생활은 더욱 궁핍했고, 자신이 일하고 있는 에스테스 공작가의 집사인 와튼에게 또다시 가불을 요청했지만 승인할 수 없다는 암담한 소식만 들었다.
도리어 와튼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한스를 살피며 최근 들어 왜 이렇게 가불을 많이 신청하는 것이냐고 질문을 던졌다.
그 물음에 행여 행실에 문제가 있다고 이 일자리마저 잃을까 봐 두려웠던 한스는 대답을 대충 얼버무린 채 집사의 방에서 나섰다.
「어디서 돈 좀 안 떨어지려나.」
한스는 초조한 마음으로 집 근처 주점에서 싸구려 맥주를 한잔 기울이며 무거운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런데 그때, 한스의 앞에 정말 거짓말처럼 로브를 쓴 남자가 다시 나타났다.
「여어, 한스. 잘 지냈나?」
그는 어제 만난 친구처럼 한스의 앞에 앉았다.
너무 놀란 한스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입까지 벌린 채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는 한스의 사정 따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여유로웠고, 여전히 능글맞은 말투였다.
「용케 수도에 자리를 잡았군? 다시 영지로 내려갈 줄 알았는데 말이야.」
「운 좋게…… 이쪽에서도 마구간 보조 자리가 나서, 수도에서 계속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마구간 보조는 기술직으로, 주인 일가가 타는 마차의 수리와 점검을 도맡는 일을 했다.
클라리사가 에스테스 파크로 내려올 때와 떠날 때, 그가 직접 마차를 몰 수 있었던 것도 장기간의 이동 때 마차를 꼼꼼하게 점검하는 일이 필수라서 그런 것이었다.
그런데 그가 상경했을 즈음 때마침 에스테스 하우스의 마구간지기가 일을 그만두었다.
적임자를 구하고 있던 때에 나타난 한스의 존재는 제법 믿음직스러웠다.
집사인 와튼과 에스테스 하우스의 마구간지기는 영지에서 제법 오래 톰의 보조로 일을 한 그의 경력을 높이 사, 곧바로 공석인 마구간지기 보조의 자리에 한스를 채용했다.
「그런데 요새도 도박은 못 끊었나 봐?」
「그, 그런데 제가 여기에 있는 건 어떻게 알고…….」
「그야 뭐 뻔한 거지.」
남자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가 꺼낸 것은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이는 금화였다.
남자는 엄지와 검지로 잡은 금화를 테이블 위에 톡, 톡 두드리며 말꼬리를 늘였다.
「어때? 다시 손잡아 보지 않을 텐가?」
그 느릿한 말투에 한스는 왠지 안달이 나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남자가 든 금화를 빤히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 슬금슬금 그쪽으로 손을 뻗고 있었다.
한스는 반쯤 넋이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물었다.
「지난번처럼…… 공작님과 공녀님의 동향을 살펴 알려 드리면 되겠습니까?」
「으음, 으음. 그건 아니지.」
남자는 한스가 뻗은 손을 피하듯 금화를 든 손을 뒤로 물리고는 조금 과장되게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럼 무엇을 시키실 생각이신지……?」
「이 길로 나랑 어딜 좀 같이 가 줘야겠어.」
「어, 어디를 말씀입니까?」
「그거야 같이 가 보면 알 테고. 어쩌겠나? 같이 가겠나?」
한스는 망설였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동행을 요구하는 남자의 말이 퍽 부담스럽게 느껴진 까닭이다.
한스가 도통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자, 남자는 마치 짜증이라도 난 듯 혀를 차며 한마디를 보탰다.
「나를 따라 일어서는 순간 손을 잡은 것으로 간주하고 이것을 주지.」
남자의 금화가 다시 한번 빛을 뽐냈다.
「혹시 아나? 같이 간 곳에서 훨씬 더 후한 보수를 받을 수 있을지 말이야.」
빈말로라도 그간 남자가 준 보수는 적은 돈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대가를 줄 수도 있다니!
그 말에 한스는 혹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주머니를 털어 봤자 먼지밖에 나오지 않는 빈털터리인 제게서 돈이 나올 구멍은 요원했다.
한스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비웃듯 피식 바람을 흘리고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낡은 의자 다리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는 한스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그는 곧바로 남자를 따라 일어섰고, 그렇게 주점을 나와 함께 허름한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이동하는 내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자신이 탄 이 허름한 마차가 4가문만 사용할 수 있는 도로를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철문 앞에서 내린 뒤에도 한스의 두리번거림은 계속되었다.
“대, 대체 왜 여기에 온 겁니까?”
남자에게 물음을 건네는 한스의 목소리가 사뭇 떨리고 있었다.
에스테스 공작가의 마부이기에, 자신이 어디에 도착했는지 필연적으로 알 수밖에 없었다.
“자네에게 질문을 허락한 적 없네.”
하지만 한스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불친절하고 차가운 것이었다.
한스는 말을 잇는 대신 그나마 현명하게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일에 발을 담근 것인지 실감이 났다.
이제 와 못하겠다고, 다시 돌아가겠다고 한다면 분명 제 목숨이 온당치 못하리라.
한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어디에나 똑같은 밤이 찾아오지만, 이곳은 에스테스 하우스와는 너무도 달랐다.
두려움이 앞서 좀처럼 발을 떼지 못하고 있자 벌써 저만치 앞서 걷고 있던 패트릭이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그를 타박하며 재촉했다.
“한스. 뭘 하고 있나? 빨리 오지 않고.”
그제야 한스가 무거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남자는 무척이나 익숙한 걸음으로 대저택의 뒤편으로 향했다.
이슥한 밤 시간대였으나, 잠가 두지 않고 미리 열어 둔 모양인지 남자가 가볍게 문을 열자 아무런 제지 없이 열렸다.
그렇게 한스는 자라처럼 잔뜩 목을 움츠리고 남자의 뒤를 따랐다.
조용한 저택에 압도된 듯 자신 역시 최대한 숨소리조차 내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하는 것은 덤이었다.
그렇게 남자를 따라 들어선 곳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어둠이 가득 찬 실내였다.
이 공간이 넓은지, 혹은 좁은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럼 여기서 기다리고 있게.”
이 어둠 속에서 용케 한스가 자리에 앉은 걸 확인한 남자가 말했다.
그는 곧 어딘가로 향했다.
“어, 어디 가십니까? 저만 혼자 여기 있으라고요?”
그러자 한스가 다급한 목소리로 남자, 패트릭을 붙잡아 세웠다.
그러자 또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돌아왔다.
들으라는 듯 거칠게 한숨을 몰아 내쉰 패트릭이 입을 열었다.
“하아. 한스. 계속 그렇게 얼빠지게 굴다간 아무것도 얻지 못할 걸세.”
패트릭의 경고에 한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제 할 말을 마친 패트릭은 곧바로 자리를 떴다.
“대단하시네…….”
홀로 남은 한스가 중얼거렸다.
이 어둠 속에서 어디 단 한 군데도 부딪치지 않고 곧바로 이곳을 나서는 그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그는 재차 한숨을 삼켰다.
보통 어두운 곳에 있다 할지라도 시간이 좀 흐르면 실루엣이라도 보이기 마련인데, 희한하게도 이곳에서는 전혀 그럴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을까.
치직. 팟-!
마치 부싯돌을 부딪치는 듯한 짧은 소리가 나더니 예고도 없이 순식간에 주위가 밝아졌다.
“으윽. 뭐, 뭐지? 갑자기?”
갑자기 쏟아지는 빛에 한스가 크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데도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아 결국 그는 양팔을 들어 올려 눈앞을 가리기까지 했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한스의 귓가에 꽂히듯 날아들었다.
“자네가 한스로군.”
한스의 목덜미가 뻣뻣해졌다.
동시에 등골이 서늘해지며 머리털이 쭈뼛 서는 기분을 느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더티 블론드의 머리 색을 가진 중년의 남성이 제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었고, 자신이 뒤늦게 들어온 것일지도 몰랐다.
“후, 후작 각하……!”
한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더니 앉아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런 뒤 마커스를 향해 90도로 허리를 굽혔다.
그 인사에 마커스가 피식 웃으며 오른손에 쥔 붉은색 펜던트를 굴렸다.
긴 체인이 서로 얽히면서 차랑거리는 소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한스. 내 아들이 이곳을 나가기 전에 자네에게 한 경고를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것이야.”
한스가 마른침을 삼켰다.
마커스가 방금 한 말에서 그가 이미 이 방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고, 자신이 뒤늦게 도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뱀의 입 안으로 스스로 들어간 꼴이었다.
“며, 명심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묻지. 자네, 돈이 얼마나 필요한가?”
마커스가 한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정도로 한스는 어리숙하지 않았다.
돈을 얼마큼 쥐여 줘야 순순히 시키는 일을 하겠냐는 그런 뜻이었다.
한스는 잠시 눈을 굴렸다.
그러다 갑자기 어디서 배짱이 솟아난 것인지 생각보다 당돌하게 대답했다.
“많, 많이 주실수록 좋습니다. 도박 빚을 갚고……. 이후 에스테스 공작가의 일을 그만둔 뒤로도 평생 먹고 살 수 있을 정도로요.”
“하.”
가만히 한스의 말을 들어 주던 마커스는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자신을 상대로 담이 크게도 거래를 하는 한스의 행동이 조금 어이없게 느껴졌다.
“내가 무엇을 시킬 줄 알고?”
“후작 각하처럼 높으신 분께서 처, 천한 저를 직접 만나실 정도니…… 그만큼 중한 일이라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저 역시 위험 부담을 안으니, 그 정도는…… 요구하고 싶습니다.”
마커스가 빈정거리듯 다음 말을 이었다.
“젊은 에스테스 공작이 아랫사람들에게 인망이 두텁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군. 이렇게 수년을 몸 바쳐 일한 마부가 단숨에 변심한 것을 보면 말이야.”
조롱에 가까운 말에, 한스가 아랫입술을 세게 한번 깨물고는 눈알이 튀어나올 듯 굴렸다.
“이…… 리스턴 후작가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이미 제겐 선택지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