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21화
붉은 머리카락이 쏟아질 듯 흘러내려 시야를 잠시 방해했다.
서둘러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걷어 귀 뒤로 넘긴 뒤, 로제타는 그 물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마치 플라워 리스처럼 동그란 모양이었고, 무척이나 작았다.
로제타가 눈을 가늘게 뜨며 그것을 더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이 아이들이나 갖고 놀 법한, 토끼풀로 만든 풀반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클라리사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수변 공원에 나들이를 갔을 때 테런이 토끼풀을 꺾어다 반지를 만들어 주었다.
자신이 끼기엔 너무 작아 저택으로 돌아온 뒤 클라리사에게 선물로 준 터였다.
하지만 잠결에도 곧 그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주 오래전에 만든 것처럼 풀반지는 바짝 말라 있었다.
“누가 이런 걸 여기에 둔 거지……?”
로제타는 아직 잠이 덜 깨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풀반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의 중지 끝에 풀반지가 닿았다.
그리고 그 순간, 반짝하고 빛이 일더니 바삭하는 소리와 함께 산산이 바스라져 버렸다.
“……응?”
그제야 로제타는 잠이 완전히 가시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로제타가 손을 대는 순간 바스라졌다.
“뭐지? 이게? 왜 이러는 거야?”
원래도 작은 크기였기에 부스러기는 고작 엄지손톱만 한 양으로만 남았을 뿐이었다.
자, 이제 이걸 어쩐다?
처음에는 그냥 베개째로 들어 올려 발코니에서 탈탈 털어 버릴까 했다.
하지만 왠지 모를 망설임이 생겼다. 베개 끄트머리를 쥔 로제타의 손가락에 힘이 실렸다.
“어쩔 수 없지.”
결국 로제타는 한숨을 길게 내쉰 뒤 왼쪽의 손바닥을 오목하게 만들고, 오른손의 손날로 베개 위를 살살 쓸어 부스러기를 모아 담았다.
들고 있는 것 때문에 손으로 침대를 짚을 수 없자, 그녀는 몇 번이나 발꿈치로 이불을 짚으며 엉덩이를 끌어야 했다.
그렇게 움직여 한참 만에야 넓은 침대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곧장 화장대로 간 로제타가 잘 다려진 손수건 한 장을 반듯하게 펴 그 위에 모아 온 부스러기를 조심히 올려 두었다.
“그런데 이게 진짜 뭐지?”
로제타가 허리에 양손을 짚으며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잿더미를 들여다보는 그녀의 눈동자에 의구심이 가득 차 있었다.
부스러기가 되기 전의 풀반지를 건드렸을 때, ‘어떤’ 느낌이 맞닿은 부분을 출입구로 삼아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오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그것이 정확하게는 무슨 느낌인지 로제타는 알지 못했다.
그게 도대체 뭔지, 생각이라는 것을 해 보기도 전에 풀 반지가 순식간에 바스라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대체 누가 이런 걸…….”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답답함에 자꾸만 입에서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렇게 습기가 가득 찬 날에 아주 살짝 건드렸을 뿐인데도 곧바로 바스라져 버릴 정도라면 만든 지 굉장히 오래되었다는 소리였다.
어느샌가 잠기운이 모조리 지워진 얼굴로, 로제타는 깊이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 바깥에서 번개가 친 모양인지 그녀의 방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그 강렬한 섬광에 놀란 로제타가 발코니 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머. 저걸 어떡하지?”
그녀의 목소리가 걱정으로 가득 물들었다.
두 개의 발코니 창 중 하나가 열려 비가 방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게다가 하필이면 때마침 사나운 바람이라도 불고 있는지, 고정이 되지 않은 쪽의 창문이 심하게 덜컹거렸다.
그리고 한 박자 늦게 커다란 천둥 소리가 귀를 먹먹하게 만들 정도로 크게 들려왔다.
깜짝 놀란 로제타가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커다란 소리가 가시고 난 뒤에야 그녀는 몸을 곧게 폈다.
놀란 심장은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녀는 발코니 창의 걸쇠가 제대로 걸려 있지 않음을 깨닫고 단단히 잠그기 위해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바깥의 상황이 더욱 눈에 잘 들어왔다.
비는 말 그대로 억수같이 퍼붓고 있었으며, 바람 또한 얼마나 강하게 부는지 정원수가 모두 한 방향으로 휘고 있었다.
로제타의 초록빛 눈동자에 근심이 어렸다.
“공작님은 괜찮으실까?”
테런이 아렌트를 떠난 지 벌써 닷새가 지나고 있었다.
그가 떠난 이후로 계속 이렇게 비가 많이 내리고 있는데 과연 무사히 길을 가고 있는지, 건강은 괜찮은지 걱정이 되었다.
물론 그녀 역시 테런이 비를 맞지 않으리란 것은 알고 있었다.
시찰단에서 체이스가 비를 불러오는 역할을 한다면, 테런은 비구름을 멀리 보내는 역할을 한다.
그러니 그들의 시찰은 실질적으로 큰 고비는 없을 터였다.
하지만 테런이 아무리 힘을 사용해 그들이 지나갈 길에서 비구름을 멀리 몰아낸다고 해도, 이미 젖은 땅은 물러졌을 경우가 컸다. 그렇기에 걱정을 지우기가 힘들었다.
“어디쯤 가셨는지 모르겠네.”
그녀는 재차 한숨을 삼켰다.
지금 자신이 테런의 걱정을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내 코가 석 자지.”
그녀는 헐렁한 잠금쇠를 단단히 걸고 커튼을 닫은 뒤 뒤돌아섰다.
테런과 정확한 약속을 나눈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 시찰이 두 사람 사이에 큰 변곡점이 되리라는 것을 로제타는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후우……. 그때, 결국 보셨던 거였어.”
로제타가 팔을 들어 올려 손바닥으로 목 뒤를 덮듯이 감쌌다.
그런 뒤 심란함을 추스르듯 크게 숨을 들이켰다.
「나중에, 시간을 들여서 느긋하게 이야기하죠.」
로제타는 수도를 떠나기 전, 테런이 마지막으로 했던 말을 떠올렸다.
테런은 이야기를 하자고 했으나 지금의 상태만 보자면, 로제타는 아무것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스스로도 제가 가진 반점이 무엇인지 짐작만 할 뿐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능력이 발휘된 것도 아니고 말이야.’
그러니, 테런의 앞에서 제대로 설명하기 위해서라도 무엇이든 하나는 확실히 알아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래서 로제타는 그가 시찰에서 돌아오기 전까지 나름대로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증명을 하나라도 끝내 놓고자 했다.
그편이 조금 더, 두 사람의 관계를 명확하게 만들어 줄 것이리라 생각한 까닭에서였다.
“레나가, 우기제라 할지라도 일주일 내내 비가 온다고 하지는 않았어. 5일은 비가 내리고, 이틀은 해가 난다고 했으니까…… 내일은 마을에 나갈 수 있겠다.”
그녀는 평민 지구로 나가 정보 길드에 들르고자 했다.
랭우드 후작가의 마지막에 대해서 조금 더 정확하게 알아보고자 함이었다.
이미 15년이나 지난 일이라 조사가 얼마만큼 자세하게 될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테런의 서재에서 확인한 서류들도 양은 방대했으나, 심도 있는 정보를 알아내기는 좀 무리였다.
“하지만 그래도 나 혼자서 전전긍긍해하는 것보단 더 제대로 된 정보를 찾을 수 있을 거야.”
로제타가 이곳 아렌트에 가진 연고라고는 테런과 클라리사, 레나, 다퍼스 자작 부인 정도가 전부였다.
그들 모두 테런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그들에게, 테런의 현재 약혼녀인 자신이, 그의 과거 약혼녀의 가문에 대한 일을 묻는 것은 도의적으로 힘든 일이었다.
그때 또 한 번, 커튼을 뚫고 밝은 빛이 그녀의 방을 가득 채웠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째 갈수록 점점 더 빗줄기가 사나워진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정말 내일 그치는 거 맞겠지?”
로제타는 영 믿기 힘들다는 듯 중얼거리며 습관처럼 두 이름을 입 밖에 소리 내었다.
“실프? 노아스?”
그런 뒤 가만히 숨을 죽였다.
방 안 어딘가에서 갑자기 불쑥 나타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기대를 배반하 듯 방 안은 잠잠했고, 커튼 너머 바깥에서 투둑,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실프도 실프지만, 특히 노아스로 추정되는 개의 모습을 한 존재는 그날 이후로 다시 나오지 않았다.
테런이 떠난 다음 날, 로제타가 일부러 우산까지 쓰고 토토의 무덤으로 가 보았지만 그래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내가 뭘 어떻게 해야 나올 거야?”
그녀는 아무도 제 말을 듣지 않고 있음을 알면서도 결국 볼멘소리를 입 밖에 꺼내 놓고야 말았다.
로제타는 머리 아프다는 듯 양손을 들어 올려 관자놀이를 짧은 간격으로 꾹꾹 눌렀다.
“실프. 노아스. 나와. 아무나.”
로제타가 한 번 더 두 정령의 이름을 말했다.
하지만 방 안은 여전히 아무런 변화 없이 조용할 뿐이었다.
조금씩, 부아가 치밀었다.
“실프든 노아스든 아무나 좀 나와 보라고!”
답답함에 화가 치밀어 목소리를 높였을 때였다.
똑똑.
“……응?”
어디선가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자칫 잘못하다간 빗소리에 묻혀 흘려들었을 만큼 작은 소리였다.
로제타는 숨을 죽인 채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다시 들려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잘못 들은 건가?”
그녀가 조금 긴장을 늦추려고 할 때였다.
똑똑.
또 한 번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결코,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똑똑.
두드리는 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그런데 소리가 들려온 것은 방문 쪽이 아니었다.
로제타는 소리를 쫓듯 선 자리에서 천천히 한 바퀴를 돌아가 이내 한곳을 바라보며 섰다.
노크 소리는 발코니 쪽의 유리창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일반적인 상식을 가진 방문객이라면 절대 방문하지 않을 쪽.
로제타는 경계하는 눈빛으로 천천히 발코니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창까지 가는 길에 촛대가 하나 보이기에 호신용으로 손에 꼭 쥐어 들었다.
어느새 커튼을 친 창문 가까이로 다가간 그녀가 심호흡한 후 왼손으로 커튼을 꼭 잡았다. 그런 뒤, 망설이지 않고 커튼을 확 젖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