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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애 옆에 예쁜 애-129화 (129/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29화

말을 마친 마커스가 재킷 안쪽 주머니에서 붉은 펜던트를 꺼냈다.

차랑, 소리와 함께 펜던트의 보석 부분이 중력에 이끌리듯 아래로 떨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보석에서 붉은 기운이 넘실거리듯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프리트. 나와의 계약에 따라 나와서 내 명령을 수행하라.”

마커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보석의 기운이 크게 일렁이더니 별안간 몸 전체가 붉은색인 거대한 도마뱀 한 마리가 나타났다.

도마뱀의 피부는 마치 불이 붙기라도 한 것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캬아.”

도마뱀이 입을 열어 혀를 날름거릴 때마다 사방에 불티가 튀었다.

로제타는 겁에 질렸다.

그녀는 거의 본능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무의식중에 불을 무서워하고 있었다.

이곳으로 납치되어 오기 전 정보 길드에서도 그러했고, 지금도 제게 불을 내뿜는 이프리트의 불길에도 무서움을 느꼈다.

심지어 방금 전 꾼 꿈에서 자신이 어릴 때 살던 저택이 활활 타오르던 장면을 선명하게 기억해 낸 터였다.

불에 대한 그녀의 공포심은 말로 다 설명할 수 없었다.

하얗게 질린 로제타의 얼굴을 기껍다는 듯 바라보던 마커스가 기세등등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이프리트. 저 계집이 순순해질 때까지 괴롭히거라. 어차피 두 번 다시 햇빛을 보지 못할 테니, 한쪽 뺨에 화상을 입혀 피부를 우그러트려도 되겠지.”

마커스의 입가가 스산하게 비틀어졌다.

* * *

카르나 마을.

시찰단은 통째로 대절한 여관의 방 중 하나를 집무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주로 머무는 사람은 체이스와 테런, 그리고 긱스였다. 그리고 오늘은 한 명이 더 있었다.

다른 마을에서와 달리 오늘따라 테런이 영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 죽상을 하고 앉아 계십니까?”

느른히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오른손으로 성의 없이 깃펜을 돌리고 있는 테런에게 긱스가 불만 어린 목소리로 건의했다.

“당장 내일 큰비가 내릴 예정입니다. 각하, 이러고 계실 시간에 동선 점검을 한 번만 더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음, 그래. 해야지.”

테런이 마지못해하며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의 대화에 집무실 안에서 서류를 처리하고 있던 젊은 여성이 풋, 웃음을 터트렸다.

“두 분은 정말 재밌으신 것 같아요.”

그녀는 카르나 마을의 토박이라 마을 사정에 밝아, 시찰단이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일을 도와주기로 계획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제법 셈이 밝고 일 처리가 똑 부러져 테런은 물론 긱스가 아주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제니스 양. 주민들이 대피령을 잘 따를까요?”

“그렇게 만들어야죠.”

시찰단이 움직일 때와 달리 비구름을 아예 이 마을 밖으로 밀어낼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그럴 작정으로 이곳에 온 것이었으나, 마을을 살펴보고 생각이 달라졌다.

카르나 마을의 유일한 식수원이라고 할 수 있는 우물이 거의 메말라 있었다. 댐의 수위도 매우 낮다 보니 식용할 물을 찾기가 어려워 많은 사람이 곤란해하고 있었다.

식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마을에는 꼭 비가 필요했다. 폐쇄적인 주민들의 성향상 초반에는 퍼붓는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많은 비를 내리게 만들어야 했다.

그 문제를 가장 먼저 시찰단에 알리고 많은 도움을 준 사람이 바로 마을 주민 중 하나인 ‘제니스’였다.

그녀는 로제타 또래의 젊은 여성으로, 촌장보다 더 똑 부러지고 영민해 마을의 문제점을 간결하게 설명하고 시찰단에 큰 도움을 주고 있었다.

테런이 각을 잡고 책상 앞에 바르게 몸을 돌리며 또 한 번 길게 한숨을 내쉬자 긱스가 타박했다.

“각하, 그러다 땅이 꺼지겠습니까?”

그때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 이는 제임스였다.

“체이스 왕자님. 좋은 저녁입니다.”

“어서 오세요, 제임스 공.”

문을 닫고 들어선 제임스는 웃음을 삼키며 테런을 놀려 먹는 일에 가담했다.

“테런. 너는 여전히 긱스에게 구박을 받는구나. 문밖에까지 그 소리가 자자해.”

제임스는 긱스를 바라보며 유들유들하게 말했다.

“놔두게, 긱스. 저 녀석 지금 상사병 앓는 중이라 오히려 일하는 데 방해만 될 걸세. 내가 좀 도와줄 테니 오늘은 좀 봐주게나.”

제임스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집무실의 빈 책상 중 하나로 향했다.

긱스는 그가 선대 공작인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곧바로 두툼한 서류를 챙겨 와 제임스의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럼 사양하지 않고 몇 부 맡기겠습니다.”

“……하하. 자네, 참…….”

제임스가 살짝 질린다는 표정으로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다가 이내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앉아 한 장씩 서류를 펴 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뭐?”

테런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모조리 사라져 있었다.

당연히 이 방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테런에게로 모였다.

“실레스틴.”

하지만 제게 모인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재차 목소리를 내었다.

“실레스틴, 대답해!”

“각하, 왜 그러십니까?”

이상함을 느낀 긱스가 덩달아 심각한 표정으로 테런에게 다가섰다.

“실레스틴과의 연결이 끊겼어.”

테런이 위태롭게 숨을 몰아쉬며 토해 내듯 말했다.

제임스가 미간을 찌푸린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에게로 다가와 물었다.

“테런. 그게 무슨 소리냐? 알아듣게 설명을 좀 해 보아라.”

“로제타 양에게……. 제 약혼녀의 신변을 생각해 실레스틴을 그녀에게 붙였습니다. 그런데 실레스틴과의 연결이 끊겼어요. 분명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게 분명합니다.”

테런은 거의 숨도 쉬지 않고 말을 뱉었다.

그의 얼굴은 해쓱하다 못해 질려 있었고, 무척이나 정신이 없어 보였다.

로제타에게 붙여 놓은 실레스틴과의 연결이 끊어졌다는 것은 그녀의 안전에 무엇인가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었다.

실레스틴은 피르 다음으로 강한 바람의 정령인 만큼 이 일은 로제타가 어떠한 큰일에 휘말렸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일단 진정 좀 해라, 테런. 수도에 무슨 일이 생겼는지 생기지 않았는지 아직 모르는 일 아니냐? 와튼이 전령을 보내오지도 않았고.”

“이 빗속을 뚫고 어떤 전령이 오겠습니까?”

테런이 큰 목소리로 반발했다.

제임스의 탓이 아니라는 것을 머리로는 잘 알고 있었으나, 이성이 반쯤 날아간 그의 감정은 쉽사리 컨트롤 되지 않았다.

“가 봐야 합니다. 아버지. 절 막아서지 마세요. 전 또 그 아이를 이렇게 잃을 수 없습니다.”

그 순간 제임스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 아이라니?”

제임스가 지적하는 말에 테런이 아차 했다.

실레스틴과의 연결이 끊기는 바람에 너무 이성을 놓고 심중에 담아 두기만 한 말을 경솔하게 꺼내고 말았다는 자각이 들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테런은 주저하다가 말을 꺼냈다.

“확증은 없지만, 확신이 듭니다.”

“그러니까, 어떤 것이?”

“제 약혼녀가…… 어쩌면 15년 전 사라져 버린 로제일 수도 있겠다고요.”

“……뭐?”

“허무맹랑한 소리처럼 들리실 것 잘 압니다. 하지만 모든 정황이 들어맞습니다.”

테런의 음성이 다시금 격앙되기 시작했다.

제임스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채 잠시 눈을 감으며 숨을 골랐다.

“일단……. 너는 여기에 있거라, 테런. 수도에는 내가 올라가 보도록 하마.”

하지만 테런은 진정하지 못했다.

그가 격앙된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그녀가 사라졌는데! 어떻게 제가 여기에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럼 하다못해 정신이라도 차려!”

“아버지!”

“테런 아셔 에스테스!”

뒤이어 강렬한 파열음이 들려왔고 테런의 뺨이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미친 사람처럼 길길이 날뛰던 테런의 움직임이 딱 멎었고, 방 안은 일순 침묵에 휩싸였다.

제임스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제 아들을 바라보며 짐짓 꾸짖듯 엄하게 말했다.

“정신 차려라. 냉정함을 되찾아!”

그런 뒤 제임스는 체이스와 긱스를 돌아보며 정중하게 말했다.

“왕자님. 정말 죄송하지만 잠시 자리를 좀 피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 그러하겠소.”

“나가 있겠습니다.”

긱스가 제니스와 체이스를 데리고 나갔다.

집무실에 온전히 둘만 남자 제임스가 한결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아이는 죽었다. 로제는 이미 15년 전에 죽었어. 그 아이의 일을 지금 누구에게 겹쳐 보는 게냐?”

“……그런 적 없습니다.”

오히려 최근에는 로제타가 로제의 기억을 누르고 있었다.

그저, 테런은 두 번 다시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그 지독한 상실감을 도저히 또 견뎌 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이토록 불안해한 것이다.

실레스틴과의 연결이 끊긴 것이, 마치 불행을 알리는 어떠한 전조같이 느껴져서.

* * *

같은 시각. 리스턴 후작가의 지하실.

이프리트는 큰 발로 쿵쿵 바닥을 찧으며 로제타에게로 한 걸음씩 다가가기 시작했다.

“시, 싫어. 오지 마. 오지 마……!”

그때였다.

로제타의 앞에 돌풍이 일었다.

눈도 제대로 뜰 수 없을 만큼 강한 바람이었다.

바람은 마치 이프리트에게서 로제타를 지키기라도 하듯 막아서서 비키지 않았다.

“이 바람의 정체는…… 혹시 실레스틴?”

바람의 정체를 가장 먼저 알아본 것은 마커스였다.

그의 눈에서 불이 튀었다.

“빌어먹을 에스테스 공작! 이 애송이 놈이 기어코 이렇게 방해를 해!”

마커스가 험악한 얼굴로 짓씹듯 말을 내뱉었다.

그는 불의 펜던트를 더욱 움켜쥐며 큰소리로 외쳤다.

“이프리트! 당장 저 바람을 눌러!”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당장 저 건방진 바람을 누르란 말이다!”

마커스는 거의 발작하다시피 외쳤다.

그러자 이프리트가 붉은 혀를 더욱 날름거리며 위협하듯 불을 뿜었다.

하지만 로제타의 앞을 지키듯 막아서고 있는 실레스틴도 만만치 않았다.

그렇게 로제타는 제 앞의 돌풍이 시간을 벌어 주는 사이, 재빠르게 엉덩이를 뒤로 물렀다.

여전히 두 손은 뒤로 묶여 있는 상태라 움직이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그녀는 어떻게든 결박을 풀어 볼 생각으로 묶인 팔을 마구잡이로 휘둘러 보았다.

“으, 윽. 풀려. 풀리란 말이야!”

그 와중에 손가락이 바닥에 닿았고, 그 끝에 까슬까슬한 흙 같은 것이 만져졌다.

-랭우드의 아이야. 내 목소리가 들리느냐?

그리고 그때, 그녀의 머릿속으로 한 목소리가 흘러들어 왔다.

익히 아는 목소리였다.

이번에는 다행스럽게도 뚝뚝 끊기지 않고 온전히 다 들리고 있었다.

-그렇다면 대답하라. 내 너의 대답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으니.

‘드, 들려. 들린다고. 노아스! 제발 힘을 보태 줘. 지난번처럼 날 두고 가지 마.’

로제타는 간절히 속으로 생각했다. 그 순간 이프리트의 불길이 사납게 일렁였다.

그 뜨거운 기운은 실레스틴의 바람을 뚫고, 로제타의 얼굴 가까이에 위협하듯 다가왔다가 꺼졌다.

실레스틴은 바람의 정령 중 상급이다.

하지만 실레스틴이 맞서고 있는 정령은 이프리트로, 불의 정령 중에서도 최상급이었다.

같은 등급인 피르라면 모를까, 실레스틴 혼자 이프리트를 상대하기에는 여러모로 힘의 차이가 나 무리일 수밖에 없었다.

조금씩 기세가 기울어지더니, 이내 완전히 전세가 역전되었다.

그렇게 한 번 페이스를 잃자 실레스틴의 힘이 점점 약해졌다.

이프리트가 내뿜는 불의 기세는 거셌고, 심지어 실레스틴이 흩뿌린 바람을 타고 점점 더 위협적으로 위세를 떨쳤다.

붉고 노란 불길은 마치 로제타를 잡아먹으려는 마귀처럼 일렁였다.

“시, 싫어…….”

로제타는 더 갈 곳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엉덩이를 뒤로 물리며 피하려고 했다.

“캬아!”

도마뱀이 혀를 날름거리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결국 실레스틴의 바람이 흩어져 버렸다.

바람을 뚫고 점점 더 로제타에게 가깝게 다가오는 도마뱀은 더욱 사납게 불을 뿜어 댔다.

다정한 어머니와 늠름했던 아버지.

언제나 제게 정답게 손을 내어 주던 어린 테런의 모습.

마치 둑이라도 터진 듯 한참을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마구 잡이로 머릿속에 떠오르며 눈물이 철철 흘러넘쳤다.

“캬아!”

로제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노, 노아스!”

그러자 그 순간 그녀의 목 뒤에서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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