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23화
로제타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 왜? 왜 안 나와……?”
실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왜 그것도 모르냐는 듯 바로 답했다.
-그거야 부탁받은 계약이 끝났잖아?
“뭐라고……?”
로제타는 멍하니 눈꺼풀만 깜빡였다.
그사이 실프가 특유의 악의는 없는 목소리로 천연덕스럽게 말을 이어 나갔다.
-내가 부탁받은 건 로제타가 힘들 때 옆에 있어 주는 것이었어. 하지만 로제타는 이제 힘들지 않잖아?
실프의 물음에 로제타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정령의 말대로 분명, 그녀는 더 이상 삶이 힘들거나 고되지 않았다.
그 시기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주 정확하게 꼽을 수 있었다. 바로 원작과 달리 에스테스 남매와 긍정적으로 얽히고 나서부터.
클리프 남작가에서 살았을 때보다 삶이 풍족해진 것은 물론, 더 이상 마음이 괴롭지 않았다.
선물처럼 찾아와 준 제 곁의 좋은 사람들 덕분에 로제타는 하루하루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좀처럼 입을 떼지 못하는 로제타의 모습을 보며, 실프가 확인받듯 한 번 더 힘주어서 물었다.
-행복하지, 로제타?
“……응.”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로제타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행복한데 왜 그렇게 대답해! 어깨랑 허리를 쭉 펴고! 당당하게 고개를 끄덕여!
그런 로제타의 행동을 실프가 짐짓 엄한 표정으로 꾸짖었다.
-로제타는 그 누구보다도 행복해져도 되는 사람이야.
실프는 나비처럼 그녀의 주위를 팔랑팔랑 날아다니며 말을 이었다.
-로제타의 행복을 오래도록 바라 온 사람이 있어. 그러니까 그 사람을 위해서라도 로제타는 자신의 행복에 대해서 조금 더 당당하게 굴어야 하는 거야.
로제타가 숨을 들이켰다.
실프의 말이 그녀의 정곡을 찌른 탓이다.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그녀는 아주 오래전부터 자신이 절대 행복해져서는 안 되는 사람처럼 여겨졌다.
클라리사를 만나고 난 뒤부터는 웃음이 늘었지만, 가끔씩은 불안했다.
‘어째서 그랬을까?’
그 이유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다만 마치 뇌리 깊숙한 곳에 그런 생각이 박혀 있기만 했다. 누군가 제게 그런 저주를 퍼붓기라도 한 것처럼.
그래서 로제타는 언제나 은연중에 자신이 느끼는 행복을 감추려고 했다.
이 세상 모든 불행을 저 혼자 끌어안고 있어야지만 비로소 안도가 된다는 듯, 그렇게 행동한 적도 있었다.
스스로, 자신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의 폭을 매우 좁게 한정을 지어 놓은 것이다. 아주 바보 같게도.
어느새 로제타의 머리 위로 한 바퀴 빙 돌아온 실프가 다시 그녀의 눈 앞에 멈춰 서서 제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지 마, 로제타. 나 정말 속상해.
걱정이 가득 묻은 실프의 목소리에 로제타는 살짝 떨어트렸던 시선을 다시 들어 올렸다.
그런 뒤 작게 숨을 들이켰다.
자신의 문제점을 찾았으니, 이제부터 그러지 않겠노라는 다짐을 새롭게 했다.
어쩌면 그녀의 진정한 행복은 지금부터 찾아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런 자신을 극복해 내는 것에서부터.
그때, 실프가 한 번 더 물어 왔다. 이번에는 제대로 대답하라는 것처럼.
언제나 저보다 어리게 느껴졌던 정령이, 처음으로 연상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로제타, 지금 행복하지?
로제타의 두 눈이 곱게 휘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열었다.
“응. 행복해. 무척. 그리고 앞으로도 더 행복해지고 싶어.”
그제야 실프의 얼굴에 웃음기가 번져 나갔다.
-응! 그러니 계약은 소멸이고 나는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간 거야!
“실프. 그럼 이제 우리는 못 봐?”
-으음. 그건 모르겠는데에.
실프가 씩씩하게 말하다가 이내 미소 지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로제타. 로제타도 얼른 네 자리로 돌아가.
“내 자리라니…….”
하지만 실프는 언제나 그랬듯 정확한 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실프는 아주 큰 비밀을 알려 준다는 듯 로제타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조만간 좋은 일이 있을 거야.
로제타의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그녀가 두 손을 모아 얼굴 높이까지 들어 올리자, 실프가 뽀르르 날아와 그 위에 안착했다.
자신의 오랜 친구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로제타는 작게 말했다.
“실프. 건강해야 해.”
-로제타도 건강해야 해.
눈시울이 자꾸만 뜨거워진다.
하지만 로제타는 그 감각을 꾹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프가 그녀의 손바닥에 대고 앉았던 몸을 일으켜 다시 허공으로 날아 올랐다.
로제타는 가만히 눈을 감았고, 정령은 그런 그녀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계속, 계속 행복해야 해. ……로제.
희미해지는 목소리를 끝으로 더 이상 실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로제타는 천천히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실프는 더 이상 이곳에 없었다.
그저 정령이 잠깐 머물고 갔다는 것을 알리듯 반짝이는 빛 가루만 희미한 빛을 내며 포슬포슬 떨어져 내리고 있을 뿐이었다.
* * *
국경 시찰이라고는 했으나 시찰단이 들르는 곳은 사실상 한 영지가 전부였다.
남부의 콘웰.
왕국 최대의 곡창 지대가 있는 것과 동시에 타국과의 국경이 인접한 영지였다.
테런과 시찰단은 콘웰의 마을 여러 곳을 돌아다녔고, 지극한 환대를 받았다.
그리고 수도를 떠난 지 열흘 만에 테런과 시찰단은 가장 마지막 목적지에 다다랐다.
긱스가 자신이 탄 말을 몰아 테런의 흑마에 가깝게 붙이며 속삭이듯 말했다.
“저곳이 카르나 마을입니다.”
“카르나…….”
테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침음을 삼키듯 아주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되뇌었다.
전방을 주시하자 허름한 성벽이 눈에 들어왔다.
콘웰 영지는 양극화 현상이 가장 심한 곳 중 하나였는데, 영주의 성에 가까운 장원일수록 치안이 괜찮았고 멀수록 빈곤의 극치를 달렸다.
그중에서도 가장 상태가 좋지 않은 곳이 바로 저 카르나 마을이었다.
테런의 인솔하에 시찰단은 곧바로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카르나 마을은 이번 시찰 중 가장 많은 일정을 할애한 장소였다.
재난에 취약한 곳이니만큼 관리자인 체이스와 테런이 직접 살피며 우기로 인한 피해가 없도록 보살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카르나의 주민들은 다른 마을 사람들과 달리 시찰단을 열렬히 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멀거니, 혹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그들과 거리가 가까워지면 마지못해 예를 취한다는 듯 허리를 숙일 뿐이었다.
테런은 그들의 마음을 이해했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 힘든 그들에게, 우기로 인해 세차게 내리는 비는 방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카르나의 주민들이 이번 우기로 얻게 될 직접적인 이득은 아무것도 없으리라.
그들 대부분은 하루 일당을 받으며 일하는 처지였다.
“숙소는 이곳입니다.”
시찰단을 마중 나왔던 촌장이 그들을 가장 큰 여관으로 안내했다.
“너무 누추해서…… 죄송합니다. 왕자님, 각하.”
“괜찮네. 신경 써서 준비해 준 곳이지 않은가?”
이때껏 들른 다른 마을에 비하면 허름하기 그지없었지만, 이곳이 카르나에서 가장 좋은 곳임을 알기에 테런과 체이스는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았다.
상전들이 입을 꾹 다무니 아랫사람들 역시 불만을 쏟아 낼 수 없었다.
테런은 곧장 흑마에서 내렸다. 그런 뒤 고생했다는 듯 제 말의 목덜미를 툭툭 가볍게 두드렸다.
체이스를 먼저 안으로 들여보내고 난 뒤, 테런은 긱스에게 명을 내렸다.
“긱스. 사람을 좀 풀어 보게. 피르에게 듣기로 아버지께서 나흘 전부터 이 마을에 묵고 계시다고 하더군.”
“알겠습니다. 곧바로 제임스 님을 찾아보겠습니다.”
테런이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그리고 그때, 누군가 그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럴 필요 없다. 직접 왔으니까 말이야.”
테런에게 하대를 하는 중후한 목소리. 너무도 낯익은 그 음성에 테런이 뒤를 돌아보았다.
중년의 남성이 제 앞에 서 있었다.
희끗희끗했지만 원래는 저처럼 새카만 머리 색을 가지고 있었을 것을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그는 뒤로 깔끔히 머리카락을 넘긴 상태였다. 그 덕에 연륜이 새겨지기라도 했다는 듯 서너 줄의 깊은 주름이 길게 자리 잡은 반듯한 이마와 짙은 눈썹이 드러났다.
그 얼굴을 보며 테런은 생각했다.
아마 자신이 나이가 들면 저런 모습이 되지 않을까.
또 하나의 자상한 피콕블루색 눈동자가 그를 보며 휘어진다.
“오랜만이로구나, 테런.”
그런 그를 향해 테런은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건강하신 모습을 뵈니 기쁩니다. 아버지.”
* * *
테런의 의복이나 생활용품은 대부분 집사 와튼의 지시 아래 사용인들이 챙겼다.
하지만 그가 직접 챙긴 것이 딱 두 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로제타가 선물한 붉은 타이였고, 다른 하나는 카지노 칩이었다.
그것 역시, 로제타에게서 선물 받았다면 받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생각할 일이 있으면 테런은 그 칩을 손안에서 굴리고 있었다.
오늘 역시, 그는 여관 1층의 펍에 앉아 칩을 만지작댔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비어 있던 그의 맞은편에 제임스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왕자님은?”
“먼저 씻고 싶으시답니다. 저녁은 방으로 올려 드리기로 했어요.”
“그렇군.”
제임스는 고개를 끄덕인 뒤 점원이 제게 내민 물수건을 받아 손을 닦았다.
손가락 사이사이를 훔치며, 테런을 흘깃댄 제임스가 아들의 손에 쥐어진 것을 확인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테런안 보는 사이에 도박에 취미를 들인 것이냐?”
“그런 것 아닙니다.”
하지만 그의 부정에도 제임스는 쉽사리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그리고 결국 한마디 더 경고의 말을 보탰다.
“하지 마라.”
나직한 경고에 헛웃음을 터트린 테런이 이번엔 고개까지 저었다.
“아니라고요. 이건 그냥 선물 받은 겁니다. 답례로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테런은 칩을 굴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시선이 손에 쥔 칩으로 가 달라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계속 그렇게 쳐다보면 로제타의 얼굴을 볼 수도 있다는 듯이.
“별 희한한 답례를 다 보겠구나.”
제임스는 물수건을 접어서 한쪽으로 치워 뒀다.
그가 냅킨을 펴 드는 것과 동시에 식탁 위에 따끈한 김이 폴폴 올라오는 양파 수프가 차려졌다.
“맛있겠군.”
제임스는 바구니에 담겨 있는 겉이 조금 마른 빵을 스스럼없이 집은 뒤, 갈기갈기 잘라 수프 안에 넣었다.
그런 뒤 빵에 수프가 잘 스며들 수 있도록 휘휘 저었다.
마침내 한술 뜬 그는 맛을 음미하기라도 하듯 눈을 지그시 감고 만족 스럽다는 듯 ‘음.’ 하는 소리를 내었다.
그때, 테런은 칩을 굴리는 것을 멈추고 손에 꽉 쥐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버지. 저 약혼했습니다.”
테런은 어제 있었던 일을 말하듯 담담하게 이야기했으나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렇지를 못했다.
막 수프를 한 입 먹으려 스푼으로 뜬 제임스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스푼은 힘없이 떨어졌고, 식탁에 부딪힌 충격으로 그 위에 뜬 양파 수프가 사방으로 튀었다.
테런은 그 자국을 살짝 좁힌 미간으로 바라보았다.
그사이 제임스가 더듬더듬 되물었다. 얼굴에 도저히 방금 전 자신이 들은 말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뭐를 했다고?”
“약혼이요.”
“약혼? 네가?”
뭐지, 저 업신여기는 것 같은 표정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