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20화
제 등에 앉은 이가 고삐를 놓았다는 것을 귀신같이 알아차린 갈색 말이 그 자리에 가만히 있지 않고 제멋대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말은 본래 무척이나 예민한 동물이라 얼굴에 눈가리개를 착용시켜, 시야를 제한한다.
정면만 바라보게 만들어 쉽사리 흥분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체이스가 탄 말도 눈가리개를 착용하고는 있었다. 하지만 겁을 먹은 듯 보였다.
시찰단을 배웅하기 위해 거리와 성문에 워낙 많은 사람들이 밀집해 있는 터였다.
그들이 한마디씩만 보태도 커다란 소음이 발생하고 있었다.
“어, 어? 자, 잠깐만! 가만히……!”
제멋대로 움직이려는 말에 체이스는 당황했다.
뒤늦게 놓쳤던 고삐를 다시 쥐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왕족이 타는 말이기에 더 신중을 기했어야 함이 옳지만, 잘 훈련된 말은 보통 성마였다.
그 키가 엄청나게 높아 아직 여덟 살인 체이스가 타기엔 여러모로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그의 키에 맞는, 보다 작은 말을 준비하다 보니 아직 훈련이 덜 된 아이를 데려온 듯싶었다.
갈색 말은 심지어 등에 탄 체이스가 자신을 제대로 다루지 못하자 불안감이 더 증폭된 모양이었다.
“왕자님! 조심하십시오.”
빠르게 흑마를 몰아 체이스의 곁으로 간 테런이 갈색 말의 고삐를 단단히 잡아챘다.
다행히 갈색 말은 금세 진정했고, 테런은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쉴 수 있었다.
그는 일찍부터 이런 사태를 우려했다.
어린 데다가 말을 잘 다루지 못하는 체이스가 승마를 해서 시찰을 나가는 것은 지극히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하여 국왕에게 체이스는 마차로 이동하는 편이 좋겠다고 간언을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왕국민들의 앞에 나서는 자리네. 어리다고는 하지만 체이스는 엄연히 왕실을 대표해 시찰단을 이끄는 걸세. 그러니 국민들에게 위엄을 보일 필요가 있어.」
그리고 그 의견에 바론이 적극 동의했다.
아마 그의 심리 기저에는 체이스가 그러다 말에서 떨어져 다쳐도 좋으리란 생각이 들어 있는 듯했다.
‘하여간에.’
테런은 혀를 차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았다.
그는 서둘러 체이스를 살폈다.
아이는 다행히 넘어지지 않았으나 두 손으로 말갈기를 꼭 쥐고 있었다.
어지간히 놀랐는지, 체이스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져 있었다.
“미안, 미안합니다. 공작……. 그리고 고맙습니다.”
체이스가 더듬거리며 인사를 전했다.
겉모습은 생각한 것보다 차분했다.
하지만 그것은 주위에 자신을 지켜보는 눈이 많다는 것을 의식해서 억지로 공포심을 숨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알아본 테런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왕자님, 크게 심호흡을 해 보십시오.”
체이스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인 뒤 그의 지시대로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길게 내뱉었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고 나자 체이스의 안색이 눈에 띄게 진정되었다.
그제야 테런은 체이스에게 고삐를 돌려주었다.
그런 뒤 오직 그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아주 작게 속삭였다.
“성문 바깥까지만 참으십시오. 그 뒤에 곧바로 마차로 갈아타실 수 있도록 조치해 두었으니까요.”
체이스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괜찮다고 말씀드리기 전까진 절대 이 고삐를 느슨하게 잡거나 놓으면 안 됩니다. 고삐만 단단히 잡고 있어도 절대 말이 함부로 굴지 않을 겁니다.”
“그리하겠소.”
진지하게 당부의 말을 거듭하고 난 뒤에야 테런은 괜찮다는 듯 체이스를 향해 웃어 주었다.
“그럼 왕자님, 허리를 곧게 세우십시오.”
테런은 곧바로 말 머리를 돌렸다.
체이스의 바로 뒤에 자리를 잡고 서자, 금세 시찰단의 대열이 가다듬어졌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군중들도 일시에 입을 다물고 조용해졌다.
부우우우-
뿔피리 소리가 길게 울리기 시작했다.
또 한 번 성문 쪽에서 뿔피리가 길게 울며 두꺼운 성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치 화답이라도 하듯 성문의 반대편에 위치한 왕궁 쪽에서, 또 다른 뿔피리가 두 번, 길게 울렸다.
테런이 고삐를 한 손으로 쥐고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어디선가 ‘키이이이이-.’ 청량한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사람들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밀도가 높아 보이는 먹구름이 빠른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그때 또 한 번 ‘키이이이이-.’ 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선가 세찬 바람이 불어오기도 했다.
그때, 누군가가 하늘을 가리키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피르 님이시다!”
“어디? 어디에?”
“저쪽에! 피르 님!”
군중들이 저마다 목소리를 높였다.
왕궁의 뒤편에 있는 라츠 산에서부터 커다란 푸른 새가 시찰단 쪽으로 빠른 속도로 날아오고 있었다.
그렇게 피르와의 거리가 점점 더 가까워질수록 비례하듯 군중들의 함성도 커져 갔다.
체이스의 어깨가 살짝 굳었으나, 테런의 조언을 귀담아들은 효과가 있는지 팽팽하게 고삐를 쥔 손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
그 모습에 테런은 안도한 듯 숨을 삼켰다. 그런 뒤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로 시선을 주었다.
힘차게 상공을 가르고 있는 피르는 평소와 달리 온전히 제 모습을 드러낸 상태였다.
그 말은 테런, 혹은 로제타처럼 정령의 힘에 감이 좋은 사람만 정령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그 존재를 똑똑히 볼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실제로 군중들이 피르의 모습을 알아보고 이토록 환호하는 것이었고.
제법 멀리 있었는데 피르는 어느새 성문 앞에 다다라 있었다.
“우와, 크다!”
“진짜 신비롭고 아름다워…….”
오랜만에 정령의 모습을 본 사람들도, 처음 본 사람들도 모두 감탄을 터트리며 할 말을 잃었다.
정령은 따로 날갯짓을 하지 않았음에도, 그 큰 몸은 허공에 무리 없이 떠 있었다.
피르의 본모습은 수백 명의 머리 위에 커다란 그림자를 덮을 정도로 커다랬다.
그래서 몇몇은 위압감을 느끼고 마른침을 삼키기도 했다.
테런은 들고 있던 오른손을 주먹 쥐었다가 이내 다시 펼쳤다.
“피르. 바람을 일으켜서 비구름끼리 부딪치게 만들어라.”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피르가 그 큰 날개를 뒤로 물렸다가 단숨에 앞으로 날렸다.
그러자 강풍이 일며 먹구름이 날아오는 속도가 한층 더 빨라졌다.
그러다 하늘에 뜬 구름 중 가장 큰 적란운 두 개가 부딪쳤다.
쿠르르릉!
천지를 뒤흔들어 버릴 정도로 매우 크고 강렬한 천둥소리가 났다.
뒤이어 사람들의 정수리 위로 투둑, 투둑 차가운 빗방울이 하나씩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간헐적으로 한두 방울씩 떨어지던 것은 점점 더 잦은 간격으로 떨어졌고 이내 쏟아진다는 표현이 더 어울 릴 정도로 거센 빗줄기가 되었다.
그렇게 빗방울은 사람들의 어깨 위와 메마른 땅을 적셨다.
“와아아아아아!”
본격적인 우기의 시작이었다.
“왕자님. 가시죠.”
테런이 뒤에서부터 작게 말을 건네자 체이스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크게 숨을 들이켜는지, 뒤에서 보는 작은 어깨가 잠시 높아졌다가 이내 내려앉았다.
체이스가 고삐를 꽉 쥐고 등자를 굴렸다. 그렇게 소년이 탄 갈색 말이 가장 먼저 한 걸음을 떼고, 테런이 탄 흑마가 그 뒤를 이었다.
“윌셔스! 윌셔스!”
“에스테스! 에스테스!”
왕국민들은 이번 우기제의 주역과도 같은 두 가문의 이름을 한목소리로 외쳤다.
그 우렁찬 소리를 들으며 시찰단은 천천히 성문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 * *
성문을 완전히 빠져나온 뒤, 테런은 잠시 시찰단을 멈춰 세웠다.
그는 신속하게 체이스를 말에서 내리게 해 마차로 옮겨 타게 했고, 비구름을 물렸다.
출발하기 전, 성문 안쪽에서는 우기 제의 시작을 알려야 하니 조금 요란스러운 방법으로 비를 내리게 했지만, 지금부터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비를 맞으며 장거리를 이동하는 것은 매우 고된 일이었다.
무엇보다 차가운 비에 체온을 빼앗기면 면역력이 낮아져 아플 위험이 컸다.
그랬기에 적어도 시찰단이 이동하는 길에서만큼은 비가 내리지 않도록 빠르게 조치를 취한 것이었다.
상황을 정리한 테런이 다시 흑마에 올랐다.
다시금 행군이 시작되고, 맨 앞에 선 테런은 육성으로 제 정령을 소환했다.
“피르. 잠깐 와 봐.”
그러자 어느새 몸집을 작게 만든 파랑새가 쪼르르 날아와 그의 어깨에 앉았다.
“뀨.”
본체가 아니라서 그런가.
일반적인 새가 우는 소리만 들릴 뿐, 또다시 피르가 하는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함께 살아온 세월이 제법 길기에 대충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지 뉘앙스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테런은 말을 이었다.
“네가 한 말을 생각해 봤어.”
“뀨우.”
어디 한번 계속 말해 보라는 듯한 뉘앙스였다.
테런이 피식하다가 이내 웃음기를 거두고 정면을 응시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왜 그런 말을 내게 한 건지, 아직 이해는 잘 안 되지만…… 네 조언을 따르도록 하겠다. 오래전, 네게 맡긴 것을 꺼내 줘.”
더없이 진중한 목소리였다.
바람의 정령들이 보관하고 있던 ‘그 아이와 관련된 물건’이 인간계로 다시 오게 된다면 그 즉시 바스라질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계속 그리 두고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
테런은 하나씩, 차근차근 정리해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큰 결심을 내렸다.
“뀨.”
마치 잘 결정했다는 듯 작은 피르가 테런의 어깨 위에서 두 발을 모으고 콩콩 뛰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피르가 어깨에서 그의 팔뚝까지 내려온 상태였다.
테런은 한숨을 들이켠 뒤, 또 다른 본론을 입 밖으로 꺼내었다.
“그리고…… 피르. 내가 수도에 없는 동안 로제타 양을 지켜 줘.”
그 순간, 정말 타이밍 좋게 테런의 머릿속으로 피르의 목소리가 밀려 들어왔다.
-계약자여. 나는 네 곁에서 떨어질 수가 없다.
테런은 자신의 팔뚝 위에 자리를 잡고 서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작은 피르를 흘겨보았다.
가만 보니 이 녀석이 저 모습을 하고 있어도 말을 할 줄 알면서도 이제껏 일부러 그러지 않았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그럼 네 밑의 다른 녀석이라도 보내. 융통성 없기 굴지 말고.”
말본새 보라는 듯 피르가 눈에 힘을 주다가 뽀르르 날아올랐다.
그런 뒤 테런의 이마를 부리로 콱 찧고 도망치듯 날아가 버렸다.
“저 녀석을 진짜.”
테런이 살짝 이를 갈았다가 이내 포기하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 * *
테런이 수도를 떠난 다음 날.
로제타는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으음…….”
그녀는 모로 누워 있었는데, 자신이 벤 베개 바로 옆에 무엇인가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어라? 이게 뭐지……?”
로제타가 부스스 눈을 뜨며, 팔꿈치로 푹신한 침대를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