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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애 옆에 예쁜 애-117화 (117/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17화

테런의 피콕블루색 눈동자에 조용한 파문이 일었다.

그는 방금 피르에게서 들은 말을 속으로 되새겼다.

땅의 정령이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테런의 손에 주먹이 쥐어졌다.

억지로 끊어 보려고 했던 연결 고리가 다시금 소리 없이 매듭지어지고 있었다.

테런이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러자 그의 가슴 근육이 크게 늘어나며 셔츠를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떠한 기대가 자꾸만 심장을 뛰게 만들고 있었다.

‘어쩌면’, ‘혹시’ 하는 생각에 한 번인 흥분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그러다가 ‘만약 그게 맞다면 왜.’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고개를 치켜들었다.

테런은 심란해 보이기도 하고, 어딘가 기뻐 보이기도 하는 복잡한 감정을 담은 채로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 이상 피르에게 뭘 묻는다고 해서 대답이 돌아올 리 만무했다.

“그래. 그거라도 대답해 주어서 고맙군.”

애써 차분한 목소리로 답하고 난 뒤, 그는 내내 참고 있던 숨을 길게 몰아쉬었다.

당장 내일 자신이 시찰단에 합류하여 수도를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애석하게 느껴졌다.

어서 알아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데 제게 주어진 시간이 별로 없었다.

당장 내일 수도를 떠나야 할 테니, 무엇인가를 깊고 진득하게 파 보지 못할 것이다.

그렇다고 피르를 부릴 수도 없었다.

피르가 소식을 알아 올 수 있는 것은 ‘현재’에 국한되니까.

‘만약 그녀가 그 아이가 맞다면…….’

어째서 자신을 아는 척하지 않는 것인지, 왜 그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인지 그 이유를 알아야 했다.

로제타는 자신이 야만인의 핏줄을 물려받은 클리프 남작의 사생아로, 6살 때 그에게 맡겨졌다고 했다.

처음에는 그저 무심히 흘려 넘겼던 묘하게 들어맞는 기간.

테런의 마음속에 점차 의심이 치솟았다.

그녀는 자신이 정말 남작의 사생아라고 여기는 듯했다.

딱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 않았으나,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반드시 파 보아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은 급한 대로 내일 출발하면서 긱스에게 물어봐야겠군.’

아마 그녀의 과거에 대한 정보는 긱스가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에스테스 파크에서 간병인으로 최종 채용하기 전 조사를 해 두었을 게 분명했다.

공녀인 클라리사의 곁에 두는 인물이니만큼 신원 보증을 확실하게 해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긱스가 어련히 잘 살폈을까 싶어 자신은 살펴보지 않았는데 그게 이제 와 뼈 아팠다.

그 외에 긱스가 알아내지 못한 부족한 정보는 사람을 사서 알아보기로 마음먹었다.

클리프 남작이 맡은 장원은 아주 작은 마을 하나라, 정보를 모으는 게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후우.”

테런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폭풍이 몰아치듯 생각을 이어 가고 빠르게 결정을 내리다 보니 진이 조금 빠지는 기분이었다.

만약 그녀가 자신이 그토록 그리던 그 아이가 맞다면, 어째서 자신을 아는 척하지 않는 것인지 그 이유를 알아내야만 했다.

그는 언제나 정보를 습득하면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다음 계획을 수립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번만큼은 그게 잘되지 않았다.

심란한 마음을 따라 머릿속도 뒤죽박죽이었다.

어서 빨리 실마리를 잡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는 재차 숨을 몰아 내쉬며 조급한 자신의 마음을 다독거렸다.

‘오히려 잘됐어.’

스스로도 지금 자신이 지나치게 흥분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시찰을 하며, 로제타에게서 떨어져 있는 동안 오히려 차분히 생각을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테런은 이만 방으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내일부터 장거리 이동을 시작하니 조금이라도 쉴 수 있을 때 쉬어 두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는 다시 잎을 뜯어 먹기 시작하는 피르를 멀거니 올려다보았다.

“적당히 뜯어 먹고 돌아가. 나 또 혼나니까. 그리고 먹던 건 다 먹고 새잎을 뜯어 먹든지 해. 보기 흉하게 그게 뭐야.”

-좀생이 같으니.

힐난하는 피르의 말에 테런이 피식 웃으며 뒤돌아서려고 할 때였다.

-잠깐만. 계약자여.

웬일로 피르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테런이 다시 몸을 정령 쪽으로 고정한 뒤 위를 올려다보았다.

“더 할 말이 남았나?”

그 순간 피르의 몸에서 조금 더 많은 양의 빛 가루가 퍼져 나왔다.

반투명한 가장자리에서는 달빛처럼 은은하게 빛이 나기도 했다.

곧 인간계를 떠나 정령계로 돌아가겠다는 일종의 신호였다.

피르가 다시 테런의 머릿속으로 말을 걸어왔다.

-그대는 내게 맡긴 것을 이제 그만 찾아가도록 해.

테런의 어깨가 살짝 굳었다.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의도를 파악할 수 없었기에 테런이 미간을 모으고 눈매를 살짝 좁혔다.

-그대가 너무 헤매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내가 무엇을 헤매고 있는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뿐이라는 것을 부디 명심하길 바란다.

피르는 테런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오로지 제 할 말만을 이어 나갔다.

-물론 그대가 맡긴 물건은, 인간계에 나오면 그동안 멈췄던 시간을 직격으로 맞아야 해서 바스러질 것이다.

피르의 말은 너무도 심오했다.

-하지만 그 물건에 고여 있듯 갇혀 있던 시간은 다시금 흐르기 시작하겠지.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하기가 어렵군.”

점점 피르에게서 퍼져 나오는 빛 가루의 양이 많아졌다.

이제 정말 인간계를 떠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상자를 열 수 있는 열쇠는 오직 그것뿐이니, 부디 내 말을 명심하게나. 계약자여. 다시 웃음을 찾을 방법은 오로지 그뿐이다.

“열쇠라니?”

아직 다 해소되지 않은 궁금증에, 테런이 조급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피르! 제대로 대답하고 돌아가!”

하지만 그의 정령은 결코 친절한 성격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제 할 말만을 남기고 크게 날개를 펴 날갯짓을 하기 시작했다.

푸른 깃털을 감싸듯 피르의 주변으로 바람이 조용히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피르가 푸드덕 날아오르자 은은한 빛이 조금 더 강하게 발광하기 시작 하더니 이내 그 큰 몸을 집어삼키듯 사라졌다.

그렇게 피르가 사라졌다.

피르 나름대로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알려 주기 위해 빙빙 둘러서 말을 해 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

다만 문제는 테런이 그 말을 알아들을 듯 알아듣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누가 누구더러 좀생이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군. 나쁜 녀석 같으니. 함께 지낸 시간이 얼만데 조금 더 힌트를 주고 가면 어디가 덧난다고.”

테런이 한숨을 내쉬며 이미 떠나고 없는 피르에게 원망 어린 말을 토해 내었다.

반사 작용으로 찬찬히 흔들리는 이파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렇게 피르가 정령계로 돌아가고 난 뒤, 테런은 한숨을 삼키며 돌아섰다.

그러면서 동시에 고개를 들어 올려 저택의 동쪽, 3층을 바라보았다.

클라리사의 방과 로제타의 방 두 개 모두 불이 꺼져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하는 테런을 반드시 배웅하겠다며 평 소보다 이른 잠자리에 든 터였다.

로제타의 방에 조금 더 길게 시선을 준 뒤, 테런이 저택 안으로 들어 섰다.

7. 용서받지 못할

이튿날, 이른 아침부터 에스테스 하우스는 북적거렸다.

세 시간도 채 자지 못하였으나, 테런은 누구도 그 피로를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멀끔한 얼굴로 모두의 앞에 나타났다.

“이런. 내가 제일 늦은 모양이로군.”

긱스 역시 일찍 도착해 아내인 레나의 손을 꼭 붙잡고 서 있다가 테런이 등장하는 것을 보고 아쉬움 가득한 눈길로 그녀를 한번 바라보고는 원래 자신이 서 있어야 할 자리로 다가왔다.

어느새 1층으로 내려온 테런은 자신을 배웅하기 위해 모인 면면을 확인했다.

“괜히 저 때문에 모두가 번잡스럽군요.”

그가 장갑을 끼며 가벼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에스테스 공작가의 주인이 떠나는데, 당연히 모두 나와 봐야 할 일 아니겠니.”

오랜만에 보는 카밀라가 도도하게 그의 말을 응수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이 없었지만, 손자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안쓰러움과 염려가 묻어 있었다.

“건강히 다녀오겠습니다.”

“그래야지.”

카밀라가 손을 뻗어 테런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테런은 허리를 조금 낮추어 카밀라의 옆에 서 있는 클라리사와 시선을 맞추었다.

“오라버니가 없어도 약 잘 챙겨 먹어야 한다?”

그가 새끼손가락을 들어 올리자, 클라리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거기에 냉큼 제 손가락을 걸었다.

“오라버니가 멀리서 걱정하시지 않게 말 잘 들을게요.”

대견하다는 듯 반대쪽 손으로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어 준 뒤 테런이 나지막이 말했다.

“힘들 시기인데 함께 있어 주지 못해 미안하다.”

클라리사는 대견하게도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는 뜻을 표했다.

“이해해요, 오라버니.”

그가 마지막으로 떠나는 인사를 전할 사람은, 로제타였다.

테런은 무의식중에 그녀의 목 부근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녀는 오늘도 긴 머리카락을 내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뒤늦게, 이런다고 보일 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가 바보 같다고 느껴져 피식 웃음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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