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30화
그 빛이 너무나도 눈이 아파 이프리트는 전진하는 것을 잊고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으, 윽. 저건…….”
마커스와 젤다 역시, 서둘러 팔뚝으로 제 눈가를 가리며 로제타를 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그녀의 목덜미에서 빛이 터져 나오고, 곧바로 뒤이어 쿠쿠쿠쿵! 그들이 서 있는 바닥이 심하게 진동하며 울리기 시작했다.
조금씩 바닥이 깨지더니, 균열이 간 그 사이에서 흙이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오로지 로제타가 있는 쪽의 바닥만 멀쩡하고, 나머지 공간은 파도가 너울거리듯 심하게 요동쳤다.
젤다는 한쪽 벽으로 달려가 붙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자칫 잘못하다간 곧바로 중심을 잃고 쓰러지고 말 것 같아 벽을 붙잡은 손이 제법 필사적이었다.
“이건 또 뭐예요!”
“빌어먹을! 이렇게 빨리 각성하다니!”
예상치 못한 일이라는 듯 마커스가 거칠게 말했다.
그는 서둘러 로제타를 제 쪽으로 끌어오려고 걸음을 옮겼으나 이미 한 발 늦은 터였다.
깨진 바닥에서 솟구쳐 오른 흙이 방패처럼 단단한 벽을 만들어 마커스로부터 로제타를 보호하듯 막아 냈기 때문이었다.
“젠장! 제 계약자를 지키겠다는 게로군!”
흙은 마치 물결처럼 넘실거리다가 이프리트의 불길마저 덮치며 꺼 버렸다.
그것들은 모두 일전에 토토의 장례식 때 로제타가 보았던 광경과 비슷했다.
흙은 마치 거품이 이는 것처럼 부풀어 오르더니 이내 하나로 뭉쳐지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그러했듯, 이번에도 흙은 죽은 토토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노아스는 다시금 살아나려는 이프리트의 불꽃을 바라보더니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이프리트. 그만 멈춰라. 15년 전에 한 짓도 모자라 또 이런 짓을 벌이다니. 두 번은 내 계약자를 잃지 않을 것이다.
“캬아!”
-계속 맞서겠다면 나 역시 전력을 다해 널 상대하겠다.
이프리트가 위협적으로 불붙은 꼬리를 휘둘렀다.
그때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제법 무섭게 났으나, 쉽사리 노아스에게 덤벼들지는 못했다.
노아스와 맞붙어 봤자, 서로 힘만 축내는 꼴이 되리라는 것을 이프리트도 잘 알고 있었다.
마치 대치를 하는 것처럼 노아스와 이프리트가 마주 보고 섰다.
그렇게 한참을 마주 보다가 이프리트가 전의를 잃었다는 듯 온몸의 불꽃을 꺼트렸다.
그제야 노아스가 이프리트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뒤돌아섰다.
토토의 모습을 한 노아스는 로제타에게 다가와 그녀의 손목을 묶고 있는 밧줄을 이로 끊어 풀어내 주었다.
그런 뒤 로제타의 앞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마치 빤히 들여다보는 듯 얼굴을 보며 머릿속으로 말을 걸어왔다.
-드디어 네 목소리가 내게 닿았다.
로제타는 그저 흐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녀가 안쓰럽다는 듯 노아스가 한 걸음 더 다가와 로제타의 뺨에 흐르고 있는 눈물을 길게 핥아 주었다.
마치, 토토가 살아생전에 그녀에게 애정 표현으로 보여 주었던 행동처럼.
-랭우드의 아이야. 한 번 끊어졌던 땅의 힘은 다시 네게로 계승될 것이다.
로제타는 울면서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너의 바람은 곧 나의 바람. 힘의 계승자여. 네가 가장 간절히 원하는 것을 말하라.
“저 사람들이 내게 오지 못하게 해 줘.”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닥에서 성인 남성의 키보다 높게 흙이 솟아오르더니 마커스와 젤다 쪽을 강력하게 덮쳤다.
“으아아아!”
매섭게 내려치는 그 충격에 더는 버티고 서 있지 못하고, 두 사람이 바닥으로 쓰러지듯 넘어졌다.
“그리고…….”
우느라 쉰 듯한 목소리로 그녀가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속삭이는 것 같았다.
“테런, 흡. 테런 오라버니……. 공작님이 보고 싶어. 흡, 지금 당장.”
감정이 북받치는 모양인지 로제타가 고개를 떨구었다.
솟구치는 그녀의 눈물은 금세 흙을 적셨다.
-알았다.
짧은 대답 후, 토토의 모습을 한 노아스가 다시금 빠르게 모습을 바꾸었다.
이것이 본래의 제 모습이라는 듯 거대한 늑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노아스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도 로제타의 앞에 순하게 엎드렸다.
-올라타라.
“……응?”
-그대의 소원이라고 하지 않았나? 젊은 에스테스에게로 데려다줄 테니 올라타라.
로제타가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뒤 더없이 비장한 표정으로 노아스의 등에 올라탔다.
-빠를 테니 놓치지 않게끔 꽉 잡도록.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노아스가 땅을 박차고 튀어 나갔다.
로제타는 상체를 더욱 낮추며 노아스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그녀가 떠나자마자 지하실에 빠른 속도로 흙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이게 다 뭐야!”
“마커스! 어떻게 좀 해 봐요!”
“나더러 뭘 어쩌란 거야! 당신 몸뚱이는 당신이 알아서 해!”
마커스는 진흙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젤다와 날 선 목소리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그가 걸음을 옮길수록 어디선가 솟아나는 점도 높은 흙은 마치 파도처럼 마커스의 몸을 밀어냈고, 그는 계속 그렇게 지하실을 빠져나가는 문에서 멀어졌다.
“젠, 장! 이제 갓 각성한 애송이 따위에게! 감히, 이 내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제 몸에 화가 난 마커스가 커다란 목소리로 욕설을 지껄였다.
15년 전, 불의 힘으로 랭우드를 몰락시켰기에, 그는 로제타를 얕보고 있었다.
그래서 이제껏 힘 다루는 법도 깨우치지 못한 조무래기가 각성하며 내뿜는 힘 따위를 우습게 여겼다.
그 정도 힘은 수십 년 동안 불의 후작으로 살아온 자신이 다루는 이프리트의 힘으로 얼마든지 누를 수 있으리라 가볍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건 명백한 오판이었다.
로제타의 힘은 어마어마했고, 자신은 그것을 억누르지 못했다.
이것은 명백한 자신의 패배였다.
로제타가 불러낸 진흙의 수위는 점점 높아졌고, 마침내 목 부근까지 차올랐다.
일반적인 액체와 달리 밀도가 무척이나 높았기 때문에 마치 숨통을 조르고 있는 것처럼 호흡하기가 여의치 않았다.
마커스는 마침내 인정했다.
로제타를 가두기 위한 지하실이, 자신의 숨통을 조이는 감옥이 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의 힘이 아주 강력하다는 것을.
모자란 숨을 들이마시기 위해 입을 벌릴수록 텁텁한 흙이 밀려들어 왔다.
점점 더 호흡이 가빠지고, 눈앞이 흐릿해졌다.
안간힘을 써 젤다 쪽을 돌아보았는데, 그녀는 이미 정신을 잃은 듯 고개를 앞으로 숙이고 미동을 보이지 않았다.
“으, 윽.”
그때였다.
진흙이 마치 분수처럼 아래에서부터 솟아오르더니, 마커스의 정수리부터 촤아아- 쏟아져 내렸다.
그 흙에 삼켜지며, 그가 눈을 감았을 때였다.
-죽이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끝나지도 않을 것이다. 네가 저지른 죗값은 고작 이것만으로는 모자라니까.
마커스의 머릿속에 다른 정령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타 가문 사람에게 이토록 선명하게 음성이 들리는 것은 좀처럼 없는 일.
말인즉, 노아스의 분노가 어마어마하다는 뜻이었다.
8. 복권(復權)
빗줄기는 점점 거세어져만 갔다.
테런은 당장이라도 집무실을 박차고 나갈 기색이었지만, 제임스가 매서운 눈으로 가로막고 있었다.
“아버지. 비켜 주십시오.”
한결 흥분이 가신 모양인지 그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내가 가겠다. 테런. 내일 너는 큰 비구름을 몰고 와야 하지 않느냐. 네가 이곳에 없으면 계획이 틀어진다. 그걸 잘 알고 있지 않느냐.”
제임스는 차분한 목소리로 타이르며 테런에게 에스테스 공작으로서의 소임을 일깨워 주려고 했다.
제 아버지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테런도 알아들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는 우기 같은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로제타의 안위.
그녀가 안전하다는 것을 제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테런이 서늘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럼 방법이 없지요.”
테런이 건조하게 대답했다.
제 아들의 의중을 도무지 파악하지 못하겠다는 듯 제임스가 가늘게 뜬 눈으로 테런을 바라보았다.
대치하듯 제임스를 마주 보고 서 있던 몸을 돌렸다.
“나가는 곳이 꼭 그 문일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테런은 거침없이 걸음을 옮겨 창문 쪽으로 향했다.
그는 나무 막대기로 가로막아 놓은 잠금쇠를 해제하고 덧창을 활짝 열었다.
계속해서 내린 비 때문에 습한 기운이 훅, 집무실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그렇게 창을 연 뒤 테런은 조그맣게 소리 내었다.
“피르.”
말로 다시 수도까지 이동하려면 수 일이 걸리겠지만, 피르의 등에 오르면 반나절이면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녀석이 순순히 제 등을 내어 줄지는 의문이었으나 지금은 믿어 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그가 부르고 얼마 되지 않아 키이이이이-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행스럽게도 피르는 본체로 나타났다.
지금이 새벽에 가까운 시간이라 망정이었지, 사람들이 깨어 있는 시간이었다면 모두 피르의 덩치를 보고 놀랐을 것이었다.
피르는 큰 날개를 활짝 펴고 그가 서 있는 여관 창문 쪽으로 가까이 날아왔다.
“테런!”
뒤에서 제임스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테런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창문틀을 잡고 뛰어내렸다.
피르가 타이밍 좋게 도착했고, 테런은 그대로 거대한 피르의 목 부분에 안착할 수 있었다.
“피르. 미안해. 수도로 가자. 최대한 빨리.”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피르가 ‘키이이이이-.’ 높고 가느다랗게 울었다.
그렇게 테런을 태운 피르가 높이 솟아올랐다.
하늘에서는 여전히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바람을 가르는 속도는 더없이 빨랐다. 그 때문에 피부에 와 닿는 비가 아플 정도였으나, 테런은 참아 냈다.
그런데 그때, 빗소리를 헤치고 저 멀리 산 쪽에서 늑대의 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냥 지나칠 수도 있건만 어떠한 끌림에 테런은 피르를 잠시 멈춰 세웠다.
그리고 이내 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보았다.
늑대의 등에 타고 있는 한 여자를.
바람에 흩날리는 붉은 머리카락은 마치 태양 같았다.
“저건……!”
테런은 숨을 죽였다.
피르는 눈치껏 방향을 틀어 늑대와 여자 쪽으로 날아갔다.
그들과의 거리가 점점 더 가까워질수록 테런은 확신했다.
저 늑대는, 일반적인 동물이 아니라는 것을.
노아스. 땅의 정령의 재림이었다.
테런은 더할 나위 없이 확신에 차, 그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로제.”
테런이 피르의 등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는 곧바로 로제타에게로 달려갔다. 계속해서 그녀의 이름만을 부르며.
“로제.”
사방에 진흙 물이 튀었으나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로제!”
마침내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테런의 얼굴을 보는 순간 로제타는 곧바로 눈물을 터트렸다.
수만 가지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무서운 순간에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이 바로 눈앞에 보이니 안도감이 물밀 듯 밀려들며 감정을 도무지 주체할 수가 없었다.
“공작님. 아니…….”
그녀가 내려오기 쉽게 노아스는 다시 땅에 엎드렸고, 로제타는 곧장 뛰어내렸다.
그녀는 빗줄기를 헤치며, 테런을 향해 달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힘이 다 빠진 팔다리는 몇 번이나 허우적거렸다.
“오라버니……!”
허물어지는 그녀의 몸을 테런이 서둘러 달려가 꽉 끌어안았다.
그녀에게서 짙은 흙 내음이 풍겼다.
그렇게 테런에게 안긴 채 로제타는 흐느꼈다.
“미안해.”
테런의 가슴팍을 제 눈물로 적시며, 로제타는 하염없이 속삭였다.
“그렇게 오래 혼자 둬서 미안해.”
로제타는 계속해서 그의 품에 파고들었고, 테런은 행여 그녀를 놓칠까 봐 더욱 끌어안았다.
“그렇게 오래 날 그리워하게 해서 미안해.”
로제타는 울면서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몰라서 그랬어.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아서 오라버니를 찾아오지 못했어. 그렇지만…… 그렇지만 이젠 다 기억나. 다 기억났어. 미안해. 너무 늦게 돌아와서…….”
테런이 로제타의 어깨를 잡고 살짝 떼어 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로제타의 양 볼을 감싸듯 쥐어 자신을 올려다보게 했다.
테런의 푸른 눈도 어느샌가 젖어 있었다.
얼굴 군데군데 묻은 흙을 제 엄지로 닦듯이 매만졌다.
그는 로제타를 꼼꼼하게 살폈다.
“로제.”
그의 목소리는 마치 모래를 한 움큼 집어 씹고 있기라도 한 듯 메말라 있었다.
“꼴이 왜 이래? 어디 다친 데는?”
로제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테런의 눈은 기어코 손목에 남아 있는 그녀의 상처를 발견해 냈다.
“아픔에 둔감해지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말했잖아.”
테런은 그녀의 손을 끌어와 모아 쥔 뒤, 그 붉은 자국 위에 입술을 묻었다.
테런이 내쉬는 뜨거운 숨이 로제타의 여린 살갗을 간지럽혔다.
그렇게 상처를 핥아 주듯 조심스럽게 입술을 묻었던 테런이 천천히 손목을 놓아주고는 다시 로제타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가지 마, 두 번 다시는.”
로제타가 울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테런의 얼굴이 천천히 내려왔다.
눈물인지, 비인지 구분할 수 없는 물방울이 잔뜩 매달린 로제타의 눈꺼풀이 천천히 닫혔다.
그렇게 차가운 빗속에서, 뜨거운 두 입술이 포개어졌다.
식어 가는 몸에 서로의 체온을 나누어 주겠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