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22화
불한당이 침입했을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에스테스 공작가의 보안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는 생각에서였다. 심지어 테런은 떠나기 전에 경비를 더욱 강화하라고 특별 지시를 내렸다고도 했다.
그리고 위협을 목적으로 한 침입이, 이토록 정중하게, 문을 열어 주기만을 기다린다는 듯이 반복해서 노크를 해 올 리는 없었다.
어쨌거나 커튼을 걷은 그 순간,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눈앞의 장면을 직접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그녀는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실프?”
-헤헤헤. 로제타. 오랜만이야아!
창밖에 실프가 뽀르르 날갯짓을 하며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조금 전까지 노크를 한 게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듯, 작은 손을 야무지게도 말아쥐고 유리창에 꼭 붙이고 있는 상태였다.
로제타는 서둘러 방 안을 둘러보았다.
소환에 응할 때마다 실프는 ‘핑-!’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그녀의 바로 옆이나 앞에서 나타났다.
하지만 오늘은 로제타가 소환해서 인간계에 나온 것이 아니다 보니 그런 소리가 나지 않은 듯했다.
로제타의 눈동자가 실프의 주변을 빠르게 살폈다. 등장과 동시에 덤처럼 함께 딸려 오는 포슬포슬한 빛 가루도 보이지 않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단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던 터라 로제타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녀가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사이, 바깥에서 실프가 칭얼거렸다.
-로제타아. 나 비 맞고 있는데에!
“아! 미안. 미안해. 바로 열어 줄게, 잠깐만.”
로제타는 허겁지겁 커튼을 마저 걷고 조금 전 단단하게 걸어 잠갔던 걸쇠를 풀었다.
창문을 열자 거친 비바람이 안쪽으로 밀어닥쳤다. 그 바람에 로제타가 입고 있는 네글리제가 젖어 버렸다.
그녀는 실프만 들어오면 곧장 창을 다시 닫을 생각으로 손에 걸쇠를 꼭 쥔 채, 하체만 뒤로 물렸다.
“어서 들어와.”
그렇게 거리를 벌려 주자, 바깥에 있던 실프가 열심히 날개를 움직이며 뽀르르 안으로 날아 들어왔다.
그런 뒤 마치 강아지가 털에 묻은 물을 털듯 고개를 힘껏 젓고 몸을 부르르 떨며 제게 묻은 빗방울들을 털어 내었다.
-푸에취!
“추워?”
로제타는 서둘러 숄을 뜨개질용 실뭉치처럼 동글동글하게 말았다.
쏟아 내고 싶은 질문은 산더미같이 많았으나, 일단은 실프의 몸을 따뜻하게 하는 게 먼저라는 생각에 부지런히 움직였다.
“실프, 이리로 와.”
실프는 순순히 로제타가 시키는 대로 다가왔고, 그녀가 자신을 위해 만들어 준 새의 둥지같이 생긴 숄의 오목한 부분으로 쏙 들어갔다.
실프는 그렇게 숄에 파묻혀 얼굴만 내놓은 채 해맑게 헤헤, 웃었다.
“이제 안 추워?”
-응! 고마워, 로제타!
“다행이네. 그렇다면…….”
로제타는 고개를 끄덕인 뒤 팔짱을 꼈다.
그런 뒤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실프를 내려다보았다.
-로제타. 왜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어?
“우리, 이제 얘기 좀 하자.”
-응? 얘기? 무슨 얘기?
전혀 짐작이 가는 바가 없다는 듯 실프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연신 고개를 갸웃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내가 그동안 몇 번이나 불렀는데 왜 나오지 않고 이제야 모습을 드러낸 거야?”
로제타의 목소리에는 서운함이 잔뜩 섞여 있었다.
-앗, 로제타 나를 찾았어?
“그래! 얼마나 찾았다고. 실프, 그동안 내 목소리 안 들렸니?”
-응! 안 들렸어!
실프가 정말 해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음…… 그래? 안 들렸다고?”
-응! 하나도 안 들렸어!
그 모습에 잠시 당황한 로제타는 말문이 막힌 듯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안 들려서 안 나왔다는데, 거기다 대고 어떻게 더 뭐라고 할 것인가.
게다가 자신의 목소리가 실프에게 들리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선 원론적인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 것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로제타의 결국 말을 얼버무렸다. 허리에 척하고 얹은 양팔도 힘없이 떨어져 버렸다.
-왜 그러는 거야, 로제타?
실프는 어느새 양손에 깍지를 끼고 턱받침을 한 채 똘망똘망한 눈으로 로제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 그럼 오늘은 어떻게 나온 거야?”
로제타가 당황한 티를 지우려고 노력하며, 목소리를 가다듬고 물었다.
“인간계로 나올 때 특유의 소리가 있잖아. 오늘은 그런 게 안 났어. 그리고 빛 가루도 보이지 않았고.”
-그거야, 당연히 로제타가 불러서 나온 게 아니니까!
“……뭐?”
로제타가 당황해서 목소리를 높여 되물었다.
-나는 오늘 심부름을 온 거야!
“심부름이라니? 누구의?”
-피르 님!
말인즉 로제타는 실프를 소환하는 것에 실패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침울해할 새가 없었다.
어쨌든 실프가 인간계에 나와, 그녀의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피르가 네게 뭘 시켰는데?”
실프가 신나서 재잘재잘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로제타에게 뭐 좀 갖다주라고 했어! 근데 로제타가 자고 있더라고? 그래서 베개 옆에 살짝 놔두고 잠깐 나갔다 왔는데 그사이에 문이 닫혀 버렸어!
짧은 새에 실프의 표정이 아주 다채롭게 변했다.
거기까지 말한 뒤, 실프는 무엇인가를 찾는 듯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내가 가져온 반지는 어쨌어? 안 보여.
“아……. 그거 실프가 가져온 거였구나.”
로제타가 미안하다는 듯이 눈썹을 아래로 내려트렸다.
“눈을 떴는데 보이더라고. 그래서 뭔가 싶어서 아주 살짝 건드렸는데, 그만 바스라지고 말았어.”
말을 마친 로제타는 곧장 화장대로 다가가 아까 손수건 위에 모아 두었던 부스러기를 가지고 왔다.
손수건을 실프의 앞에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되어 버렸는데…… 어떡하지, 실프?”
-그래도 안 버렸네! 그럼 괜찮아! 원래 로제타 거니까!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이게 원래 내 것이라니?”
실프는 종종 그랬듯 이번에도 로제타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제 할 말만을 이었다.
-그거 물에 개서 마셔!
“이걸 물에 개서 마시라고?”
로제타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손수건에 놓인 부스러기를 바라보았다.
“약초니?”
-아니야! 열쇠야!
로제타가 미간을 좁히며 눈을 가늘게 떴다.
누가 봐도 풀반지인 모양이었는데 실프가 왜 그것을 열쇠라고 칭하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실프는 거듭 말을 이었다. 조금 조바심이 난 것도 같았다.
-마시면 머리에 좋아! 그러니까 얼른 마셔!
솔직히 말해서, 로제타는 별로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실프가 계속해서 재촉하는 데엔 분명 무슨 이유가 있을 것 같아 마냥 사양하기가 그랬다.
‘혹시 잃어버린 내 기억에 무슨 도움을 주는 걸까?’
아마도 자신은 땅의 랭우드 자손일 것이다. 그렇다면 실프는 원래 제 정령이 아닌 셈이다.
어째서 어린 날 실프가 제 앞에 모습을 드러냈고 그 후로 종종 자신을 도와준 건진 모르겠지만, 이제껏 단 한 번도 제게 해를 끼친 적이 없었다.
로제타를 둘러싼 세상에서 가장 믿음직스러운 존재 중 하나가 바로 실프였기에 그녀는 결국 정령의 말을 따라 물 주전자를 들고 컵에 물을 반쯤 채웠다.
그런 뒤 손수건을 가져왔다. 하지만 차마 그것을 물에 타지 못하고 살짝 좁힌 미간을 한 채 다시 실프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거 정말 먹어야 해?”
-응! 꼭 먹어야 해!
실프가 이렇게까지 고집을 부리는 데엔 분명 연유가 있을 것이다.
‘그 이유를 납득가게끔 내게도 설명해 주면 좋으련만.’
하지만 말해 주지 않겠지.
오랜 경험으로 익히 알고 있었다.
로제타는 결국 한숨을 삼키며 손수건을 기울여 가루를 물잔으로 떨어트렸다.
가루는 덩어리지지 않고 녹듯이 곧바로 풀어졌다.
가루가 섞였음에도 컵 속의 물은 신기하게도 여전히 투명했다.
만약 색깔이 오염된 것처럼 탁했다면 거부감이 들어 음용하는 것을 망설였을 텐데,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다.
막말로 누군가에게 ‘그냥 물이야, 마셔 봐.’라고 속이고 건넨다 하더라도 아무도 모를 만큼, 겉으로는 깨끗한 물처럼 보였다.
로제타는 물잔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적어도 실프가 제게 독약을 건네주진 않았으리라.
그녀는 각오가 필요하다는 듯 숨을 들이켠 뒤 이내 얇은 유리컵의 가장 자리를 베어 물듯 입술에 가져다 대었다.
‘허브티를 마신다고 생각하자.’
그런 뒤 천천히 컵을 들어 올리며 입술을 열었다.
스미듯 조심스럽게 입 안으로 흘러들어 온 물은 이내 부드럽게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풀 부스러기를 섞었으나 전혀 텁텁하지 않았다.
목마르다고 느낀 적은 없는데, 마시면서 갈증이 채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로제타는 어느 순간부터 열중하며 물을 마셨다.
그러자 아주 짧은 간격으로 누군가의 모습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마치 눈을 감았다가 뜨는 것처럼 깜빡 깜빡, 아주 재빠른 속도였다.
‘그건…… 내가 얼마 전에 몇 번 보았던 소년의 잔상 같은데.’
마침내 물잔이 깨끗하게 비었다. 그러자 실프가 마구마구 손뼉을 치며 까르르 웃었다.
-다 마셨다! 잘했어, 로제타!
“후. 그래.”
로제타는 입술에 묻은 물기를 엄지로 살짝씩 훔치며 다른 손으로는 빈 컵을 사이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그사이 몸이 많이 따뜻해진 모양인지, 실프는 숄로 만든 둥지에서 빠져나와 다시 로제타의 눈높이까지 날아 올랐다.
-열쇠가 로제타에게 확실하게 돌아간 걸 확인했으니까, 난 이제 갈게!
“응? 벌써?”
로제타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가득 묻어 있었다.
하지만 실프는 볼일을 마쳤다는 듯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갈 거야! 로제타에게도 머지 않아 돌아올 거야. 원래 완벽히 돌아가려면 조금 시간이 걸리거든.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뭐가 말이니?”
하지만 실프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이럴 때의 실프는 로제타가 아무리 잡아도 더는 인간계에 머물러 주지 않았다.
하지만 모처럼의 기회를 이대로 순순히 보낼 수 없었던 로제타는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잠깐만, 실프! 너만 대답해 줄 수 있단 말이야. 내 질문 몇 개만 좀 받아 주면 안 되겠니?”
-뭐가 궁금한데?
“내가 어떻게 너랑 계약을 하게 된 거야?”
실프가 미간을 좁힌 채 팔짱을 끼고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으음, 그게 말이야. 설명하기엔 조금 복잡한데…….
“얘기해 줘. 내가 알아서 정리해 볼게.”
-난 실레스틴 님이나 피르 님처럼 원래 에스테스의 사람과만 계약되어 있어.
“응.”
-그런데 아주 옛날에 날 불러낸 사람이 로제타를 지켜 주길 원했어. 자기가 없을 땐 로제타를 지켜 달라고 했거든. 그래서 그렇게 이중 계약이 된 거야. 그런데 그 사람이 로제타의 이름을 말 안 해 주고 ‘그 아이’라고만 해서, 난 로제타를 만나기 전까진 이름도 몰랐어!
“그럼 내가 6살 때 클리프 남작가의 골방에서 널 만나기 전까지, 너와 난 만난 적이 없다는 소리야?”
-응!
“그러면 내가 어떻게 그동안 네 힘을 쓴 거야?”
-바람의 아이가 그러길 바랐으니까.
“뭐? 바람의 아이라면……?”
-응, 맞아! 테런이야!
로제타의 눈동자가 떨렸다.
짐작만 하고 있던 이야기가 이렇게 사실로 드러나다니. 얼떨떨하면서도 심장이 주체가 되지 않는 기분이었다.
에스테스 남매와 엮이기 전까진 당연히 자신이 특이하게 바람의 힘을 직접 다룰 줄 아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다 테런의 부탁으로 가능했던 일이었다니……. 감회가 새로웠다.
그런데 그때 실프가 바쁜 티를 내었다.
-로제타. 나 이만 돌아가 봐야 해!
단호한 실프의 태도에 로제타가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
“알았어. 대신 하나만 더 물을게. 실프, 내 목소리가 다시 너에게 닿으려면 어떻게 해야 해?”
그녀는 아까 실프가 제 목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고 한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랬기에 빨리 돌아가 버리기 전에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이렇게 맥없이 정령을 놓친다면, 다음엔 또 한참 동안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 걱정이 되었다.
본 김에 확답을 받아야겠다고 생각을 하며, 그녀는 재차 말을 건넸다.
“내 목소리가 다시 실프, 네게 닿으면…… 그럼 앞으로는 원래대로 나오는 거 맞지?”
그러자 실프가 도리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아니이? 안 나오는 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