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28화
우선은 피부가 드러난 부분을 중점적으로 살펴보는 것 같았다.
“찾았어요. 목 뒤에 초승달 반점이 있네요.”
“역시. 나타났군. 그럴 줄 알았어.”
남자는 이 상황이 기꺼운 것인지 아니면 마뜩잖은 것인지 혀를 짧게 차며 중얼거렸다.
남자도 로제타 쪽으로 다가오는 듯했다.
여자가 한숨을 쉬며 물었다.
“이제 저 아이를 어떻게 할 건가요?”
“몇 번이나 설명했지 않나? 힘을 일깨워 이용하겠노라고 말이야.”
“나도 당신에게 몇 번이나 설명했지만, 내키지 않아요. 내겐 원수 같은 이 아이를 결국 내 손으로 랭우드의 진정한 후계자로 만드는 것 같아서 말이에요.”
어딘가 뾰로통한 여자의 말에 남자는 퍽 재미난 소리를 들었다는 듯 킬킬거리기 시작했다.
“뭐가 그렇게 우습죠?”
“당신은 몰랐겠지만, 이 아이가 15년 전 그날, 죽었다고 한들 당신 아들이 랭우드의 주인이 될 가능성은 희박했어.”
“뭐…… 라고요?”
“오! 오해하지는 말라고. 희박할 뿐 가능성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으니까. 자네의 아들은 선대 랭우드 후작의 아들이 아니었지 않나.”
“하지만 그 애도 랭우드의 피를 이었어요. 내 남편이 랭우드 후작의 동생이었으니까요! 당신도 알 텐데요!”
젤다가 고집부리듯 목소리를 높였다.
“이봐 젤다. 당신, 랭우드의 후계자가 각성하는 방법에 대해선 모르지?”
“그거야 그 반점이 나타나면 자연스럽게 힘을 쓸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로제타는 계속해서 숨을 죽였다.
‘이 사람들은 나를 랭우드의 후계자라고 그저 짐작하고 있는 게 아니라 확신하고 있어.’
그 사실을 되새기자 정말 놀랍도록 심장이 제 속도로 뛰기 시작하며 호흡이 차분해졌다.
그 이유는 아마도 자신이 짐작한 것과 같으리라.
그렇지 않다면 굳이 제 머리카락을 걷어 목 뒤의 반점을 확인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로제타는 두 사람의 대화에 더욱 귀를 기울였다.
남자는 마치 가르친다는 듯 으스대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뭐, 물론 세간에 그렇게 알려졌지. 하지만 그렇다면 이 아이는 반점이 나타났는데도 왜 힘을 못 쓰고 있을까?”
여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남자가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 웃음기가 묻은 목소리로 재차 말을 이어 나갔다.
“힘을 쓰지 못하는 후계자는 그저 가문의 허수아비일 뿐, 진정한 정령사가 될 수 없네. 그러니 억지로라도 그 힘을 각성시키는 방법이 남아 있는 거겠지. 이 아이의 불행을 바라마지 않는 당신이라면 분명히 기꺼워할 그런 방법이야.”
“그 방법이…… 대체 뭐죠?”
“한계까지 내몰아 억지로 힘을 일깨우는 것이지. 뭐 그 과정에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고 말이야. 어때. 이제 좀 마음에 드나?”
여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고, 남자는 조금 더 킬킬거렸다.
그러다 이내 웃음을 갈무리하고 특유의 오만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그러니 어쨌거나 여기서 지켜보고 있다가 저 아이가 깨어나면 내게 알려. 아직 제힘을 깨닫지 못한 모양인지, 내가 직접 도와서 억지로라도 일깨워 줘야지.”
비열한 웃음이 사방의 벽에 부딪쳐 작게 메아리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로제타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짐작하고 있는 것보다 제게 닥친 위기가 훨씬 더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서 나가야 해. 그러려면 여기가 어디고, 이 사람들이 누군지부터 알아야 하고.’
잠시 후, 남자가 먼저 자리를 뜨는 소리가 들렸다.
발걸음이 멀어지더니 이내 쾅! 문을 부술 듯 닫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제타는 짧게 숨을 고른 뒤, 그 굉음에 깨어난 척 굴었다.
“으, 음.”
그러자 곧바로 여자가 반응했다.
“이제 일어났구나.”
여자는 곧바로 로제타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로제타가 잠시 움츠렸으나, 이내 어깨에서 도로 힘을 풀었다.
그녀가 따로 요청하지 않았음에도 여자가 로제타의 눈가리개를 풀어 준 것이었다.
“당신은……!”
제 앞의 상대를 알아본 로제타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런 뒤 마치 숨을 토해 내듯 상대의 이름을 불렀다.
“젤다!”
젤다의 입꼬리가 그린 듯 호선을 그렸다.
분명 미소 짓고 있었지만,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일어났구나.”
그녀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로제타에게 하대를 하고 있었다.
“아니면 원래 더 일찍 깨어나 있었는데, 자는 척했던 거니? 그렇다면 못된 아이로구나.”
로제타는 굳이 그녀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되도록 차분히 질문을 던졌다.
“여긴 어디죠?”
“왜? 우리가 널 죽이기라도 할까 봐 겁나니?”
젤다가 메마른 웃음을 터트리다가 표독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노려보며 로제타의 아래턱을 세게 움켜쥐었다.
“윽!”
그녀가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리자 젤다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그녀는 퍽 만족스러워 보였다.
“넌 죽진 않을 거란다.”
로제타의 턱을 더 세게 움켜쥐며 젤다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꼴을 당하고 싶지 않았으면, 그날…… 그냥 네가 죽지 그랬니?”
그 순간 로제타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젤다가 방금 한 말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덧입혀지듯 겹쳐졌다.
사늘한 눈초리. 비수같이 날아와 심장에 꽂히는 얼음 같은 말.
그 모든 것은 언젠가 제가 꾸었던, 아주 오래된 기억을 옮겨 놓은 꿈에서 들은 말과 똑같았다.
「네가 죽었어야지!」
어린 몸으론 차마 받아 낼 수 없었던, 막무가내로 쏟아지던 짙고 음습한 원망.
로제타는 깨달았다. 그녀는 스산하게 중얼거렸다.
“당신이었구나.”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차올랐다. 하지만 그녀는 눈꺼풀 한번 깜빡이지 않았다.
무게를 이기지 못한 눈물이 한 방울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날, 그렇게 매정하게 날 버린 여자가…… 당신이었어.”
로제타가 젤다를 매섭게 쏘아보며, 짓씹듯 말을 내뱉었다.
젤다가 그녀의 턱을 놓아주었다.
그러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우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로제타의 시선이 높아지는 그녀의 얼굴을 따라 들렸다.
원망에 가득 찬 저 눈빛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자신이 기억을 잃은 것은 분명 저 사나운 눈을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도, 마주하고 싶지도 않다는 어린 마음의 발로였을지도 모른다고.
젤다가 메마른 목소리로 선고하듯 말했다.
“그래. 내가 널 버렸단다. 고매하신 후작 영애에서 한낱 비루한 야만인 사생아가 되게끔 말이야.”
* * *
언제 다시 정신을 잃었을까.
로제타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로제. 손 좀 줘 봐.」
「웅. 여겠어.」
어린 그녀가 신이 나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이내 약지에 작은 반지가 쑥하고 밀려 들어왔다.
‘이건……?’
로제타의 의식은 그것이 무엇인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아주 찰나 동안 본 것이지만, 며칠 전 실프가 제게 가져다주었던 토끼풀 반지였다.
‘그럼 실프가 내게 건네줬던 게, 이 날의 기억……?’
로제타는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볼이 통통한, 어린 소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의 얼굴과는 사뭇 달랐지만, 검은 머리카락과 피콕블루색 눈동자로 소년이 테런이라는 사실을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장면은 빠르게 전환되었다.
테런이 반지를 끼워 준 손을 높이 들고 도도도도, 커다란 저택 안으로 달려 들어간 자신의 눈앞에 다정한 한 부부가 보였다.
「아바지! 어마니! 로제 결혼했어요!」
한 남자가 티 나게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하아. 아버지는 아직 우리 로제를 보낼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당신도 참.」
다정한 웃음소리가 바로 근처에서 들리는 것처럼 선명하게 느껴졌다.
로제타는 직감했다.
‘이분들이…… 나의 진짜 부모님.’
조금 더 자세히 얼굴을 들여다보고 싶었다.
하지만 오래된 기억이라서 그런지, 아니면 내내 잊고 지내서 그런 것인지……. 얼굴은 좀처럼 또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또 화면이 전환되었다.
이번엔 누군가 자고 있는 자신을 깨웠다. 그 얼굴은 지금보다 훨씬 더 젊고 고운 젤다의 것이었다.
「숙모님……?」
「로제. 잠깐 일어나 보렴. 바깥에 눈이 오고 있어. 눈사람을 만들어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리자.」
「눈사람이요? 좋아요!」
그렇게 젤다의 손을 잡고 바깥으로 나갔을 때, 등 뒤가 환해졌다.
그리고 로제타는 몇 달 전 자신이 꿨던 꿈을 떠올렸다.
붉고, 노랬던 눈송이가 포슬포슬 내리던 꿈.
이윽고 그녀는 깨달았다.
그것은 랭우드의 대저택을 집어삼킨 거센 불길이 활활 타오르며 눈송이에 비친 것이었다는 것을.
‘아, 안 돼. 안 돼……!’
그 순간, 불현듯이 꿈이 멀어졌다.
“일어나라.”
억지로 깨운 것도 아닌데 로제타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그녀는 벽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다가 잠든 모양이었다.
“잠귀는 밝은 모양이군.”
누군가 비웃듯 피식 웃으며 하는 말이 들려왔다.
로제타의 시선이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향했다.
“당신은…….”
“이렇게 보는 건 그대와 에스테스 공작의 약혼식 날 이후로 두 번째로군. 클리프 영애. 아니, 랭우드 양.”
자신을 랭우드라고 부르는 마커스를 똑바로 바라보며, 로제타는 되도록 차분하게 대답했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네요. 리스턴 후작님.”
“시침은.”
마커스는 로제타의 시도가 같잖다는 듯 비웃었다.
그가 고개를 살짝 돌려 방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는 젤다를 건너다보며 말했다.
“저 여자가 네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을 리가 있나.”
로제타는 입술을 다물었다. 그가 한 말대로였다.
젤다와 단둘이 남겨져 있는 시간 동안, 로제타는 그녀로부터 갖은 폭 언을 당했다.
「난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클리프 남작가에서 계속 구박이나 받으며 살다가 비참해지지, 어째서 수도로 올라온 거니?」
「네게 행복해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부모를 잡아먹고 살아남은 네가?」
클리프 남작 부인과는 차원이 다른 폭언은 흡사 광기와도 같았다.
「그날! 너만 죽었으면 네 부모도, 내 남편과 내 아들도 살 수 있었어! 다 네 탓이야!」
젤다는 친절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로제타는 따로 설명을 듣지 않아도, 그녀가 마구잡이로 쏟아 대는 말에서 정보를 조합했다.
제 친부의 동생, 그러니까 로제타의 숙부와 결혼한 젤다가 자신의 아들을 차기 랭우드 후작으로 만들기 위해 자신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
그런데 그 일이 틀어져 버려 오히려 로제타만 살고 다른 이들은 모두 죽어 버렸다는 것.
‘나한테 책임을 전가해서 자신이 느끼는 죄책감을 덜어 내고 싶은 모양이지.’
젤다가 자신에게 퍼부었던 말을 다시 떠올리자 로제타는 기분이 더욱 가라앉았다.
그사이 마커스가 그녀의 바로 앞에 의자를 하나 끌고 와 앉았다.
오만하게 다리를 꼰 그가 로제타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영애. 나는 영애가 앞으로 내 일에 도움을 좀 주었으면 해.”
로제타는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제가 무슨 도움을 드릴 수 있는지에 대해선 차후 논의한다고 쳐도, 이런 식으로 사람을 겁박해 도움을 청하시는 경우라니요.”
“영애가 땅의 힘을 통해 날 돕겠다고 확답만 들려준다면 당장 그 구속을 풀어 주지.”
“전 땅의 힘을 쓸 줄 몰라요.”
“쓸 줄 안다면, 날 도울 마음은 있고?”
마커스는 집요하게 물었다.
로제타는 입을 다물어 버렸다.
빈말이라도 그런 말을 해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커스는 그녀가 그런 반응을 보일 줄 알았다는 듯 비아냥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도와줄 마음이 없으니 억지로 일깨워 내게 매어 두는 수밖에 없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