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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애 옆에 예쁜 애-119화 (119/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19화

‘만약 제안한다면…… 그녀는 분명히 공작님과 함께 아렌트로 올라올 거야.’

로제타는 침착하게 원작에 대한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소설 속에서 제니스는 언제나 수도로 올라와서 일을 하고 싶어 했다.

카르나는 시골 마을 중에서도 특히나 더 가난한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이 그러하듯 계절에 맞춰 봄에는 파종을 하고, 여름엔 잡초를 뽑으며, 가을엔 추수를 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 일을 폄훼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제니스는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좀 더 다른 일을 하고 싶어 했다.

곤궁하고 고달픈 삶에도 불구하고 제니스는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언제나 책을 펴 들었고 자기 개발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카르나 마을에서는 책을 구하기가 어려웠기에, 제니스는 자신이 가진 책을 셀 수도 없이 많이 반복해서 읽었다.

그 탓에 표지와 책등이 해지고 장마다 손때가 묻은 것은 당연한 이야기였다.

제니스가 특히나 좋아했던 공부는 바로 숫자였다.

소설이나 글과 달리, 숫자는 기본적인 셈법만 외운다면, 수많은 숫자를 조합해 여러 가지 계산을 해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셈에 밝은 그녀는 성인이 된 뒤, 마을 사람들이 애써서 경작한 작물을 상인들에게 손해 보고 팔지 않도록 단가를 계산하는 일을 하기도 했고, 얼렁뚱땅 임금을 후려치려는 사람들 로부터 재계산을 하는 일을 도맡아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바론을 만나게 되고 함께 시찰을 떠난다.

그때 바론은 매우 파격적으로 평민 출신인 그녀를 보조 행정관으로 채용하는 인사 조치를 감행했다.

숫자와 셈에 밝았던 그녀는 그렇게 바론과 함께 전국을 돌아다니다가 몇몇 영지에서, 도로 공사비를 착복한 영주들을 적발해 내는 공을 세우기도 한다.

‘만약 제니스가 상경한다면…….’

로제타는 마른침을 삼켰다.

정말 운명이 그녀를 바론과 엮는다면 좋은 게 좋은 것이리라.

바론도 제정신을 차릴 수 있고, 제니스 역시 제 짝과 함께 살 수 있으며, 클라리사와의 파혼도 아주 원만하게 해결될 테니까.

만약 두 사람이 이어지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로제타는 제니스에게 그가 그녀의 운명이라고 강요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녀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지원해 주고 싶었다.

제니스의 능력이라면 에스테스 공작가에서 직책을 얻는 일이 그리 어렵진 않을 것이다.

‘관리의 길을 걷는 것도 좋지 뭐.’

제니스는 분명 공작가에 귀한 인재가 될 것이었다.

물론 아직 그녀를 직접 만나 보지 않았지만, 로제타는 확신했다.

‘바론도 저렇게 원작과 똑같은데, 제니스라고 다르진 않겠지.’

그러니 그녀는 분명히 테런과 긱스가 무척이나 좋아할 만한 인재상이리라.

로제타는 테런이 자신을 이상하다는 듯 내려다보고 있음을 깨닫고 서둘러 입을 열어 변명처럼 덧붙였다.

“만약에, 만나게 된다면 말이에요.”

그녀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왜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테런은 묻지 않았다.

다만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을 뿐이다.

“우선은 새겨듣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해요. 공작님.”

그때 현관 밖에서 테런을 부르는 긱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각하! 이제 슬슬 출발하셔야 늦지 않게 도착하실 수 있습니다!”

“알았네.”

이제 정말 떠나야 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로제타가 한 번 더 몸조심하라는 당부를 하기 위해 그를 향해 고개를 올렸을 때였다.

테런이 로제타 쪽으로 상체를 살짝 기울였다.

갑작스럽게 가까워진 거리에 로제타가 놀랐으나, 몸을 뒤로 물리지는 않았다.

테런은 그녀의 귀 부근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주위에서 조용히 웅성거리는 소리가 퍼져 나갔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로제타와 테런의 모습이 퍽 정다워 보일 것이었다.

또 어떤 각도에서는 그녀의 뺨 위로 그가 짧은 키스를 남기는 것처럼도 보일 수도 있었다.

로제타의 얼굴에 홧홧하게 열이 올랐다.

앞으로 모아 마주 잡고 있는 손에 힘이 꽉 실렸다.

그때 테런은 로제타 외에는 아무도 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그리고 다녀오면 이야기 좀 해요.”

“어떤…… 이야기요?”

로제타가 열에 들뜬 듯한 목소리로 덩달아 작게 물었다.

테런이 아랫입술을 감쳐물었다가 이내 풀며 가라앉은 음성으로 나지막이 말했다.

“당신의 목 뒤에 있는, 그 문장에 대해서.”

로제타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초록색 눈동자가 파문이 인 것처럼 떨리며 동요했다. 하지만 금세 차분함을 되찾았다.

“역시, 보셨군요.”

“눈앞에 훤히 드러나 있었으니까요.”

테런이 로제타의 반응을 살피듯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저는 어릴 적에 그 문장을 본 적이 있습니다.”

로제타는 눈치껏 그가 랭우드 후작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가 아랫입술을 말아 문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한숨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실 것 같았어요.”

“제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맞는 겁니까?”

로제타가 쓰게 웃었다. 여전히 뭐라고 대답해야 좋을는지 알 수 없는 기분이었지만, 더는 딱히 숨기지 않았다.

애써 숨기려던 것을 포기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일단 제 짐작은 그래요. 하지만 그럴 수도 있다고 말씀드릴 수 있는 근거가 부족했어요.”

로제타는 눈을 굴리며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매우 조심스럽고 또 힘겹게 말을 꺼냈다.

“게다가 ‘그분’이 공작님께는 아픈 추억이잖아요. 서투른 말로 공작님을 허튼 희망에 빠트리고 싶지 않아 말을 꺼내기가 더 조심스러웠어요.”

결국 자신을 위한 배려였다는 생각에 테런이 입술을 힘주어 꽉 다물었다.

“그래서 공작님께 말씀드리기 전에 제가 먼저 스스로 증명하고 싶었어요. 피르가 절 쪼은 곳에 반점이 나타난 것 외에 제가 정말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같은 것을 말이에요.”

그러다 이내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데 괜히 시간을 끌었던 것 같아서, 그런 결정을 내린 저 스스로가 조금 바보같이 느껴지네요.”

그녀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테런이 조금 다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 것보다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잖아요.”

“네? 뭐를 말씀하시는 건지…….”

“날 기억하지 못합니까?”

테런의 목소리에 조급함이 한가득 묻어 있었다.

“화재가 일어나기 전까지 우린 함께였어요. 그런데 날 기억하지 못합니까? 그리고 클리프라는 그 생뚱맞은 성은 대체 뭡니까?”

로제타는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잠시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사실 그게…… 기억이 나지 않아요. 제게 6살 이전의 기억은 없거든요.”

이해되지 않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도대체 어째서……?”

그의 말은 끝맺어지지 못했다.

“공작님! 이제 출발하셔야 합니다!”

출발을 재촉하는 긱스의 목소리가 들려온 까닭이다.

테런이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러다 격앙된 감정을 조금 억누르듯 길게 숨을 내쉰 그가 아래로 떨어트린 로제타의 손을 가볍게 쥐고 제 입술 근처까지 끌어 올렸다.

그런 뒤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입술을 눌렀다가 떼며, 최대한 담담히 말했다.

“일단 오늘은 여기까지. 나중에, 시간을 들여서 느긋하게 이야기하죠. 그럼 로제타 양, 다시 뵙는 날까지 부디 몸 건강하길.”

테런은 손을 놓아 주었고, 로제타는 손끝에서부터 손을 말아 쥐었다.

잠시 주저하던 그가 손을 올려 로제타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듯이, 겁내지 말라는 듯이.

* * *

에스테스 하우스의 연철문이 열렸다.

반질반질 윤이 나는 흑마를 탄 테런이 모습을 드러내자, 우렁찬 함성이 쏟아졌다.

“에스테스! 에스테스!”

“공작님! 몸 성히 다녀오십시오!”

연철문 밖에는 이미 사람들이 빼곡하게 서 있었다.

하지만 집결지까지 가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누가 길을 비키라고 큰 소리를 내며 정리하지도 않았건만, 왕국민들이 알아서 물러났다.

4가문에 대한 깊은 존경심이라고 볼 수 있었다.

한편 테런은 심란한 표정으로 말을 몰았다.

머리도 복잡한데, 바로 뒤에서 긱스의 잔소리가 귀 아프게 들려오고 있어 그의 표정이 더욱 좋지 않았다.

“클리프 영애께 또 무슨 말씀을 하신 겁니까?”

“별말 하지 않았네.”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말을 몰면서도 테런은 용케 대답했다.

“그런데 영애의 표정이 왜 그러신 겁니까!”

“로제타 양의 표정이 뭐 어땠는데?”

“어떻긴요! 떨어진 거리에서 봐도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게 눈에 들어오던데, 모르는 척하시깁니까?”

“아니야, 그런 것.”

테런이 짧게 대답하며 한숨을 삼켰다.

“다정한 한때가 어찌 한 달을 못 가십니까! 분명 두 분의 분위기가 화기애애해 보였는데, 각하께서 뭐라고 속삭이고 난 뒤부터 영애의 표정이 이상했단 말입니다.”

긱스는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속사포 같은 잔소리를 퍼부었다.

테런은 긱스가 제발 그만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티 나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과 로제타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는 걸 알긴 알지만, 그래도 계속 듣고 있자니 진이 다 빠지는 기분이었다.

이제 슬슬 그만하라고 한마디를 해야 할까 싶었을 때였다.

“공작!”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서 자신을 알아보고 목소리를 높이는 체이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긱스의 입이 꾹 다물렸다.

잔소리는 많아도 눈치는 있는 보좌관이라 다른 사람들 앞에서 제 상관의 면을 해치지는 않았다.

“왕자님.”

테런은 곧장 체이스 쪽으로 자신의 흑마를 몰았다.

제이스는 성마보다는 조금 더 체구가 작은 갈색 말 위에 올라 있었다.

소년은 아닌 척하고는 있지만 조금 들떠 보이는 얼굴이었다.

“제가 너무 늦게 나온 듯합니다. 기다리시게 하여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내가 괜스레 조급하게 굴어 일찍 도착한 것이니.”

체이스는 제게로 탓을 돌렸다. 그 모습이 퍽 애늙은이 같아, 테런의 입가에 부드러운 웃음이 자연스럽게 걸렸다.

“성격 급한 윗전을 만나, 아랫사람들만 괜히 고생하였지요.”

짐짓 점잔 빼는 말투가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잘 어울렸다.

같은 핏줄인데 참 여러모로 바론과 다른 모습을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테런은 체이스가 연신 제 주변을 살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왕자님. 무엇을 그리 찾고 계십니까?”

“네?”

그의 질문에 체이스가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수습하다가 얼굴을 붉혔다.

테런이 대답을 기다리는 듯 계속해서 그를 바라보고 있자, 체이스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일을 열었다.

“공녀는……배웅을 나오지 않았군요.”

테런은 반사적으로 입꼬리를 늘였다.

체이스는 조금 전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아직까지는 이편이 훨씬 제 나이다워 보여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미안하다는 듯 눈썹을 살짝 아래로 내려트리며 말을 꺼냈다.

“클라리사를 찾으셨군요. 이런. 제가 나오지 말라 했습니다. 사람이 너무 많아 다칠 위험이 커서요.”

체이스는 눈에 띄게 실망하였다.

그의 어깨가 축 처졌다.

“하기는요……. 공녀는 몸이 허약하기도 하니까. 제가 괜한 욕심을 부렸나 봅니다.”

“아닙니다. 클라리사가 무척이나 아쉬워했습니다. 왕자님께도 말씀을 잘 전해 달라고 부탁까지 했는걸요.”

테런의 말에 체이스의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공녀가요? 내게 말입니까?”

“그럼요.”

“무슨 말을 전해 달라고 하던가요!”

전혀 기대 못 했던 말인 듯 소리를 높이는 체이스의 목소리 끝이 살짝 갈라졌다.

클라리사가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마치 정수리에 추를 달기라도 한 것처럼 아래로 숙이고 있던 고개는 퍼뜩 다시 들렸다.

체이스는 테런의 입술이 다시 열리기를 오매불망 기다리며 주시했다.

그런 어린 왕자의 모습이 귀여워 테런은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위로 솟구치려는 입꼬리를 의식하며 단단히 잡아 눌렀다.

헛기침으로 짧게 목을 고른 뒤, 그는 더 시간을 끌지 않고 체이스에게 대답을 들려주었다.

“몸 건강히 다녀오시고, 수도에서 다시 뵙게 될 날을 기다리겠다고 전해 달라고 하더군요.”

먼 길을 떠나는 사람에게 흔히 건네는 안부를 비는 인사말이었다.

하지만 체이스는 엄청나게 감격스러 운 말을 듣기라도 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도 모르게 슬그머니 벌어지는 입술은 덤이었다.

그러다 뒤늦게 ‘아차, 내가 너무 채신머리없이 경망스럽게 굴었구나’ 싶은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체이스는 꼭 쥐고 있던 고삐를 놓고는 벌어진 제 입술을 감추려는 듯 손을 얼굴께로 들어 올렸다.

그 순간 체이스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어,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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