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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애 옆에 예쁜 애-132화 (132/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32화

* * *

“어?”

패트릭이 저도 모르게 놀란 소리를 내었다.

그의 뒤에 서 있던 바론이 재촉했다.

“뭐 하나? 빨리 문을 열지 않고? 설마 안에서 잠그고 있는 건가?”

“아, 아뇨. 잠긴 것 같지는 않은데…….”

패트릭은 연신 손잡이를 잡은 팔을 잡아당기며 힘겹게 말을 이어 나갔다.

“문이 잘, 안 열립니다.”

말을 마친 그가 다시 한번 더 힘껏 문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덜컹, 하고 열린 문 안에서 우르르 무엇인가가 쏟아져 나왔다.

“으, 윽! 이게 다 뭐야?”

패트릭이 기겁하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지하실 안쪽에서부터 진득한 점성을 가진 진흙이 밀려 나오고 있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인가? 대체 후작은 지하실에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재빠르게 계단 위로 피신한 바론이 언짢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가 이내 패트릭에게 명령했다.

“들어가 봐.”

“제, 제가요?”

바론이 오만하게 턱 끝을 치켜든 채로 말했다.

“그럼 내가 들어가야겠나?”

“아, 아뇨……. 알겠습니다.”

패트릭이 싫은 티를 애써 숨기며 한숨을 들이켠 뒤 천천히 한 걸음을 떼었다.

지하실 안에 진흙이 얼마나 가득 들어차 있는 건지 금세 그의 발목이 잠기고 정강이까지 차올랐다.

그렇게 무거운 다리를 간신히 끌어 안으로 들어가자, 진흙 속에 반쯤 잠겨 정신을 잃은 마커스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버지!”

패트릭은 허우적거리며 마커스에게로 다가갔다.

마커스는 진흙으로 목욕이라도 한 것처럼 온몸에 흙이 묻어 있었다.

패트릭은 열심히 제 아버지를 흔들어 깨웠으나 마커스는 도통 눈을 뜨지 못했다.

“아버지! 정신 차리세요!”

도움을 구하기 위해 막 몸을 돌렸을 때였다. 지하실 한쪽 벽에 하얗게 질린 낯빛으로 서 있는 중년의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근래 후작저에서 자주 보았던 젤다라는 여자였다.

그녀의 하반신은 마커스처럼 진흙 속에 잠겨 있었고 꼴은 엉망진창이었다.

그녀는 계속 무엇이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커다란…… 늑대가 날 죽이려……. 엄청난 힘이었어…….”

패트릭이 인상을 찌푸린 채 뇌까렸다.

“거기 너! 뭘 그렇게 멍하니 넋을 빼놓고 있는 거야? 그럴 시간에 올라가서 집사나 좀 불러와!”

하지만 젤다는 패트릭의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해서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그게 진정한…… 랭우드…….”

겁에 질린 듯 바들바들 떨면서 중얼거리던 그녀가 이내 픽 혼절하듯이 쓰러졌다.

패트릭의 얼굴에 어이없는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 * *

비록 먹구름에 가리어 해가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없었지만, 카르나 마을 곳곳이 조금씩 환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비가 내리는 데다가 활동을 하기에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거리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시찰단이 묵고 있는 여관의 1층 출입문이 조용히 열렸다.

테런은 여관 주인 외엔 아직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오판이었다.

여관 문을 연 테런이 안으로 들어오기 무섭게 계단 쪽에서 누군가 부산스럽게 탁탁탁 뛰어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날아오는 잔소리는 덤이었다.

“아니, 각하! 이 아침부터 대체 어딜 다녀오셨습니까? 우산은 어쩌시고 그렇게 물에 빠진 생쥐처럼 다 젖으신 거예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살면서 단 한 번도 늦잠을 자 본 적이 없다는 성실함의 대명사, 긱스였다.

그는 여관 안으로 들어오는 테런의 몰골을 보고 대뜸 미간을 찡그렸다.

테런이 난감함에 얼굴을 찌푸리며 입술 위로 곧게 세운 왼손 검지를 올렸다.

“긱스. 목소리 좀 낮추게. 다른 사람들 깰 테니까.”

그렇게 말을 하는 동안, 테런의 오른손은 내내 뒷짐을 지고 있었다.

그 모습이 긱스에게는 퍽 이상하게 와닿았다. 위화감이 느껴진 것이다.

‘왜 왼손으로 쉿 모양을 하고 계시지? 각하께서는 오른손잡이신데?’

마치 무엇인가를 숨기는 것처럼도 보이는 상관의 모습에 긱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더욱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이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각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긱스는 테런의 등 뒤에서 그 못지 않게 홀딱 젖은 차림을 하고 있는 로제타를 발견했다.

시선이 마주치자 로제타가 주춤거리며 앞으로 걸음을 내딛고는 테런의 옆에 나란히 섰다. 그런 뒤 민망한 미소를 지으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잘…… 지내셨나요, 긱스 경?”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요, 영애? 영애가 갑자기 콘웰의 카르나까지 어떻게 오신 겁니까?”

긱스는 질문을 건네는 것과 동시에 혹시 누군가와 함께 왔는지, 테런과 로제타의 뒤를 살폈다.

로제타의 비서 역할을 하고 있는 자신의 아내도 함께 온 것인지 찾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로제타 외의 다른 사람은 찾을 수가 없었다.

의문을 품은 긱스의 눈동자가 다시 로제타에게로 향했다. 시선이 마주치자 그가 무엇을 궁금해하는지 눈치챈 로제타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늘이며 말했다.

“이곳에 저 혼자 오게 되었어요.”

“……예? 영애 혼자서 말입니까?”

로제타가 고개를 끄덕이며 입술을 오므렸다. 이 상황을 긱스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 좋을는지 몰랐다.

‘어디서부터 설명하는 게 좋을까.’

고민이 되어 그녀의 이맛살이 절로 찌푸려졌다.

그때 모두의 콧속으로 젖은 흙냄새가 훅, 끼쳤다.

뒤이어 로제타의 옆으로 웬 흙을 뒤집어쓴 것만 같은 개 한 마리가 터벅터벅 걸어 들어와 그녀의 옆에 우뚝 섰다.

그 개에게 무심코 시선을 줬던 긱스가 제 두 눈을 의심하며 눈매를 좁혔다.

“토토? 네가 여기 어떻게……?”

테런과 로제타가 동시에 옆을 돌아보았다.

로제타의 난처한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인간계로 나온 정령은 크게 두 가지 상태로 구분할 수 있다.

만약 가장자리에서 희미한 빛이 나며 몸이 반쯤 투명해 보이면 계약자나 정령의 힘에 감이 좋은 사람만 볼 수 있는 상태이고, 가장자리에서 빛이 나지 않는다면 모두가 그 존재를 똑똑히 볼 수 있는 상태인 것이다.

현재 노아스의 모습은 후자로, 긱스가 그를 보는 데 아무런 무리가 없다는 뜻이었다.

로제타가 입 안에서 잠시 말을 고르다가 이내 대답했다.

“음, 토토처럼 보이지만 토토는 아니에요.”

“그러면…….”

“그게…… 저, 이쪽은 노아스예요.”

“……예?”

긱스의 얼굴에 얼이 빠진 듯한 표정이 자리 잡았다.

그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재차 로제타에게 질문을 던지려 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영애, 지금 그게 무슨…….”

테런이 중간에 말을 잘랐다.

“일단 여기까지. 계속 이곳에서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곧 사람들이 활동하기 시작할 텐데 괜한 이목을 끌고 싶지는 않네. 우선은 올라가지.”

그제야 긱스가 제정신을 차리며 합, 하는 표정과 함께 입술을 다물었다.

그는 곧장 몸을 한쪽으로 비키며 두 사람에게 계단으로 향하는 길을 내어 주었다.

“따뜻한 물을 준비해 올리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간단한 요깃거리도요.”

“부탁하지.”

테런은 로제타의 손을 꼭 잡고 긱스를 지나쳐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런 두 사람의 뒷모습을 긱스가 빤히 들여다보았다.

“어찌 된 일이지?”

그가 고개를 갸웃하며 돌아섰다.

두 사람의 관계야 좋으면 좋을수록, 저도 좋은 것이었다.

우선은,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비에 홀딱 젖은 테런과 로제타의 몸을 덥히는 것이 먼저였다.

* * *

테런의 방 안.

“공작님.”

로제타가 수줍은 목소리로 테런을 부르며 욕실에서 나왔다.

뜨거운 물로 몸을 씻어서 그런 건지 백옥같이 하얀 피부가 조금 달아올라 있었고, 양 뺨 역시 홍조로 물들어 있었다.

그녀가 씻고 있는 사이 그 역시 옷을 갈아입었는지 마른 셔츠와 바지로 갈아입은 터였다.

“욕실 잘 사용했어요. 공작님께선…….”

“전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긱스의 방에서 하고 왔으니까.”

“아. 다행이에요.”

“이리로 앉아요.”

로제타는 주저하다가 테런이 가리킨 자리에 앉았다.

노아스는 정령계로 돌아간 터라, 이 방 안에는 테런과 로제타 단 둘뿐이었다.

그가 그녀의 앞으로 하얀 김이 피어오르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음식은 조금 더 시간이 걸릴 모양입니다.”

“괜찮아요. 배고프지 않은 걸…… 요.”

로제타가 어색하게 말을 높였다.

감정이 북받쳤을 때는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옛 기억에 사로잡혀, 테런에게 오라버니라고 부르고 말을 놓았다.

하지만 눈물이 그치고 이성이 돌아오니, 반말이 영 어색하게 느껴져도 통 입에 담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동안 잊고 지냈던 과거가 생각이 났다고 한들, 현재의 그녀는 테런과 서로 존댓말을 사용하며 지내 온 시간이 더 길었다. 그래서 이쪽이 더 편하게 느껴진 것이다.

“공작님. 아니, 오라버니…….”

눈치를 보며 호칭을 정정하자, 테런이 미소 지었다.

“편한 대로 불러요. 섭섭하지 않으나.”

“하지만, 그대로…….”

로제타가 주저하자 테런은 마치 그녀를 안심시키기라도 하는 것처럼 한마디를 더 힘주어 덧붙였다.

“정말, 정말 괜찮아. 이렇게 내 옆으로 돌아와 줬으니까.”

테런이 따뜻한 미소를 입술에 매달았다.

“대신, 이름은 제대로 부르고 싶어요. 로제타 양이 아니라, 로제라고.”

마치 허락을 구하기라도 하듯 테런이 로제타에게 시선을 마주쳐 왔다.

“그래도 될까?”

로제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로제’가 원래의 제 이름임에도 불구하고 ‘로제타’라고 불리며 살아온 기간이 훨씬 더 길어서 본명이 낯설고 어색했다.

하지만 테런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이름이 너무도 달콤하고 감미로워 마치 애칭이 불리는 것만도 같아 심장이 간지러웠다.

“고마워요.”

그는 현재 조금 두서없이 말을 낮추기도, 높이기도 하고 있었는데, 로제타는 그것이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테런 역시 자신과 마찬가지로 현재 상황이 조금 혼란스럽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안심되는 터였다.

“무슨 이야기를 먼저 꺼내야 할지 모르겠어요.”

“뭐든 하고 싶은 말부터 해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은걸요. 순서를 정하지 못하겠어요.”

“그러면 내가 궁금한 것부터 대답해 줄 수 있습니까?”

“네, 그렇게 해요.”

테런이 양손을 맞붙인 채, 천천히 비볐다. 제법 초조해 보이는 기색이었다.

“그동안…… 기억을 잃었던 건지. 아니면 일부러 몸을 숨긴 건지.”

그의 말을 부정하듯 로제타는 테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부터 저었다.

“일부러 숨은 건 절대 아니에요. 그동안 기억을 잃었던 게 맞아요.”

“어째서……?”

그의 목소리는 마치 갈증이 나는 것만 같았다.

“15년 전, 제가 6살일 때……. 전 버려졌어요. 눈이 무척이나 많이 오는 날이었죠. 따뜻한 옷을 입지 못했었고, 긴 거리를 걸어서 이동했어요. 어린 몸에 탈이 났고, 그만 열이 올라 정신을 잃었죠. 그 후유증 때문인지 쓰러지기 전의 기억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어요.”

그렇게 6년간 로제로 살았던 기억을 잃어버린 대신, 그녀는 그전의 삶이었던 홍장미의 생을 떠올렸다.

침통한 표정으로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테런이 더없이 무거운 얼굴과 목소리로 물었다.

“누가 당신을 버린 겁니까?”

“처음엔…… 엄마에게서 버림받은 줄 알았어요.”

기억을 잃었던 시간 동안, 하나의 꿈을 반복해서 꾸었다.

그 꿈속에서 눈밭을 끊임없이 걸으며, 자신은 ‘엄마, 엄마아.’ 하고 울음을 터트렸으니까.

아무것도 몰랐을 땐, 자신을 클리프 남작가에 버린 것으로도 모자라 간절하게 거듭 붙잡으려던 제 손을 매정하게 내친 그 여자가 꼼짝없이 제 엄마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이제 와 기억을 되찾고 나니 그녀가 정말 자신의 친모라서 그렇게 운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저 다른 아이들이 그러하듯 서러울 때 ‘엄마’를 찾으며 울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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