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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애 옆에 예쁜 애-135화 (135/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35화

* * *

여관방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들고 난 뒤, 로제타는 테런과 함께 여관을 나서 마을 뒤편의 언덕으로 향했다.

카르나 마을의 지형을 잠깐 설명하 자면 마을 어귀 반대편에 큰 댐이 있고, 바로 그 앞에 동산 같은 작은 언덕이 하나 있다.

그 언덕에서 댐의 상황을 가장 잘 확인할 수 있기에 오늘 그곳에서 큰 비를 내리는 의식을 치르기로 결정된 터였다.

그곳엔 앞뒤로 뻥 뚫린 막사 같은 것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미 많은 사람이 그쪽에 도착해 비를 피하고 있었다.

아직은 빗줄기가 가늘어 대충 육안으로 살필 수가 있었는데 체이스와 제임스도 도착해 있는 것 같았다.

“우리가 제일 늦었나 봐요.”

괜히 마음이 급해진 로제타가 걸음을 재촉하려 했지만, 테런은 느긋했다.

“괜찮아요. 아직 시간 전이니까.”

“전 여기에 있을게요.”

언덕 위에 오른 뒤, 로제타는 조심스럽게 테런의 손을 놓고 막사의 가장 끝부분에 멈춰 섰다.

중요한 행사이니만큼 테런은 정복으로 옷을 또 갈아입었다.

하지만 로제타는 계획하고 이곳까지 찾아온 게 아닌 만큼 그녀의 차림은 상대적으로 초라할 수밖에 없었다.

테런의 옆에 서면 혹시라도 그가 우스워 보일까 봐 몇 걸음 뒤에 섰는데, 그 모습을 본 테런이 눈매를 살짝 좁힌 뒤 로제타의 손을 잡고 제 옆으로 데리고 왔다.

“내 옆에 있어요.”

테런의 행동에 이미 언덕 위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로제타에게로 모였다.

하지만 테런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데리고 체이스에게로 다가갔다.

“왕자님. 저희 왔습니다.”

테런의 목소리에 등을 돌리고 서 있던 체이스가 반색하며 돌아봤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공작, 이제 왔습니까? 어? 그런데…… 클리프 영애?”

로제타가 민망한 듯 웃으며 체이스에게 예를 차렸다.

“왕자님. 이곳에서 또 뵙습니다. 강행군이라 들었는데 무탈하신 모습을 봐서 기뻐요.”

당황한 체이스가 더듬더듬 물었다.

“영애가 여길 어떻게……?”

로제타가 쓰게 웃었다.

체이스가 당황해하는 걸 눈치챘지만, 저로서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했기 때문이다.

“어쩌다 보니 일이 그렇게 되었네요.”

“사정은 나중에 설명하겠습니다.”

로제타를 대신해 입을 연 테런의 짤막한 말에 체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곧 폭우를 내리게 해야 할 때였다.

체이스가 긴장을 덜어 내려는 듯 숨을 길게 몰아쉬고는 손에 든 것을 꽉 쥐었다.

시찰을 떠나기 전, 국왕으로부터 건네받은 물의 아티팩트였다.

최상급의 투명 크리스털에 국왕이 직접 물의 정령의 힘을 불어넣은 것이었다.

체이스는 기본적으로 바론보다는 물에 대한 친화력이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아직 어린 데다가 국왕 후계자가 아니기에 심도가 있는 훈련을 받지는 못했다.

그래서 물의 힘을 세심하게 컨트롤 하는 것이 힘들었다.

체이스가 아티팩트를 이용해 많은 양의 비가 오게끔 만들면, 바람의 힘을 다스리는 테런이 세부적으로 강수량을 조절하기로 했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요?”

체이스가 자신감 없이 중얼거렸다.

그는 조금 주눅이 들어 있는 듯 보였다.

사실 체이스가 이제껏 사용해 본 물의 힘은 로제타가 실프를 다뤘던 만큼 아주 간단한 일 정도였다.

그렇기에 이번처럼 국가적인 행사에서 큰 힘을 사용해야 하는 것이 무척 큰 부담으로 다가온 듯 보였다.

“물론입니다, 왕자님.”

“왕자님 말고는 누구도 이 일을 해낼 수 없는 것을요.”

다들 진심으로 한마디씩 체이스를 격려해 주자, 소년이 크게 숨을 들이켰다가 뱉으며 말했다.

“다들 그렇게 말해 주어 고맙습니다. 제가 너무 어리광을 부린 듯하군요.”

정말 보면 볼수록 애어른이 따로 없었다.

“이제 시작하시죠.”

테런의 나직한 말에 체이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체이스가 아티팩트를 꼭 쥐고 있던 손가락에서 힘을 빼었다.

두 손바닥을 나란히 붙이자 체이스의 작은 손안에서 물의 아티팩트가 두둥실 떠올랐다.

소년의 얼굴에 이내 긴장의 빛이 잔뜩 어렸다.

“엘라임. 비를 내려 주세요.”

소년의 목소리에 방금까지 손바닥에 가만히 올려져 있던 둥근 구체 모양의 아티팩트가 두둥실 허공으로 떠올랐다.

아티팩트는 청량한 기운을 마구 내뿜기 시작하더니 이내 하늘 위로 솟구치듯 올라갔다.

쿠쿠쿠쿠궁.

그 힘에 반응하기라도 하듯 하늘에서 거센 천둥소리가 들려왔다.

언덕에 모여 있는 모두의 어깨를 움찔하게 만들 정도로 커다란 소리였다.

하늘의 먹구름은 더욱 꾸물거리며 자기들끼리 몸을 맞부딪혔다.

그러길 잠시, 이내 빗줄기가 점점 더 굵어지며 잠시 후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의 장대비가 무섭게 쏟아져 내렸다.

막사의 천장에 해당하는 천막 역시, 우두두두 소리를 내며 간신히 비를 막고 있었다.

그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자니, 마치 기관총이 난사하는 소리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물론 이 세계엔 총이 없지만.’

그렇게 한참 동안 비가 쏟아져 내렸다.

낮임에도 불구하고 두꺼운 먹구름 때문에 주위가 상당히 어둑했는데, 그때 저 멀리 댐 쪽에서 노란 불빛이 하나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 불빛은 좌우로 흔들리며 마치 어떤 사인을 주기 시작했다.

로제타는 그것을 구조 신호로 오해했다.

“공작님. 저기 누가 있나 봐요. 위험할 텐데…….”

“괜찮습니다. 일부러 보내 놓은 사람이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일부러요?”

테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이었다.

“이번 비는 댐 안의 수위를 채우는 것과도 연관이 있어요.”

댐은 식수원인 것과 동시에 콘웰 각 지역의 농경지에 농수로 이용되는 물이기도 했다.

가뭄이 든 것도 아니었으나, 희한하게 수위가 낮아 문제가 되었다.

하여 이번 우기를 통해 물을 채우는 것이 하나의 목적이었다.

벽 위에 선 사람이 댐 안쪽의 수위를 확인하다가 적당히 차올랐을 때 횃불을 휘둘러 언덕 쪽으로 신호를 주면 그때가 바로 테런이 나설 때였다.

횃불이 물에 닿았을 때 꺼지지 않도록 심지에 기름종이도 넉넉하게 둘러 둔 덕분에 이 폭우에도 불빛이 잘 보였다.

“이제 슬슬 가 봐야 할 때군요.”

테런이 로제타의 손을 가만히 놓으며 말했다.

“로제. 당신은 여기에 있어요.”

그런 뒤 그는 혼자서 막사 밖으로 나갔다.

애써 차려입은 정복은 거센 빗줄기에 젖었다.

로제타가 불안하고 걱정되는 눈빛으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하자, 근처에 있던 제임스가 슬쩍 다가와 한마디를 보태었다.

“바람의 힘을 사용해야 해서 나간 거란다. 이곳에서 힘을 썼다간 강풍에 사람들이 휘말려 다칠 수 있으니까.”

“그렇군요…….”

제임스의 설명에도 로제타의 얼굴에선 걱정의 빛이 가시지 않았다.

굵은 빗줄기를 그저 몸 하나로 버티고 있는 테런을 보며 걱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큰 숨을 들이마신 모양인지 그의 등허리에 딴딴하게 힘이 실렸다가 풀어졌다.

이윽고 테런이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피르.”

그러자 마치 부르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피르가 어디선가 빗줄기를 뚫고 날아왔다.

본체가 아니라 손바닥만 한 크기였는데, 그렇게 날아온 피르는 구부러트린 그의 검지에 가만히 앉아 날개를 접었다.

테런의 검은 머리카락이 빗물에 씻기듯 흘러내렸다.

그는 고개를 들어 올려 제 정령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피르. 먹구름을 멀리 보내 줘.”

그의 말이 끝나자, 피르가 다시 날개를 펼쳐 들었다.

그의 손가락을 박차고 날아오른 피르의 몸은 하늘로 솟구쳐 올라갈수록 점점 더 커졌다.

이번 역시, 수도를 떠나기 전 왕국민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던 것처럼 일반인들도 정령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상태였다.

그와 동시에 테런이 선 곳을 중심으로 땅에서부터 거센 바람이 소용돌이처럼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마치 튕기듯 사방으로 흩날렸다.

키이이이이-.

가까이 있음에도 피르가 내는 소리는 멀리서 들려오는 것처럼 아련했다.

땅에서 피어오른 바람은 점점 더 거세졌다.

어느덧 제 원래 크기로 돌아간 피르가 큰 날개를 펄럭이며 바람을 일으켰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먹구름이 물러가지 않는 데다 하늘에서 내리는 빗줄기의 위세 또한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다.

테런의 얼굴이 사정없이 찌푸려졌다.

본능적으로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눈치챘다.

“왜 이러지?”

악문 잇새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지나치게 힘이 실려 있었다.

테런의 관자놀이에 힘줄이 도드라졌다.

테런은 단단히 그 자리에 버티고 서서 힘겹게 막사 쪽을 돌아보았다.

비 때문에 눈을 뜨기가 매우 힘겨웠지만 참아 냈다.

그리고 곧, 체이스가 들고 있는 아티팩트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아티팩트는 처음 힘을 발현할 때보다 더욱 강력하게 물의 기운을 발산하고 있었다.

마치 체이스에게 공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만약 체이스가 능란하게 힘을 다룰 수 있었다면 일찍이 제어했겠지만, 아직은 무리였다.

그래서 물의 힘이 이토록 날뛰는 것이었다.

예상보다 많은 물을 머금은 먹구름은 무거워졌고, 그래서 바람에 쉽게 밀리지 않았다.

하늘에선 마치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계속해서 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테런은 좀처럼 비구름을 몰아내지 못했다.

그러자 댐 벽 위에서 대기 중인 사람이 휘두르는 횃불의 속도가 더욱 빨라졌다.

그 동작에서 다급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슬아슬할 정도로 물이 차오른 모양이었다.

“젠장, 빌어먹을!”

테런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가 험악하게 욕설을 뇌까리며 조금 더 정신을 집중해 피르의 힘을 끌어오려고 했다.

하지만 피르가 몰아내는 비구름보다 체이스의 힘에 이끌려 새로이 몰려드는 적란운의 수와 양이 훨씬 더 많았다.

구름끼리 부딪치며 만들어진 번개는 수시로 내려쳤고, 그 뒤를 따르듯 쿠르르릉, 천지를 뒤엎을 듯 커다란 천둥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테런의 마음은 갈수록 더욱 조급해져만 갔다.

“제발, 피르. 힘을 좀 더 내.”

그사이, 돌아가는 일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제임스가 막사에서 나왔다.

“테런!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어째서 비가 그치지 않고 있어?”

하지만 테런의 주위로 거센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기에 그 강풍을 뚫고 아들에게 다가가는 일이 제법 버겁고 힘들었다.

제임스가 두 팔로 제 얼굴을 가로막으며 힘겹게 걸음을 떼었다.

그 모습을 본 테런이 목청을 높였다.

“아버지! 저한테 오실 필요 없습니다. 왕자님이 들고 있는 아티팩트를 뺏으십시오!”

“뭐?”

“물의 힘이 지금 너무 강합니다! 비를 그치게 해야 합니다!”

그때. 댐 쪽에서 쩌억, 무엇인가가 갈라지는 듯한 커다란 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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