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24화
테런은 기분이 살짝 나빴지만 꾹 참으며 대답했다.
“예. 제가요.”
맞다고 확인시켜 주듯 고개를 끄덕여 주는 것은 덤이었다.
제임스의 입술이 바보처럼 벌어져 있었다.
한참 만에야 제임스는 자신의 얼빠진 표정을 수습한 뒤, 놓친 스푼을 다시 쥐며 혀를 찼다.
테런에게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으나 그 나름대로 몇 단계의 사고를 거쳐 짐작 가는 결론을 내린 듯했다.
“어머니께 들들 볶이다가 결국 그렇게 되었구나.”
그러니까- 그의 머릿속에 그려진 시나리오는 테런이 대부인과의 기 싸움에서 져 등 떠밀려 내키지 않는 약혼을 했다는 것이었다.
“아닙니다, 그런 것.”
“그러니 그만 수도로 올라오십시오. 결혼식에 참석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제임스의 뚱한 대답이 돌아왔다.
“약혼도 아비 없이 하였는데, 결혼은 왜 챙기누.”
뒤늦게 소식을 알렸다는 투정 어린 말이었지만 테런은 굳이 달래 주려 하지 않았다.
잠시 침묵이 살그머니 부자의 사이에 내려앉았다.
테런이 말을 이었다.
“아버지께서 얼굴을 비치지 않으시면, 그녀가 또 여러 가지 험한 말을 들을까 걱정이 되어서 그렇습니다.”
그 순간 제임스는 먹는 것을 중단하고 아들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더없이 진중한 표정을 마주한 그는 조금 놀라고 말았다.
“진심이구나.”
테런은 말을 아끼듯 잠시 입술을 물고 있다가 이내 풀었다.
그런 뒤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게 되어 버렸네요.”
제 아들의 인정에 제임스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올라가야지. 마음만 같아선 지금 당장 올라가고 싶구나. 넌 천천히 올래? 아비가 먼저 가 있으마. 미리 친해져 있는 것도 좋을 테니 말이다.”
“그냥 저랑 같이 올라가시면 됩니다. 미리 가셔 봤자 그녀가 부담스러워할 뿐이니까요.”
“녀석. 벌써부터 싸고도는 게냐.”
말로는 타박을 하고 있지만, 이러한 아들의 변화가 퍽 기꺼운지 제임스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는 상태였다.
랭우드의 아이가 세상에서 사라지고 난 뒤, 제 아들이 15년이라는 긴 시간을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그 누구보다도 제임스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이 집안 남자들의 내력인지, 에스테스 공작가의 사람들은 평생 단 한 명만을 사랑했다.
제임스는 아내와 해로하지는 못했으나 적어도 30년 가까이를 살았다.
하지만 테런은 아니었다.
아주 어린 시절 마음에 담은 단 한 명을 너무도 허망하게 잃어버렸다.
그때 제임스는 제 아들이 다시는 누구를 사랑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에스테스의 남자들은 그러하기에.
하지만 이렇게 제게 담담히 약혼 소식을 들려주는 아들의 모습을 보자 참 다행이다 싶었다.
식사 따위는 이제 뒷전이라는 듯 제임스는 스푼을 완전히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런 뒤 팔짱을 낀 채 흥미로운 얼굴로 제 아들을 바라보며 본격적으로 대화를 시작하자는 뜻을 내비쳤다.
“예비 며느리는 어떤 아가씨냐?”
“일단은…… 에스테스의 가신인 클리프 남작의 여식입니다.”
“일단이라니? 그리고 그게 무슨 소리냐? 클리프 남작에게 여식이 있었다고……?”
기억을 더듬기라도 하려는 듯 제임스가 미간을 찌푸린 채 제 아래턱을 쓸듯이 만졌다.
그사이 테런이 설명을 보충하듯 입을 열었다.
“그리고 붉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순간 제임스의 행동이 우뚝 멈췄다. 그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드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가 이내 분노 어린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테런…… 너……!”
“걱정하시는 그런 이유로 그녀와 함께하고자 함이 아니니 훈계는 마십시오.”
테런은 피로하다는 낯으로 손으로 눈썹 근처를 매만지며 한숨을 삼켰다.
앞으로 제 전 약혼녀를 아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이렇게 변명해야 하는가 싶어 조금 아득한 마음이었다.
테런은 작게 숨을 들이켠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아버지. 사실 여쭤볼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테런은 잠시 주저하다가 제임스 쪽으로 살짝 상체를 기울였다.
제임스도 얼떨결에 그를 따라 귀를 기울이자 그제야 테런이 어렵사리 입을 떼었다.
주위의 다른 이들이 듣지 못하도록 목소리를 한껏 낮춘 채였다.
“아버지께서는 혹시…… 랭우드의 후계자가 힘을 각성하는 방법을 아십니까?”
* * *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방 밖이 아니라 커넥티드 룸 쪽에서였다.
거울에 비치는 제 모습을 살펴보고 있던 로제타는 곧바로 허리를 바로 펴 문 쪽으로 다가갔다.
문을 열자 클라리사의 방에서 레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준비는 다 되셨어요?”
“다 되었어요. 클라리사는요?”
로제타는 질문과 동시에 레나의 뒤를 넘겨다보았다.
클라리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저절로 고개가 기울여졌다.
“전 여기 있어요!”
모처럼 보는 밝은 모습에, 로제타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클라리사도, 레나도, 그리고 로제타도 모두 외출복 차림이었다.
“그럼 바로 내려가시죠.”
클라리사가 레나와 로제타 사이에 쏙 들어와 양쪽으로 두 여자의 손을 잡았다.
세 여자는 보기 드물게 환한 얼굴로 1층에 내려왔다.
로제타는 오랜만의 외출에 신이 난 기색이 역력한 클라리사를 보며 안도했다.
아이가 최근 부쩍 침울해하는 눈치였기 때문이다.
좋은 친구를 떠나보낸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가, 최근 계속 비가 오며 날이 어두웠다 보니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기가 왕국민들의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중요한 행사라는 것을 머릿속으로는 이해하고 있었지만, 기분이 처지는 것은 별개였다.
세 여자는 마차가 준비되었다는 말에 곧장 밖으로 나왔다.
실내와 실외, 고작 현관문 하나만 사이에 두었을 뿐인데도 공기가 달랐다.
로제타의 코끝으로 물에 젖은 싱그러운 풀잎 향이 훅 끼쳤다.
로제타는 새삼 경탄스러웠다.
분명 새벽녘까지 창문을 때리는 거센 빗소리를 들었던 터였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아침이 되자마자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먹구름이 살짝 걷히고 그 사이에서 빼꼼 해가 제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푸른 잎에는 저마다 빗방울이 맺혀 있었는데, 그것들이 햇살에 부딪혀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정말 비가 그칠 줄은 몰랐네요. 모처럼 해를 보니 좋아요.”
“우기라고 계속 비만 내리는 건 아니거든요.”
레나가 대답함과 동시에 물었다.
“클리프 남작가에서 머무르실 때도 우기는 진행했던 것으로 아는데…… 혹시 모르셨나요?”
“아. 그땐 세상 돌아가는 일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거든요.”
로제타가 씁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에스테스 영지, 특히나 클리프 남작가에서 살 때는 우기가 뭔지도 잘 몰랐다.
물론 남작가의 일원들이 자기들끼리 떠드는 것을 얼핏 들은 기억이 나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외출을 할 수 없었기에 로제타는 그것이 어떠한 행사인지 잘 알지 못했다.
무엇보다 비가 내리면 아무리 주말이어도 신전에 갈 수 없었기에 로제타는 비 오는 날을 아주 싫어했었다.
“안녕하십니까. 마차는 준비되었습니다.”
마차에 가까이 다가가자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한스였다.
그가 로제타와 클라리사를 보며 쓰고 있던 납작한 모자를 벗어 배꼽 근처에 가져다 대었다.
“한스. 오랜만이네요. 잘 지냈어요?”
아는 얼굴이라고 로제타가 반가워하며 그에게 정답게 인사를 건넸다.
“에스테스 파크로 다시 내려가지 않고,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아, 예. 예…… 그렇게 되었습니다. 배려해 주신 덕분에…….”
한스는 어딘가 정신이 없어 보였다.
에스테스 파크에서 처음 봤을 때도 솔직히 산만한 사람이구나 싶었는데, 몇 달이 지났어도 그런 면은 여전하구나 싶었다.
“한스를 조금 더 챙겼으면 좋았을걸. 나도 이곳에 적응하느라 바빠 여유가 없었네요. 내 무심함을 용서해요.”
“……별말씀을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오히려 감사합니다.”
한스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
“오늘도 제가 모시겠습니다.”
로제타가 클라리사와 눈빛을 교환하고는 이내 눈가에 웃음기를 매달고 한스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심하고 나갈 수 있겠군요.”
로제타의 말에 한스는 이상하게도 시선을 피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데 한스, 무슨 땀을 그렇게 많이 흘려요? 어디 아픈 거 아니에요? 그렇다면 굳이 우리를 수행하지 않아도…….”
“아, 아닙니다! 이건 그냥 세 분 오시기 전에 좀 격하게 움직였다 보니 몸이 달아올라서……. 제, 제가 충분히 마차를 몰 수 있습니다.”
“그래요……?”
“예, 예. 잘 모시겠습니다. 일단 타시지요.”
말을 돌리듯 한스가 냉큼 마차 문을 열었다.
로제타가 잠시 이상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다가 클라리사의 등을 살짝 밀며 먼저 태웠다.
그다음에 객차에 오르는 것은 레나였다.
맨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로제타는 한스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한스. 와튼에게서 행선지는 들어서 알고 있겠죠?”
그 순간 한스의 목울대가 크게 꿀렁였다. 그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로제타는 이틀 전 와튼을 통해 수도에서 제일가는 정보 길드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생각지도 못한 목적지를 들었는지 와튼은 잠시 당황해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곧바로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돌려주었다.
「마크 앤 홉스라는 정보 길드가 가장 정보력이 좋습니다. 귀족들도 많이 이용하는 곳이죠. 신속, 정확합니다.」
「좋네요. 주말에 그곳을 이용할까 해요.」
「……준비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조용히.」
원래는 혼자 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클라리사 때문에 계획이 조금 틀어졌다.
최근 무척 우울해하는 아이의 상태가 마음에 걸린 탓이다.
식사도 깨작깨작 기운 없이 하던 클라리사를 안쓰럽게 보던 로제타는 결국 아이에게 주말에 함께 외출하자는 말을 꺼냈다.
물론 모든 일정을 함께할 수는 없었다.
클라리사를 정보 길드에 데리고 가는 것은 교육 및 정서상 안 좋으리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래서 예상치 못한 동행인이 한 명 더 늘었다. 바로 레나였다.
그녀 역시 테런을 따라 시찰을 간 긱스 때문에 최근 외로웠던 모양인지 로제타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였다.
「클라리사. 레나와 함께 인형 가게를 둘러본 뒤, 지난번에 우리가 함께 갔던 카페에 있으면, 내가 볼일을 보고 난 뒤 합류할게.」
모든 일정을 함께할 수 없음에 클라리사는 조금 아쉬워했으나, 따라가겠노라고 고집은 부리지 않았다.
대신 빨리 합류하라고 새끼손가락을 들어 올려 약속을 종용했다.
로제타는 웃으며 아이의 손가락에 제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로제타는 행여 제 목소리가 객차 안에 들릴까 봐 잔뜩 낮춰서 말했다.
“제가 오늘 어디서 내렸는지는 앞으로도 클라리사와 할머님께선 모르셨으면 해요.”
“예, 영애. 명심…… 하겠습니다.”
한스의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로제타가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녀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눈빛으로 잘 부탁한다는 마음을 다시 한 번 전한 뒤 객차에 올랐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흔들리는 눈동자로 잠시 바라보던 한스가 이내 마차 문을 닫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마부석으로 향하기 위해 뒤도는 그의 얼굴이 사뭇 딱딱하고 긴장이 어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