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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애 옆에 예쁜 애-131화 (131/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31화

* * *

“그럼 왕세자 전하. 돌아가시는 길 모쪼록 무탈하고 편안하시길 바랍니다.”

“안녕히 가세요.”

공손한 배웅 인사를 들으며 바론이 쓴 미소를 지었다.

저가 마치 이 에스테스 공작가에 불청객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들어 썩 유쾌하지 않았다.

물론 초대를 받고 온 것도, 기별을 넣고 온 것도 아니었으니 불청객은 맞지만.

“그럼 가 보겠습니다.”

애써 웃는 낯을 유지한 바론이 마차에 올랐다.

마차 문이 닫히기 무섭게 에스테스 공작저의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그것이 꼭 내일은 오지 말라는 무언의 항의처럼 느껴져 바론이 입술을 짓씹었다.

“빌어먹을.”

마차 안에 자신과 시종만 남자 바론은 간신히 쓰고 있던 가면을 집어 던져 버렸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앉아 있는 의자의 쿠션을 주먹으로 쾅 내려쳤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시종 둘의 몸이 순간 움츠러들며 긴장한 것처럼 굳었다.

그들은 바론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숨을 죽였다. 이럴 때 제 주인의 심기를 거스르면 반드시 분풀이를 당하게 된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은 덕분이었다.

그렇게 시종들이 몸을 사리는 사이, 바론은 거친 울분을 또 한 번 토해 내었다.

“테런 녀석. 대체 그 계집을 어디로 빼돌린 거야?”

바론은 근래 허탕을 쳐서 기분이 몹시 좋지 않았다.

일부러 제 아버지의 눈 밖에 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시찰단에서 빠지고 수도에 남았다.

테런이 그렇게 애지중지, 황금처럼 감싸고 도는 약혼녀를 한번 품어 볼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두 사람의 사이가 퍽 좋아 보였으나, 자신이 비집고 들어갈 자리는 충분하다는 것이 바론의 생각이었다.

어차피 천한 야만인 계집이다.

지위도 테런보다 자신이 조금 더 낫고, 외모는 뭐 비등비등하니까 테런만 그녀의 옆에서 사라진다면 충분히 꼬드겨 볼 수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억지로 테런을 시찰단에 끼워 보냈는데, 그런 제 수고가 무색하게도 로제타가 에스테스 공작저에 없었다.

벌써 사흘째였다.

3일 연속으로 에스테스 하우스에 찾아가 보았건만 바론은 로제타의 머리카락 한 올도 구경하지 못했다.

로제타를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했으나, 그를 맞이하러 내려온 것은 한참 어린 자신의 약혼녀였다.

클라리사는 무척이나 뚱한 얼굴로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클리프 영애께선 현재 부재중이십니다.」

「그…… 런가?」

바론이 거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평소에 자신이 클라리사를 무시하는 것과는 별개로, 어쨌든 약혼녀 앞에서 다른 여성을 만나러 왔다는 것을 들킨 것이 제법 머쓱했기 때문이다.

클라리사는 그렇게 바론의 맞은편에 앉아 그가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어린 애가 귀엽지가 않다니까.’

바론은 클라리사가 자신의 앞에서만 그런 태도를 보인다는 것을 까마득히 모르고 속으로 툴툴거렸다.

‘어째 더 붙임성이 없어진 것도 같고.’

예전에는 단둘이 있을 때, 클라리사 쪽에서 먼저 말도 붙이고 무거운 공기를 없애려는 노력을 해 왔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노력마저도 보이지 않아 바론은 영 못마땅했다.

그는 뜨거운 차를 한 모금 후룩 마시면서 습관적으로 클라리사의 얼굴을 살폈다.

눈 밑이 불그스름해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울었나?’

하지만 굳이 그 의심을 입 밖으로 꺼내어 묻지는 않았다.

잘 참고 있는 것 같은데, 자신이 물어서 눈물을 펑펑 쏟아 내면 어쩌나?

저는 달래 줄 자신이 없었다. 아니, 솔직히 귀찮았다.

바론은 클라리사의 얼굴이 어두운 이유를 묻기보다, 제 용건을 우선했다.

「그런데 클리프 영애는 어디로 간 거지? 결혼하기 전에 영지에라도 돌아간 것인가?」

사흘이나 저택에 없다고 하기에 바론이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고작 그런 이유들뿐이었다.

「그건…….」

바론의 질문에 클라리사가 난처한 표정으로 얼굴빛을 흐렸을 때였다.

응접실의 노크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카밀라 대부인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왕세자 전하께서 걸음하셨다기에,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카밀라는 국왕도 깍듯이 대하는 인사였기에 바론은 마지못해 예의를 차렸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대부인. 여전히 정정해 보이십니다.」

「건강이라도 알아서 챙겨야 제 아이들이 고생을 덜 하지 않겠습니까?」

카밀라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뒤 곧장 클라리사의 옆으로 와 앉고는 특유의 품위 있는 말투로 왜 응접실을 찾았는지 본론을 꺼냈다.

「한데 왕세자 전하. 제 손자며느리를 찾으셨다고 들었는데, 어이하여 그러시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그 아이가 전하께 무슨 실수라도 한 것인지요.」

그렇게 말하는 카밀라의 눈빛은 사뭇 매서웠다.

질문은 하고 있으나 그녀의 표정 어디에도 로제타에 대한 걱정과 염려, 불신은 엿보이지 않았다.

카밀라가 경계하는 것은 오히려 바론이었다. 그녀는 이 망나니 왕세자가 로제타에게 추파를 던질 것임을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그 날카로운 눈빛에 바론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목소리를 가다듬은 뒤 바론이 어렵사리 입을 떼었다. 거짓말로 변명을 하려니 영 말이 생각만큼 잘 흘러나오지 않았다.

「일전에 하우스 파티 때 진 신세에 대해 감사 인사를 할 겸 잠시 들른 것입니다.」

카밀라가 그린 듯한 미소를 지으며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사려 깊으시군요.」

얼핏 온화한 목소리로 들렸다.

하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질 않았다.

「오늘 전하께서 내리신 치하의 말씀은 손자며느리에게 제가 책임지고 전하겠습니다. 하니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세요. 게다가 전하께서는 국무로 바쁘시지 않습니까?」

아무리 바론이 멍청해도 그 말에 숨겨진 속뜻을 모르지 않았다.

더 이상 오지 말라는 뜻이었다.

강경한 카밀라의 태도에 클라리사는 마음을 놓은 듯 어깨에서 힘을 빼었다.

테런도 없는 마당에, 공작가에서 더 머물 수 있는 핑곗거리를 찾지 못한 바론은 떠밀리듯 자리에서 일어나게 된 것이었다.

바론이 탄 마차가 천천히 구르기 시작했다.

“분명 두 사람 다 뭘 숨기고 있는데……. 그게 뭐지?”

바론은 영 짐작 가는 것이 없어서 답답하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얼굴 한번 더럽게 보기 힘드네. 빌어먹을.”

바론이 씨근덕거리던 그때, 시종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물음을 건넸다.

“전하, 곧바로 환궁할까요?”

“아니.”

바론이 여전히 찌푸린 얼굴로 작게 대답했다.

목소리 크기가 너무도 작았으나, 그는 그런 것쯤은 조금도 개의치 않아 했다. 어차피 알아듣는 것은 상대의 몫이었다.

이럴 때 바론이 하는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면 뺨을 올려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시종은 한마디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더욱 귀를 기울이며 제 주인의 입술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리스턴 후작가로 간다.”

“예, 예! 알겠습니다.”

시종은 곧바로 마부석 쪽으로 난 작은 창을 두드리며 말을 건넸다.

“말 머리를 리스턴 후작가 쪽으로!”

“알겠습니다!”

에스테스 하우스를 벗어난 마차가 천천히 리스턴 후작가 쪽으로 굴러가기 시작했다.

* * *

“저, 전하! 기별도 없이 어인 일이십니까?”

바론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은 패트릭이 곧장 뛰어 내려왔다.

그 말에 바론이 툴툴거리며 대꾸했다.

“내가 언제는 허락 맡고 왔나?”

상당히 불퉁스러운 목소리라 패트릭은 조금 민망함을 느꼈다.

바론은 후작저가 마치 제 궁이라도 되는 것처럼 집주인의 안내가 없어도 자연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자네 아버지는? 리스턴 후작이 보이지 않는구먼.”

“아, 그것이…….”

패트릭이 말꼬리를 흐리자, 힐끗 그를 바라보던 바론이 혀를 차며 말했다.

“내 인내심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은 다른 누구보다도 영식이 제일 잘 알고 있을 텐데?”

그러자 패트릭이 침을 꼴깍 삼키고 곧바로 말을 꺼냈다.

“아버지께서는 지하실에 내려가셨습니다.”

“뭐?”

“나흘…… 아, 아뇨. 이제 닷새째가 되었군요. 지하실로 내려가시며 따로 부르기 전엔 그 누구도 얼씬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쭉…… 안 올라오고 계시고요.”

패트릭의 설명에 바론의 얼굴이 더욱 구겨졌다.

그가 미간을 좁힌 채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불편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하실? 거기에 뭐가 있기에?”

패트릭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눈을 굴렸다.

바론에게 어디까지 말해야 좋을는지 판단이 쉬이 되지 않았다.

차기 후작이 되기 위해선 가주인 제 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르면 안 된다. 그러니 최우선적으로는 마커스의 명을 따라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올리비아가 나를 제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데?’

마커스가 불사의 몸을 가진 것도 아니기에 언젠가는 반드시 후계를 정해야 한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패트릭은 그게 자신인 것만 같았다.

결국, 그는 아슬아슬하게 타고 있던 줄을 완전히 틀었다.

차기 국왕인 바론에게 순순히 대답해 주며, 그와의 관계를 조금 더 돈독하게 만들어 미래를 도모하고자 하는 욕심이 생긴 것이다.

“전하, 잠시 귀 좀…….”

넌지시 건네오는 패트릭의 말에 바론의 이맛살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그런 바론을 달래듯 패트릭이 작게 덧붙여 말했다.

“긴히 들으셔야 하는 이야기라 그렇습니다.”

바론이 못마땅해 죽겠다는 얼굴로 패트릭 쪽으로 살짝 고개를 가져다대었다.

패트릭은 주위를 살핀 뒤 오른손으로 제 입술을 가리고는 바론의 귓가에 무엇이라고 속삭였다.

그 이야기를 들을수록, 바론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뭐? 그게 진짜인가? 에스테스 공작의 약혼녀를 데리고 왔다고?”

말을 마친 패트릭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자, 바론의 얼굴이 금세 펴졌다. 심지어 입술에 느물거리는 미소까지 걸려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일이 제대로 풀려 가는 기분이었다.

“지하실로 통하는 문이 어디인가? 앞장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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