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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애 옆에 예쁜 애-127화 (127/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27화

“으윽…….”

로제타는 짧은 신음을 흘리다 정신을 잃었다.

축 늘어진 그녀의 몸을 뒤에서 누군가 안아 들었다. 패트릭이었다.

곧바로 그들의 앞에 아무런 문장도 없는 작은 마차가 한 대 섰다.

패트릭은 자신을 따라온 수하들을 향해 고갯짓하며 말했다.

“출발하지.”

“예!”

패트릭은 로제타를 마차에 구겨 넣다시피 태웠다.

그런 뒤 얼빠진 얼굴로 멍청하게 서 있는 한스에게 짜증스럽게 말했다.

“뭐 하고 있나? 어서 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간 의심받게 될 걸세.”

“예? 예, 갑니다. 지금 가요.”

뒤늦게 정신을 차린 한스가 패트릭을 따라 마차에 올랐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마차가 빠른 속도로 마크 앤 홉스 건물 뒤편에서 멀어졌다.

* * *

“이것 참.”

테런이 곤란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미간은 분명 좁아져 있는데 입술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얼마 전 보았던 로제타의 목덜미의 반점을 떠올리려고 했을 뿐인데, 자꾸만 그녀의 웃는 얼굴이 생각나고야 말았다.

“나도 참 중증이군.”

그는 제 방의 침대에 털썩 드러누우며 눈가를 팔로 덮었다.

입꼬리는 계속 호선을 그리고 있는 채였다.

이 시간이 그리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좋았다. 한결 느긋하게 로제타의 웃는 얼굴을 떠올릴 수 있으니까.

“보고 싶다.”

일부러 소리 내어 본 말은 그의 심장을 더운 기운으로 감쌌다.

로제타와 떨어져 있게 된 지 며칠 안 되었지만, 테런은 갈수록 확신이 들었다.

정말로, 제 마음이 로제타에게 강하게 끌리는 것을.

그리고 자신이 누군가의 손을 잡고 미래를 걷는다면, 그건 바로 로제타일 것이라고.

그러하기에, 어쩌면 그녀가 진짜 누구인지는 이제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이 마음을 어서 빨리 로제타에게 전하고 싶었다.

하지만 테런의 미소는 그렇게 오래 가지 못했다.

저녁 식사 시간, 아버지인 제임스에게서 제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랭우드의 후계자가 힘을 각성하는 방법을 알고 계십니까?」

「갑자기 그건 왜?」

「세간에 전혀 전해지지 않고 있더군요. 그저 성년이 된 후계자의 신체 한 부분에 표식이 나타난다는 것만 알려져 있을 뿐.」

「그렇지.」

「아버지는 랭우드 후작님과 친분이 두텁지 않으셨습니까? 그러니 알고 계시다면 부디 알려 주십시오. 랭우드의 후계자가 어떻게 각성하는지 궁금합니다.」

제임스는 어째서 갑자기 그런 것을 묻는지, 그 이유에 대한 설명은 차치한 채 그저 아이처럼 떼를 쓰듯 보채는 테런을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그러다 결국 길게 한숨을 내쉬며 떨구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나는 알고 있지. 아니, 정확하게는 나도 알고 있는 것이지만.」

「그 방법을 아는 다른 사람들도 있습니까?」

「4가문의 수장들은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저는 몰랐습니다.」

「네가 가주가 되었을 땐 이미 랭우드가 멸문한 뒤니까.」

이 주제는 부자에겐 무거운 대화 주제일 수밖에 없었다.

테런에게 로제가 첫사랑이었다면, 제임스에게 랭우드 후작은 절친한 친구였으니까.

「네가 어째서 갑자기 그런 것을 묻는 건지는 모르겠구나. 하지만 이유가 있겠지. 아는 대로 설명해 주마.」

「감사합니다.」

「전제 조건은 알고 있겠지?」

「예. 후계자의 나이가 성년에 즈음 할 것, 신체에 표식이 나타날 것.」

「그래, 맞다. 그 조건들이 충족되면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로 각성할 수 있다고 하더구나.」

「그게 무엇입니까?」

테런은 귀를 기울였다.

「첫 번째는 아주 쉬운 일이지. 정령, 그러니까 노아스의 부름을 듣고 답을 하는 것이지. 땅의 정령과 쌍방향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되면 아무런 문제 없이 후계자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두 번째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두 번째는…….」

제임스는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하다가 무겁게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마지 못해 입을 열었다.

「죽을 위기에 처하게 만드는 것이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죽을 위기라고 하셨습니까?」

제임스의 대답은 정말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테런은 방금 들은 말을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몇 번이나 되물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제임스는 제 아들에게 무겁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테런은 아연한 얼굴을 하고선 질문을 이어 나갔다.

「어째서 그렇게 극단적입니까?」

「정령을 다룰 수 있는 힘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은 막혀 있는 상태라고 하더구나. 그렇기에 힘을 운용할 줄 모르는 후계자를 극한의 상태까지 내몰아, 가지고 있는 힘을 터트리듯 깨닫게 만들어 각성하는 방법을 사용한다고 들었다.」

제임스는 스푼을 놓고 두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다 너무도 심각한 제 아들의 표정을 보고, 걱정하지 말라는 듯 뒤늦게 설명 하나를 덧붙여 말했다.

「하지만 후자의 방법은 지난 7대에 걸치도록 단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다고 알고 있다. 지금까지의 후계자들은 모두 가주의 직계손이었고, 이미 노아스를 다룰 줄 아는 제 아버지나 어머니와 함께 지내다 보니 정령의 힘에 많이 감응되어, 성년식 때 노아스가 부르면 전부 대답을 할 수 있었다고 하더구나.」

아무런 대답 없이 그저 듣고만 있던 테런은 마치 누군가가 제 목을 조르기라도 하고 있다는 것처럼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만약 후계자가 가주의 힘에 동화되지 않은 채 살았다고 가정한다면, 힘을 각성하는 방법은 후자밖에 없겠군요.」

「그거야 그렇지. 그런데 테런, 이제 와 이런 이야기가 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테런은 고집스럽게 입술을 다물었다. 사실은 어떤 생각에 잠겨 있었던 거였지만, 제임스의 눈에는 다르게 비친 듯했다.

「테런. 랭우드 후작가의 일을 왜 묻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아비의 생각은 그렇다. 이제 그만 그 아이를 잊고 네 약혼녀에게 집중하렴. 어쩌면 그 아이도 그것을 원할 게다.」

“후…….”

제임스와의 대화를 모두 복기한 테런이 묵직한 한숨을 길게 몰아 내쉬었다.

그는 마치 손이 저리기라도 하다는 듯 주먹을 꽉 쥐었다가 풀어내며 작게 중얼거렸다.

“아직 아무것도 몰라. 그러니 속단하지 말자.”

일부러 소리를 낸 것은, 그렇게라도 하면, 이 불안함이 조금은 가실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점점 밤은 깊어 갔으나 테런의 정신은 갈수록 말똥해졌다.

머리가 복잡해질수록 단 하나의 얼굴만 또렷하게 떠올랐다.

“아. 진짜 보고 싶다.”

로제타에 대한 그리움에 도무지 잠을 못 이룰 것 같았다.

그렇게 테런은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반주 삼아서 침대에 한참을 그저 가만히 누워 있었다.

* * *

뺨에 서늘함이 달라붙어 있었다.

“으…… 윽.”

로제타의 퍼석한 입술을 가르고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뒤질 수 없다는 듯 곧바로 머리가 찡하고 울리며 강렬한 두통이 일었다.

로제타는 눈을 감은 채로 미간을 좁혔다.

눈꺼풀을 들어 올리려고 노력했으나, 마치 풀을 발라 놓은 것처럼 아래위가 맞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하아.”

그뿐만 아니라 온몸이 뻐근하기도 했다. 그 이유가 자신이 엎어지듯 누워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짐작하는 덴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기지개를 켜 보려고 했으나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 이게 뭐야?”

그녀는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쇳소리 섞인 제 음성이 상당히 낯설게 느껴졌다.

로제타는 자신이 결박당해 있음을 깨달았다. 두 손은 뒤로 돌려진 채 구속되어 있었고 발목 역시 맞붙인 채 꽁꽁 묶여 있었다.

“윽, 대체 누가 이런 거야?”

로제타는 몇 번이나 몸부림쳤으나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신체의 자유를 잃었다는 것에 대한 당황스러운 마음과 다급한 마음이 뒤섞여 그녀는 억지로 눈을 떼었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자신이 손발만 묶인 것이 아니라, 눈에도 가리개가 둘러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체 누가…….’

위기감에 입이 바싹 말랐다.

이런 상황일수록 침착해야 한다고는 생각이 들었지만, 신체가 구속되고 앞이 보이지 않자 불안함이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로제타는 일단 숨을 들이켠 뒤 가만히 소리를 내었다.

“한스? 한스, 이곳에 있어요?”

한참 대답을 기다려 보았으나 되돌아오는 목소리가 없었다.

로제타는 이곳이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자기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자꾸만 거세게 뛰는 심장을 무시하고 정신을 잃기 전까지 있었던 일들을 하나씩 되짚어 보았다.

‘정보 길드에 엄청 큰 불이 났고, 한스가 갑자기 뛰어 들어왔어. 마크와 한스, 그리고 내가 뒷문으로 빠져나왔는데…….’

연기를 들이마셔선 안 된다는 생각에 그녀는 내내 상체를 숙인 채 바닥과 마크의 뒤꿈치만을 보고 걸음을 옮겼었다.

그리고 괜찮다는 말에 몸을 바로 세우기가 무섭게 맥없이 바닥으로 떨 어지는 마크를 바라보았다.

그 모든 일은 찰나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순식간에 벌어졌다.

‘마치 우리가 나오길 기다리고 준비했다는 양.’

로제타가 아랫입술을 슬그머니 말아 물더니 치아로 지그시 눌렀다.

뒤늦게 모든 상황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식 출입문 쪽으로 들어온 한스가 어떻게 뒷문 쪽에 불길이 별로 번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애초에 그걸 알고 있었더라면 안전한 쪽으로 들어와 자신을 구해야 하는 것이 맞았다.

또한 공작가의 호위 기사들 역시, 함께 들어와야 함이 옳았고.

그때 당시에 불을 보고 놀라, 어서 그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깊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이상해 자꾸만 의문을 품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희미하게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단차가 느껴지는 소리였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 청력에 더욱 의지하게 되어 더 잘 들리는 것만 같았다.

발걸음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고, 이내 끼이익, 녹슨 경첩이 서로 맞물리며 듣기 싫은 소리를 자아냈다.

문이 열린 모양인지 이곳에 고여 있던 바람이 쏜살같이 빠져나가며 로제타의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로제타는 온몸에 힘을 쭉 빼고 물고 있던 입술도 풀었다.

그런 뒤 가만히 숨을 죽인 채 더욱 귀를 기울였다.

“아직 안 일어난 것 같아요.”

“젠장. 도대체 어딜 때려서 데리고 왔길래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는 거야?”

들리는 목소리로 짐작건대, 그녀를 찾아온 이는 총 두 명. 중년 남성과 여성이었다.

‘누구지?’

어딘가 낯이 익은 것도 같은 목소리라 로제타는 더욱 숨을 죽인 채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에 집중했다.

다시 입을 연 것은 남자였다.

“차라리 잘됐어. 제정신이었다면 반항이나 했겠지. 당신이 우선 저 아이에게 가서 몸에 반점이 나타난 곳은 없나 찾아보도록 해.”

남자의 말에 여자가 가볍게 한숨을 쉬는 목소리가 들렸다.

여자가 마지못해 걸음을 뗐다.

눈가리개를 하고 있어도, 제 앞에 더 어두운 새카만 그림자가 지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역시나 곧 여자의 손이 그녀에게 닿았고 몸 이곳저곳을 들추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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