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34화
로제타가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불을…….”
이전처럼 최대한 담담하게 설명하려고 노력했지만, 이성을 배반하듯 목소리가 덜덜 떨리며 흘러나오고 있었다.
“뭐?”
“불의 정령을 소환해 위협…… 했어요.”
그때의 기억이 다시 살아나기라도 한 듯 로제타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호흡을 멈추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겁을 주려고 한 게 아니라, 정말로…… 절 다치게 하려고.”
주먹을 쥔 테런의 손등에서 뼈와 힘줄이 도드라졌다.
로제타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서둘러 손을 들어 올린 그녀가 손바닥으로 그 눈물을 훔쳤다.
그 안쓰러운 모습에 테런이 자리에서 일어나 로제타에게로 다가갔다.
그녀의 어깨가 작게 들썩이고 있었다.
아픈 눈길로 잠시 바라보던 테런이 팔을 뻗어 로제타의 어깨를 감싸 안고 제게로 끌어당겼다.
테런은 조심스럽게 손을 다독이며 로제타를 달래 주었다.
“미안해, 로제. 네가 힘들 때마다 곁에 있어 주지 못해서.”
그의 목소리가 상당히 먹먹했다.
꾹 참고 있던 로제타의 눈물이 다시금 터져 나왔다.
로제타가 테런의 품에 안겨 들자 갈아입었던 빳빳한 셔츠가 다시 젖어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간이 지났을까.
방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테런이 떨리는 숨을 들이켰다.
둘 사이에 무엇인가가 끼어들자 한결 이성을 찾기 쉬웠다.
로제타도 조금 진정이 됐는지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아래로 떨구고 있었다.
테런은 그녀의 어깨를 살짝 잡아 떼어 놓으며 애써 다정히 말했다.
“부탁했던 수프인가 봅니다. 앉아 있어요. 내가 받아 올 테니까.”
테런이 거칠게 숨을 몰아 내쉬고 몸을 돌렸다.
방문 쪽으로 다가간 그가 힘없는 손길로 문을 열었다가 그만 멈칫하고 말았다.
“……아버지?”
테런의 그 목소리에 로제타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테런과 인상과 분위기가 비슷한 중년의 남성이 서 있었다.
로제타가 얼떨결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긱스에게 듣고 왔다.”
제임스는 테런을 보며 딱딱하게 대답했다.
지난밤, 아니, 새벽에 저와 대화하다가 창문으로 뛰어내린 아들에 대한 앙심이 풀리지 않은 듯 보였다.
책하는 눈빛으로 테런을 잠시 흘겨 보던 제임스가 방 안에 있는 로제타와 시선이 마주치자 이내 숨을 들이켰다.
“처음 만나는군요. 괜찮으면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그녀를 바라보는 제임스의 얼굴엔 따뜻한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아, 네. 네! 물론이에요. 들어오세요.”
“고마워요.”
문을 거의 가로막고 있다시피 하던 테런이 마지못해 비키며 길을 내 주자 그 사이를 비집고 제임스가 안으로 들어왔다.
심지어 그는 작은 트레이를 하나 들고 있었다.
막 끓인 듯 고소한 향을 풀풀 풍기는 수프였다.
제임스는 그것을 로제타의 앞에 내려놓으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긱스가 이걸 좀 올려 주라고 하더군요.”
“직접, 수고스럽게……. 감사합니다.”
“뭘. 가볍기 그지없어 전혀 품이 들지 않았습니다.”
“아, 앉으세요. ……아버님.”
마땅한 호칭을 찾지 못했던 로제타가 얼떨결에 제임스를 아버님이라고 불렀다.
“듣기 좋군요, 그 호칭 말이에요. 내가 눈을 감는 날까지 들을 일이 있었을까 싶었는데. 감개가 무량합니다.”
제임스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제법 호의적인 빛을 띠고 있었다.
제임스는 조금 전까지 테런이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았고, 테런은 다른 곳에서 직접 의자를 하나 들고 와 그의 옆에 앉았다.
“놀랐습니다. 수도에 있을 사람이 갑자기 도착했다고 해서 말이에요.”
“아, 그게…… 여러 사정이 좀 있어서.”
로제타가 말꼬리를 흐리다가 아직 제 소개를 정식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 인사드려요. 로제타 클리프라고 합니다.”
로제타가 습관적으로 클리프가의 성을 대자 테런이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바로 내저으며 정정했다.
“아니지, 로제.”
“네? 아…….”
“당신 이름은 그게 아니잖아.”
“그게 무슨 소리냐, 테런?”
제임스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제 아들을 돌아보았고, 로제타는 눈을 굴렸다.
잠시 주저하던 그녀가 어렵사리 입술을 열어 제 소개를 다시 했다.
“로제, 안나…… 랭우드입니다.”
제임스의 입술이 슬그머니 벌어졌다.
그의 얼굴에는 경악의 빛이 살짝 어리기까지 했다.
“그게 무슨…….”
제임스가 곧 매서운 눈빛으로 테런을 노려보았다.
“테런! 대체 이게 무슨 실례더냐? 내가 어젯밤 네게 했던 말을 그새 잊은 게야?”
“아버지. 그게 아니고…….”
자신 때문에 두 부자의 언성이 높아지는 것을 난감한 얼굴로 바라보던 로제타가 한숨을 삼키고 입을 열었다.
“노아스.”
그녀는 이제 막 계약한 땅의 정령을 소환했다.
그러자 바닥에서 푸슈슉 하는 소리와 함께 흙이 솟구쳐 오르더니 이내 한 덩어리로 뭉쳐지며 중형견의 모습을 만들어 내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제임스의 눈이 동그래진 것은 물론이었다.
“이게 어떻게…….”
로제타가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선 노아스를 보여 드리는 편이 믿기 쉬우실 것 같아서요.”
제임스의 떨리는 눈이 노아스에게서 다시 로제타에게로 건너갔다.
“정말…… 네가, 아니 영애가 캐드릭의 딸이오?”
로제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기억을 잃어서 나타날 수가 없었어요. 저도 제가 랭우드의 직계손이라는 것을 몰랐거든요.”
한결 침착함을 되찾은 제임스가 질문을 이었다.
“그런데 이건 내가 아는 노아스의 모습이 아닌데? 오히려 토토 같기도 하고…….”
로제타가 난처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제가…… 친근감을 느낄 만한 모습으로 변한 상태래요. 원래 모습은 아버님께서 아시듯 거대한 늑대구요.”
설명을 마친 로제타가 다시 노아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노아스, 나타나 줘서 고마워. 수프 좀 먹고 갈래?”
-싫다.
노아스가 콧방귀를 뀌며 신경질적으로 꼬리를 탁탁 치고는 이내 모습을 허물어트렸다.
그렇게 노아스는 다시 정령계로 돌아갔다.
제임스는 방금 전까지 노아스가 서 있던 곳에서 도무지 눈을 떼지 못하고 망연하게 중얼거렸다.
“정말, 너무 갑작스러워서 뭐가 뭔지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는구나…….”
그는 심란한 얼굴을 감추기라도 하려는 듯 두 손으로 얼굴을 덮듯이 감쌌다가 이내 마른세수를 했다.
그러다 이내 떼어 내고는 로제타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그녀의 두 손을 덮듯이 쥐며 그가 힘주어 말했다.
“그래도 네가 살아 있어서 정말 다행이구나 싶다, 로제.”
테런의 눈썹이 잠깐 꿈틀했으나 제 아버지를 따로 말리거나 방해하지는 않았다.
“감사해요, 아버님. 그런데 아버님도 아셔야 할 일이 있어요.”
“그게 뭐지?”
“랭우드의 몰락에 리스턴이 개입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예요.”
로제타는 테런에게 했던 이야기를 제임스에게도 들려주었다.
두 부자가 똑같이 팔짱을 낀 채 심각한 얼굴로 그녀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었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제임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네 말대로 이상한 점이 많구나. 그리고 의심스러운 정황이 충분하고.”
테런이 분개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리스턴 후작가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15년 전과 그리고 이번에도 로제를 위협한 죗값을 톡톡히 치르게 할 겁니다.”
“침착해라, 테런. 감정을 쉽게 내보이다간 오히려 일이 틀어질 수도 있으니까.”
제임스는 냉정하게 말했다.
그러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로제타를 바라보며 자상하게 말했다.
“수프가 그새 식어 버렸구나. 새로 식사를 올려 달라고 해야겠다.”
“아, 아뇨. 차가운 것도 잘 먹어요.”
“음식은 차게 먹는 게 아니야.”
제임스는 묵직한 한숨을 몰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선 이 이야기는 나중에 더 나누자꾸나. 당장은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말이다. 테런. 설마 잊은 건 아니겠지?”
“……예.”
로제타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테런을 건너다보았다.
그러자 테런이 탐탁지 않다는 듯 설명을 이었다.
“오늘 콘웰 전 지역에 큰비가 내릴 겁니다. 다른 곳은 모르겠지만, 이곳, 카르나 마을은 특히 지반이 약해서 강약을 조절해야 합니다. 마을 뒤편의 댐도 오래되어 자칫 붕괴될 위험이 크니까.”
“아……. 맞아요. 그 일 때문에 시찰을 떠나신 거였죠.”
제 문제가 너무 커 그만 깜빡 잊고 있었다.
“그럼 테런. 로제와 함께 있다 나중에 늦지 않게 건너오려무나.”
“알겠습니다.”
제임스가 방을 나가자 다시 로제타와 테런 둘만 남아 있게 되었다.
로제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곳만 비를 내리지 않게 할 수는 없나요?”
테런이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가 떼며 입을 열었다.
“사실 그럴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무리일 듯해요. 식수원 문제와도 연결이 되어 있어서 비가 오는 게 좋다는 판단이 들었거든요. 되도록 피해가 없게끔 세심하게 신경 써야죠.”
“바로 나가셔야 하나요?”
테런이 고개를 저었다.
“점심때가 지나면 시작할 겁니다. 로제, 당신만 괜찮다면 함께 갈까요?”
로제타가 토끼 눈을 떴다.
“그래도 되나요?”
테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내 옆에 두는 게 제일 마음 놓이고 안전할 것 같아서. 그리고 더 이상 떨어져 있고 싶지 않기도 하고.”
“그럼 갈게요.”
로제타는 바로 대답했다.
그녀로서도 혼자 이 여관방에 있는 것보다 테런의 옆에 함께 있는 편이 훨씬 마음이 놓였기 때문이었다.
“혹시 제가 도울 일이 있을지도 모르고요.”
그녀가 조용히 한마디를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