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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애 옆에 예쁜 애-116화 (116/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16화

한스는 비장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후작 각하의 명을 따르지 않는다면, 저는 필시 살아서 두 발로 이곳을 나갈 수 없을 테죠. 그러니…… 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호오.”

느른하게 의자에 기대어 있던 마커스가 눈을 빛내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한스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사뭇 다른 빛을 띠기 시작했다.

“노름에 미쳐 있다고 하길래, 겁 많고 아둔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생각보다 머리가 돌아가는 친구였군?”

“……과한 칭찬이십니다.”

주름진 마커스의 눈에 웃음기가 어렸다.

만약 한스가 되먹지도 못한 충심 어쩌고 하면서 제 제안을 거부한다면, 권력으로 짓누르고 한스와 그의 홀아버지의 생명을 위협 삼아 겁박이라도 할 계획이었는데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리게 되어 기꺼웠다.

마커스는 다시 상체를 뒤로 물리며 느른하게 등받이에 기대었다.

입가엔 벌써 제 계획이 성공했다는 양 흡족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말이 통하니 빠르게 이야기를 진행시켜 보지. 돈은 섭섭하지 않을 정도로 챙겨 줄 테니까 말이야.”

4가문의 수장 중 한 명이 직접 이리 말할 정도였으니, 분명 거액을 보상으로 받을 수 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한스는 한결 공손한 태도로 고개를 조아렸다.

그는 두 손을 포개듯 모으고는 아주 신중하고 진지한 태도로 귀를 기울이며 마커스의 입술을 주시했다.

잠시간의 기다림 끝에, 이윽고 마커스의 입술이 열렸다.

“에스테스 공작의 약혼녀.”

“……예? 로제타 아가씨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 붉은 머리 계집을 쥐도 새도 모르게 납치해 내게로 데려오게.”

마른침을 삼켜 내는 한스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사뭇 차가웠다.

이치가 상당히 덜떨어져 보이니 온전히 일을 맡기진 못할 것 같았다.

‘아무래도 따로 대비는 좀 더 해 두어야 되겠군.’

마커스의 입술이 위험한 미소를 그렸다.

* * *

책상 위를 깔끔하게 정리한 긱스가 의자를 뒤로 밀며 자리에서 일어났

그 소리에 서류를 살펴보는 것에 집중하고 있던 테런도 잠시 깃펜을 놓고 고개를 위로 들었다.

눈이 마주치기를 기다렸다는 듯 긱스가 환한 얼굴로 고개를 까닥 숙였다.

“그럼 전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래. 고생했네, 긱스.”

“저는 내일 오전 6시 정각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러지 말고 그냥 집결지로 바로 와도 된다니까.”

테런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내일은 국경 시찰을 출발하는 날이었다.

긱스는 테런의 수석 보좌관이니만큼 그와 동행을 하게 되었다.

한 달간 레나와 떨어져 있어야 하니, 조금이라도 더 아내와 시간을 보내라는 뜻에서 전달한 말이었으나 긱스는 요지부동이었다.

보좌관은 짐짓 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안 될 말씀입니다. 우기제가 어떤 행사입니까? 모처럼 에스테스 공작가의 위엄을 왕국민들에게 선보이는 자리인데, 그렇게 어중이떠중이 모이듯 집결지로 모이면 그게 모양새가 나겠습니까?”

“하여간에 자네는……. 알았네. 내일 보세, 그러면.”

긱스의 고집에 테런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긱스가 모자와 재킷을 챙겨 들고 먼저 집무실을 나섰다.

모처럼 혼자 남은 테런은 잠시 책상 위에 올려 두었던 깃펜을 다시 쥐고 서류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그 역시 잠이 부족하긴 매한가지였으나, 수도에서만 처리할 수 있는 업무가 있었다.

자는 시간을 아껴서라도 떠나기 직전까지 되는 대로 많이 해 두는 편이 나으리란 생각이 들어서 조금 더 서류를 붙잡고 있는 터였다.

그렇게 한동안 넓은 집무실에는 테런이 쥔 펜촉이 사각거리며 종이를 긁는 소리만 가득했다.

그렇게 얼마나 일했을까.

도무지 줄어들 것 같지 않았던 서류에 드디어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마지막 장에 서명을 마친 그가 탁 소리가 나게 깃펜을 내려놓았다.

“드디어 끝났군.”

지긋지긋하다는 듯 말하는 목소리에는 상당한 피로가 어려 있었다.

그가 뻑뻑한 눈을 돌려 시각을 확인했다.

시곗바늘은 어느덧 새벽 두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벌써 이렇게 되다니.”

테런이 팔을 쭉 뻗으며 찌뿌듯한 몸을 곧게 펴며 기지개를 켰다.

그러다 책상 한쪽 구석에 반으로 쭉 갈라 찢은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나룻배를 타고 온 날, 저택으로 돌아와 로제타와 합의하에 찢은 것이었다.

두 사람의 결혼이 더 이상 계약 결혼이 아니라는 증표.

그것은 마치 로제타와 제가 한마음으로 미래를 약속했다는 뜻인 것만 같았다.

찢긴 계약서를 내려다보는 테런의 눈빛이 왠지 모르게 흐뭇했다.

키이이이이-

그때, 창밖에서 피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 녀석이 또 나왔군.”

테런은 파기한 로제타와의 계약서를 또다시 한쪽으로 밀어 놓고는 골치 아프다는 듯 눈썹 근처를 문질렀다.

정원사에게 혼나는 것은 또 제 몫이겠구나 싶어, 머리가 살짝 아팠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재차 한숨을 내쉬었다.

집무실의 불을 끄고 나온 뒤 그대로 제 방으로 가려던 테런의 걸음이 멈칫했다.

당장 급한 시찰 건을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잠시 머릿속에서 미뤄 두었던 ‘어떤 문제’가 떠오른 탓이었다.

잠깐의 망설임 끝에 테런의 발걸음이 이내 아래로 내려갈 수 있는 중앙 계단 쪽으로 향했다.

피르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봐야 할 듯싶었다.

* * *

1층으로 나온 테런은 묵직한 숨을 속에서부터 밀어내듯 내쉬었다.

그러자 그의 마음에 내내 가시처럼 걸려 있던 것이 아주 조금 홀가분해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정원 한복판에, 오랜만에 본모습으로 나들이를 나온 피르의 모습이 보였다.

테런은 삐딱하게 서, 양쪽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찌르듯이 하고 섰다.

그의 차림은 상당히 편안해 보였다.

팔뚝은 걷어붙인 상태였고, 타이는 이미 풀었다.

굵은 울대와 목의 빗근이 바람에 따라 살짝씩 흔들리는 셔츠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가 감추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피르.”

테런의 부름에 정원수 꼭대기의 잎을 떼어 먹고 있던 피르가 천천히 방향을 틀어 그를 바라보듯이 섰다.

사실 테런은 피르가 원래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를 더 선호했다.

작게 모습을 줄였을 때는 소통이 잘되지 않는 편이기 때문이었다.

테런은 모처럼 마주하는 피르의 본체를 보며 편안하게 말을 걸었다.

“아버지는 어디에 계시지?”

-포프에.

모든 바람을 관장하는 정령답게, 피르에게선 곧바로 대답이 나왔다.

“그새 멀리도 가셨군.”

테런이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포프에 지방은 시찰단이 가장 먼저 들를 지역과 매우 가까운 곳이었다.

“잘하면 오랜만에 뵐 수도 있겠어.”

테런이 중얼거리는 사이 피르는 다시 관심이 사라졌다는 듯 정원수를 뜯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살짝 찌푸린 눈으로 바라보던 테런이 재차 자신의 정령을 불렀다.

“피르.”

-한 번에 말하라, 계약자여.

대답하는 목소리에 살짝 짜증이 어려 있었다.

유리구슬처럼 푸르고 투명한 피르의 눈동자가 다시 테런에게로 향했다.

“물어볼 게 있어. 이게 본론이야.”

-무엇인가.

잠시 주저하던 그가 이내 큰마음을 먹었다는 듯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노아스는 어디에 있나?”

-…….

피르는 대답하지 않았고 그저 멀거니 테런을 바라보기만 했다.

“어째서 대답하지 않지?”

-갑자기 왜 그런 것을 묻지?

그러자 이번엔 테런이 입술을 다물었다.

사실 갑자기는 아니었다.

이틀 동안 피르를 부를까, 말까 무척이나 많이 고민했었다.

테런은 며칠 전 강가에서 보았던 로제타의 목 뒤에 있던 붉은 반점을 떠올렸다.

자신이 잘못 본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초승달 모양인 것만 같았지.’

그리고…… 테런은 그 문양을 이미 본 적이 있었다. 바로 선대 랭우드 후작의 손등에서.

하지만 확신에 찬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확실하게 초승달 모양을 본 것인지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아주 찰나에 얼핏 스치듯 보았을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무의식중에 그 모양으로 보고 싶어서 그렇게 본 것일 수도 있지 않나.

가장 확실한 것은 다시 확인하는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억지로 로제타의 머리카락을 걷고 강제적으로 확인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심지어 그날 그녀의 반응으로 미루어 보아 반점을 내보이고 싶어 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래서 테런의 답답함은 더욱 커져 갔다.

게다가 로제타의 반점이 최근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것일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이 뒤늦게 떠올랐다.

테런은 여러모로 혼란스러웠지만 로제타에게 내색하지 않았다.

그리고 만약 그녀가 ‘로제’가 맞다면 왜 자신을 아는 척하지 않겠는가.

테런은 복잡한 마음을 덜어 내려는 듯 크게 숨을 내쉬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나는 로제타 양에게 약속을 했어.’

아픈 과거를 묻고, 그녀에게로 가겠다고.

그것은 마치 주문 같아서, 테런에게 어떠한 강박 같은 걸 심어 주었다.

그리고 그가 의심을 품는 일에 대해서 발목을 잡고 막고 있었다.

테런은 술렁이는 마음을 애써 외면한 채, 억지로 로제타의 반점과 로제의 연결 고리를 끊어서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마음이라는 것은 생각만큼 그리 쉽게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천방지축 아이처럼,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고 뛰어다니며 테런의 마음을 술렁이게 했다.

그는 아버지인 제임스의 부재가 무척이나 아쉽게 느껴졌다.

적어도 저보다는 랭우드 후작가에 대해서 더 많이 알고 있으리란 생각에서였다.

그래서 피르에게 가장 먼저 물었던 것이 제 아버지가 지금 어디쯤에 계시는지에 대한 것이다.

피르는 테런에게 질문의 의도를 물었으나, 그는 답하지 않았다.

도무지 다시 열릴 생각을 하지 않는 그의 입술을 가만히 바라보던 피르가 결국 먼저 말을 걸었다.

-계약자여. 나는 네게 아무런 대답도 돌려줄 수가 없다.

그 순간, 조금 뿔이 난 것 같은 테런의 눈동자가 피르에게로 향했다.

“어째서?”

-우리, 네 정령은 서로의 힘에 간섭하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의 규칙이며, 상생의 방도다. 너 역시 그것을 알고 있을 텐데.

“그래. 알지. 잘, 알고 있지.”

테런이 헛숨을 들이켠 상태로 작게 중얼거렸다.

피르에게서 순순히 대답을 들을 수 있을 리 없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다.

정령과 계약을 했다고 해서, 일반인들의 생각만큼 4가문의 수장들이 모두 전지전능한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계약자인 인간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바람을 들어주는 데에만 능력을 발휘했다.

행여 인간이 자신들에 대해서 캐물으면 곧장 그 자리를 뜨거나 입을 꾹 다물어 버리곤 했다.

그 보수성은 특히나 피르와 엘라임이 가장 심했다.

하여 테런은 피르에게 답을 들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질문을 던졌다.

피르의 대답을 예상은 했지만 허탈한 기분은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테런은 포기하지 않고 재차 물음을 건넸다.

“그래도 이것만은 알려 주길 바라.”

-무엇인가?

“노아스는 사라졌나?”

테런은 아주 진중하게 피르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도 자신의 정령이 대답을 해 주지 않으면 어떡하나 싶었지만 기우였다.

-아니.

피르는 아주 천천히, 그가 원하는 대답을 돌려주었다.

-힘이 예전과 같지 않지만,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 순간 테런의 머릿속에 로제타의 목덜미에서 보았던 초승달 문양이 퍼뜩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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