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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애 옆에 예쁜 애-118화 (118/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18화

“공작님.”

자신을 부르는 로제타의 목소리에, 테런이 서둘러 그녀의 목 부근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녀가 테런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입술을 휘었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테런의 얼굴에도 봄바람 같은 웃음이 맺혔다.

“잠은 좀 주무셨어요?”

“괜찮습니다.”

로제타의 시선이 살짝 아래로 내려갔다.

그녀는 테런의 목 부근에 매어진 타이를 발견했다. 환한 미소가 그녀의 얼굴 전체로 퍼지듯 번져 나갔다.

“제가 선물해 드린 타이를 하고 가시는군요.”

테런은 고개를 끄덕이며 오른손을 들어 올렸고, 타이의 매듭을 고정시키듯 한 번 더 매만졌다.

“중요한 날이니까요.”

로제타가 선물한 타이는 귀한 날에만 착용할 수 있는 좋은 것이라고 돌려서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제 입으로 이런 말 하긴 참 그렇지만, 타이의 색깔이 공작님께 참 잘 어울리는 것 같아요.”

“압니다.”

로제타와 테런은 실없는 말을 나누며 슬쩍슬쩍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카밀라가 그런 두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옆에 선 클라리사의 어깨를 살며시 끌어안았다.

왜 그러냐는 듯 클라리사가 자신을 올려다보자 카밀라는 한껏 낮춘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잠깐 자리를 피해 주자꾸나.”

“네, 할머님.”

그렇게 두 여자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문밖으로 나갔다.

테런과 로제타는, 카밀라와 클라리사가 자신들로부터 멀어지고 있다는 데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집결하기로 한 곳까지 함께 가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요.”

로제타가 아쉬운 투로 말했다.

하지만 테런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마음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국경 시찰단의 첫 여정이 시작되는 곳은 수도 아렌트의 성문이었다.

체이스 왕자와도 그곳에서 만나기로 했다.

로제타와 클라리사는 성문까지 동행해 테런을 배웅하고 싶어 했고, 그 뜻을 조심스럽게 전했다.

하지만 테런이 반대해 뜻을 이룰 수 없었다.

우기 행사에 대한 왕국민들의 관심은 로제타가 상상한 것 그 이상이었다.

윌셔스 왕국에서 제일가는 축제는 신년제와 수확제를 손꼽을 수 있다.

그런데 우기제 역시 그 두 축제에 비할 수 있을 정도로 큰 행사였고, 전국민의 관심을 모으는 일이었다.

특히나 올해는 다른 해와 달리 체이스 왕자와 에스테스 공작이 함께 지방으로 떠나게 되었다는 점에서 많은 이들의 주목을 샀다.

둘 다 평민들로서는 쉽게 만날 수 없는 인물들이니만큼, 왕국민들은 배웅을 목적으로 그들을 보기 위해 성문으로 밀집한 상태였다.

이렇게 인파가 많이 모일 때는 자칫 잘못하다가 사고가 날 위험이 크기 때문에 테런은 그녀의 배웅을 한사코 고사했다.

“그렇게 사람이 많을 때는 아무리 호위 기사의 수를 늘린다고 한들 경호하는 데 한계가 있으니까요. 배웅을 받는 것보다 당신의 안전이 더 중요하다는 걸 잊지 말아요.”

로제타는 더 고집부리지 않고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님이 안 계시는 동안 공작가가 많이 적적할 것 같아요.”

테런이 입가에 호선을 그린 상태로 미소 지었다.

“나도요. 당신이 많이 보고 싶을 것 같습니다.”

“기다림은 길어도, 돌이켜 생각해 보면 금방 지나가겠죠?”

“그럼요.”

테런은 부드럽게 눈을 휜 다음, 조금 더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그런 뒤 로제타의 키에 맞추듯 살짝 고개를 떨구었다.

사용인들이 그들을 방해하지 않고자 눈치껏 거리를 벌리고 떨어져 있었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목소리를 잔뜩 낮춘 상태였다.

그는 마치 로제타에게만 비밀 이야기를 들려주듯 나지막이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저택 경비의 수를 늘렸어요. 우리가 떠나는 순간부터 비가 내릴 테니, 사교계 인사들도 아마 외부 활동보다는 실내에서 모임을 하려 들 겁니다.”

며칠 전, 그녀가 이야기했던 젤다라는 메이드의 이상한 행동 때문에 취한 조치인 듯했다.

로제타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무거운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가볍게 만들기 위해 우스갯소리를 했다.

“안 나가는 게 제일 속 편한 일일지도요.”

하지만 테런은 그녀의 말을 진담으로 받아들였는지 곧바로 고개를 젓고 진지하게 조언했다.

“아뇨. 평소대로 생활하는 게 제일 좋습니다. 아직 후작가의 목적이 뭔지 알지 못하는 상황이니, 우리 쪽에서 그들을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미리 드러낼 필요는 없어요.”

“하기는요.”

“대신 외출할 때, 주의만 조금 더 기울여요.”

“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

로제타가 비장한 표정으로 입술을 꼭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리자, 로제타의 시선이 다시금 테런의 얼굴에 닿았다.

그녀는 테런의 얼굴을 기억해 두기라도 하듯 꼼꼼하게 그의 이목구비를 살폈다.

‘이 세계에도 사진이 있으면 좋을 텐데.’

솔직히 말하자면, 테런의 얼굴은 뇌리에 박힐 정도로 정말 잘생긴 얼굴이었기에, 어지간한 충격을 받는 게 아니라면 절대 잊히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사진이 있으면 없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 아쉬움에 든 생각이었다.

그녀의 기억에 의한 원작의 흐름대로라면 이번 시찰은 자그마치 1년이 걸린다.

하지만 그건 원래대로 바론이 떠났을 때나 그렇게 걸리는 기간이었다.

원작의 바론도 본래는 테런의 계획처럼 한 달 정도 되는 일정으로 길을 떠난다.

하지만 바론이 시찰을 하러 간 영지에서 제니스를 만나게 되면서, 조금 더 민생을 살피고자 그녀와 함께 전국을 돌아다니게 되는 바람에 1년으로 기간이 늘게 되는 것이었다.

‘이번엔 그러진 않겠지.’

로제타는 마음에 인, 왠지 모를 불안감을 삼키며 물었다.

“금방 다시 뵐 수 있겠죠?”

“그럼요.”

믿음을 심어 주는 듯 든든한 그의 대답에 로제타가 붉은 입술을 끌어 올렸다.

“그런데 목적지는 어딘가요?”

“콘웰입니다.”

“그곳은…….”

귀에 익은 지명에 그녀가 미간을 살포시 찌푸렸다.

“이시크가 일하러 떠난 곳이네요.”

“맞습니다. 기억력이 좋군요.”

테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지반이 약하고 토질이 엉망이 된 곳입니다. 그래서 도로 보수 공사 중 가장 일의 진척이 느린 곳이기도 하죠. 우기가 시작되면 가장 피해를 많이 볼 곳이기도 합니다.”

로제타가 볼을 조금 부풀리며 투정 부리듯 툴툴거렸다.

“만약 거기서 이시크를 보게 된다면 저 대신 구박 좀 해 주세요.”

그 정도야 쉽다는 듯 테런은 선뜻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에 맞장구 쳐 주었다.

심지어 구체적인 방안까지 제시했다.

“일을 안 하고 있으면 벌을 주고 오죠. 예를 들자면, 가장 일이 힘든 구역이라는 카르나 마을로 근무지를 변 경하거나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그 순간 로제타가 잠시 멈칫했다.

“카르나…….”

로제타는 방금 들은 마을 명을 곱씹어 보다가 이내 굳은 얼굴로 다시 말을 이었다.

“방금 카르나 마을이라고 하셨어요?”

“예? 그렇습니다. 이번 시찰 일정 중에 들를 곳이기도 하죠. 왜 그러나요?”

로제타는 대답하지 않았다.

미간을 좁힌 그녀의 표정이 퍽 심각해 보였으나, 테런은 답을 재촉하지 않고 진득하게 그녀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한참 만에야 로제타가 더듬더듬, 마치 목소리를 쥐어짜 내듯 말을 이었다.

“공작님. 만약 거기서…….”

“음?”

잠시 주저하던 로제타가 입을 열었다.

“만약 그 카르나 마을에서…….”

그녀는 거기까지만 말한 뒤 또 말을 끊고 크게 숨을 골랐다.

자꾸만 입 안이 말라 말을 주저하게 되었다.

그녀는 마치 동아줄이라도 붙잡는 것만 같은 심정으로 마른침을 삼키며 눈을 구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만약 그곳에서 수도로 올라와 일하기를 바라는 여성이 있다면…… 기회를 주면 어떨까 해서요.”

이 정도로는 영 안심이 안 되는지 로제타는 한 번 더 입을 열어 더듬더듬 조건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자면…… 젊고, 셈이 밝은데…… 연갈색 머리를 가진…… 뭐, 어디서나 흔히 만날 수 있는 그런 여성 말이에요.”

제 입으로 어디서나 흔히 만날 수 있는 외모라고 말은 했지만, 사실 누가 들어도 지금 로제타가 가리키는 인물은 특정된 한 명이었다.

그 한 명이 누군지에 대해선 알지 못하지만, 눈치 빠른 테런이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뭡니까? 그, 묘하게 구체적인 조건은요?”

로제타가 어색하게 웃으며 딴청을 부렸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다 나는 기분이었다.

“카르나 마을에 누구 아는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아, 아뇨. 그런 건 아니지만…….”

로제타는 얼버무리며 살그머니 입술을 감쳐물었다.

최대한 제니스의 이름을 말하지 않고 어떻게 그녀를 설명할 수 있을까, 너무 어려웠다.

일단 저지르듯 말을 꺼내기는 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스스로도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그녀 역시 입 밖에 꺼내기 전까지는 말을 할까 말까 무척이나 고민했다.

하지만 만에 하나의 가능성에 희망을 걸어 보고자 하는 마음이 컸다.

‘현재로선 바론이 클라리사와의 파혼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있어.’

물론 바론은 자신보다 열다섯 살이나 어린 약혼녀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언제나 그 스스로 그것을 공공연하게 말하고 다녔으므로 윌셔스의 사교계에서 그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로제타는 그건 그거고, 정치적인 목적은 또 별개로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약혼을 깨면 불리한 것은 클라리사뿐만이 아니었다.

아직 왕위에 오르지 않은 바론 역시 타격이 컸다.

4가문 중 하나인 에스테스 공작가와 척을 지는 것과 마찬가지니, 장차 왕위에 오른다 할지라도 귀족 사회에서 그의 입지가 상당히 좁아지게 될 것이었다.

바론은 비록 난봉꾼이지만 머리가 영리한 축에 속했다.

게다가 손해를 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편인데, 그런 그의 성향으로 미루어 짐작해 볼 때, ‘현재의 바론’은 에스테스의 파혼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그뿐만 아니라 에스테스 공작가가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는 것이라고 오해하여 앞으로 계속해서 공작가를 적으로 간주하고 사사건건 시비를 걸어 오거나 추진하고자 하는 일에 딴지를 걸 수도 있었다.

‘비록 바론이 직접 시찰을 나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아직은 개과천선을 할 여지가 있어.’

원작에서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는 부분이 바로 바론이 제니스를 만나는 것부터였다.

그러니 로제타는 주인공인 두 사람을 직접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보고자 했다.

이렇게 완강히 가지 않겠다고 하니, 이제 남은 방법은 제니스를 수도로 데리고 오는 것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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