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36화
지금 내리고 있는 비는 땅을 팰 정도로 거센 빗줄기였다.
그 엄청난 빗소리와 천둥소리를 뚫고 들려온 쩌억거리는 소리는 모두의 가슴에 불안감을 심어 주었다.
굉음은 연이어졌다.
제임스와 막사 쪽을 바라보고 있던 테런의 시선이 다시금 댐 쪽으로 돌아갔다.
그의 움직임이 무척이나 뻣뻣했다.
아니, 어디 그만 그곳을 바라봤을까.
이 언덕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댐 쪽으로 향했으리라.
그들은 댐 벽 위에 서서 횃불로 신호를 주던 사람이 빠르게 이동하는 것을 보았다.
그가 들고 있는 횃불의 불빛이 댐의 한가운데서 오른쪽 절벽 끝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제임스가 곧장 막사를 돌아보며 외쳤다.
“왕자님! 아티팩트를 멈추십시오!”
“예? 제임스 공, 왜 그러시는지……?”
“어서요!”
하지만 이미 늦은 터였다.
또 한 번 지축을 흔들 정도로 커다란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이상 신호는 더 있었다.
댐은 마주 보고 있는 두 개의 절벽을 잇듯 막아 놓은 형태였다.
평평해야 할 댐 벽의 한가운데가 마치 압력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앞으로 불룩하게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어? 어어……!”
그쪽을 바라보고 있던 모두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숨을 죽인 채 댐 벽을 주시했다.
이내 고막을 찢어 버릴 듯 엄청난 소리와 함께 불룩하게 솟아올랐던 댐 벽이 터졌다.
댐을 이루고 있던 흙과 돌들이 마치 투석기 위에 올려졌다가 쏘아진 듯 매섭게 허공을 가르며 사방으로 날아갔다.
그와 동시에 댐 안에 갇혀 있던 물은 해방되어 자유를 찾았다는 듯 서로 앞다투어 튀어나왔다.
“댐이 터졌다!”
하얀 물보라까지 일으키며 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나마 댐 바로 아래 나무가 있어 직접적인 충격이 덜했지만 그마저도 순간일 뿐이었다.
폭우로 인해 불어난 물의 양이 워낙 많았다 보니 유속이 너무도 빠르고 거세어 나무들도 꺾이거나 뿌리째 뽑혀 휩쓸려 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토사가 빠른 속도로 마을을 향하고 있었다.
“왕자님! 어서 아티팩트의 시동을 끄세요!”
한걸음에 다시 막사로 돌아온 제임스는 체이스의 손바닥 위, 허공에 둥둥 떠 있는 아티팩트를 거친 손길로 낚아챘다.
그런 뒤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단도를 꺼내 아티팩트의 꼭대기에 꽂아 넣었다.
본래라면 왕가의 물건에 이런 식으로 흠집을 내면 안 된다.
하지만 지금은 사안이 사안이니만큼 불경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제임스가 아티팩트를 깨트리자, 구체가 두 동강 났다.
그와 동시에 체이스의 손바닥에서 피어오르고 있던 푸른 기운 역시 조금씩 옅어지며 이내 사라졌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비가 그치고 천둥이 멎었다.
그때, 테런이 큰소리로 외쳤다.
“당장 마을로 내려가! 주민들을 대피시키게!”
테런의 호령에 막사 안의 모두가 우왕좌왕했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중에선 제니스도 있었다.
그녀는 비를 맞으면서도 있는 힘껏 목청을 높여 시찰단을 이끌었다.
“그쪽 말고, 이쪽으로요! 이쪽 샛길로 내려가는 게 훨씬 빨라요!”
그녀는 주도적으로 움직였다.
“다들 이쪽으로 오십시오!”
긱스도 제니스를 도와 시찰단을 이끌었다.
그렇게 시찰단들이 빠르게 마을 쪽을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언덕에 아무도 남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체이스와 제임스, 테런, 그리고 로제타가 언덕 위에 남아 있었다.
새파랗게 질린 체이스가 바들바들 떨며 겁에 질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소년은 비틀거리며 뒷걸음질 치다가 돌부리에 걸리기라도 한 듯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체이스의 시선은 부서져 버린 댐 쪽에 닿아 떨어질 줄 몰랐다.
“나, 나 때문에 댐이 터진 건가요? 내가…… 내가 미숙해서?”
“아닙니다, 왕자님! 자책하지 마십시오. 왕자님의 탓이 아닙니다.”
제임스가 곧바로 부정했다.
그는 왕족을 상대로 무례한 일이라는 것도 잊고 사시나무 떨듯 흔들리는 아이의 몸을 꽉 껴안아 등을 쓸어 주며 달래 주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물은 계속해서 폭포처럼 쏟아져 내렸다.
테런은 계속해서 이를 악물고 힘을 사용했다.
하지만 피르의 힘으로도 쏟아져 내리는 물을 멈추게 하거나 방향을 틀게 하는 일은 무리였다.
로제타는 멍하니 댐을 바라보다가, 필사적인 테런의 얼굴을 잠시 훔쳐보았다.
갑작스럽게 인 커다란 소란에 내내 갈 곳을 잃고 두서없이 흔들리던 그녀의 눈동자가 이내 떨림을 멎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어떠한 결의가 솟구쳤다.
로제타는 바닥을 주시하며 짧게 숨을 몰아 내쉬었다.
이내 그녀가 입술을 열어 작게 목소리를 내었다.
“노아스.”
그러자 땅에서 흙이 솟구치더니 빠르게 뭉쳐져 토토의 모습을 만들어 내었다.
로제타가 심각한 얼굴로 노아스를 바라보며 물었다.
“노아스. 어디까지 날 도와줄 수 있어?”
-네가 원하는 데까지.
노아스로부터 원하는 대답이 들려오자 로제타가 비장한 표정으로 크게 숨을 들이켰다.
“좋아. 그렇다면 노아스, 당장 네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그리고 날 태워 줘.”
-무엇을 할 생각이지?
“댐은 지금보다 더 크게 무너질 거야.”
그녀가 한숨을 들이켠 채 가라앉은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
“마을이 물길에 휩쓸리면 방법이 없어. 그걸 막아야 해.”
-무섭지 않나?
로제타가 쓰게 웃었다.
“나 말곤 막을 사람이 없어.”
비장하게 말을 마친 로제타가 입고 있는 치마의 옆부분을 죽 찢었다.
그녀가 다음으로 무슨 행동을 할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노아스가 턱까지 바닥에 붙이며 납작 엎드렸다.
로제타는 망설임 없이 그 위에 올라탔다.
그때였다.
“로제!”
필사적인 테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로제타가 어디로 가려는지 안다는 듯 해쓱한 얼굴로 거칠게 고개를 내저었다.
로제타가 그를 돌아보며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자신의 결심을 막으려면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는 뜻이었다.
“피르의 바람으론 저 거친 물을 막을 수 없어요.”
“하지만……!”
“공작님. 이건 내 의무예요.”
비록 땅의 가문의 일원으로서 권리는 아무것도 누리지 못했으나, 그래도 로제타는 저버릴 수 없었다.
이대로 자신이 제 안위만 생각한다면 카르나 마을은 수장될 것이고, 인명 피해도 발생할 터였다.
그것을 지척에서 봐야 하는 로제타는 아주 오랜 시간 마음에 돌덩이를 얹고 살아야 할지도 몰랐다.
“할 수 있는 일이 있는데, 무섭다는 이유로 피하고 싶지 않아요.”
“로제, 제발.”
테런도 카르나 마을의 주민들을 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바람은 로제타의 안전이었다.
이율배반적이게도 그는 그녀가 안전할 수만 있다면, 저들을 포기할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공작님. 나는 앞으로 랭우드로 살아갈 거예요.”
로제타는 숨을 들이켰다. 그런 뒤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일은, 내가 만들어 가는 미래의 가장 첫 계단이 될 거예요.”
그녀가 내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로제타는 망연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테런의 시선을 받아 내며, 그를 향해 애써 눈을 휘어 웃어 보였다.
“그러니까…… 나를 응원해 줄 거죠? 오라버니.”
테런에게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로제타 역시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제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시선을 떼어 냈다.
그것을 신호로 노아스가 빠른 속도로 땅을 박차며 언덕 아래로 달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로제!”
애타는 테런의 부름을 뒤로한 채, 로제타는 노아스의 등허리에 납작하게 엎드렸다.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이 거센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처럼 너울거렸다.
“그런데 노아스. 힘은 어떻게 쓸 수 있는 거야?”
무각성 상태에서 몇 차례 땅의 힘을 쓴 적이 있긴 했다.
하지만 다급한 상황에서 사용한 적은 없는 터라 대놓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노아스는 빼지 않고 친절하게 대답을 돌려주었다.
-염원하라.
“염원? 그저 바라기만 하면 된다고?”
-정령의 힘을 쓸 수 있는 것은 생각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아이야.
“생각을 구체화시키라는 말이 무슨 뜻이야?”
-땅과 흙을 어떻게 이용할 것이고, 어떤 모양으로 만들어 저 물길을 막을 것인지 그걸 네 머릿속에서 미리 만들어 보는 것이지.
“정말 그렇게 하면 땅의 힘을 쓸 수 있다고?”
-그래. 너는 다른 누구도 아닌 랭우드의 후손, 내 힘을 이어받은 자이니 가능하다.
노아스의 말에 로제타는 곧바로 골몰했다.
저 거센 물길을 막을 방법으론, 과연 어떤 것들이 있을까?
오래지 않아 로제타의 머릿속에 몇 가지 그림이 떠올랐다.
‘이게 정말 될까?’
하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조금은 허무맹랑한 방법인 것 같기도 해 망설여졌다.
하지만 로제타는 곧바로 마음을 다잡았다.
‘일단 해 보는 수밖에 없어.’
그녀는 묵직하게 숨을 내쉬며 복잡한 머릿속을 비워 내려고 했다.
되든 안 되든 일단은 시도해 보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그것 말고는 아무런 방법도 없으니까.
“노아스. 내 생각 읽었지?”
-그래.
로제타가 각오를 되새기듯 아랫입술을 힘껏 물었다가 풀며 비장하게 말 했다.
“좋아. 그러면 한번 해 보자.”
* * *
제니스의 안내에 따라 지름길로 언덕을 내려온 시찰단은 마을 곳곳을 뛰어다니며 집집마다 부서질 듯 문을 두드리고 다녔다.
“당장 나오십시오!”
“나오세요! 마을을 떠나야 합니다!”
그 소란에 마을 주민들이 찌푸린 얼굴로 하나둘 문을 열고 나왔다.
“댐이 터졌습니다! 가족들 데리고 나오세요!”
“그냥 몸만 빨리 빠져나오시라고요!”
만약 마을에 시찰단만 있었으면 조금 더 경계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을 주민들이 평소에 의지하던 제니스가 시찰단과 함께 발바닥에 불이 나라 뛰어다니고 있었다.
목이 터져라, 심각한 얼굴로 나와라, 피해야 한다 외치고 다니는 그녀의 모습에, 주민들은 경각심을 가지고 서둘러 집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제니스는 착실하게 사람들을 안전한 지대로 가게끔 인도했다.
“다들 이쪽으로!”
“빨리 오세요! 곧 물이 밀려들 거예요!”
카르나 마을은 아비규환이었다.
그때였다.
쿠구구구궁!
땅에 강한 울림이 일어나더니 그들이 딛고 있는 바닥이 미끄러지듯 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정확히 댐과 멀어지는 쪽이었다.
“꺄아아악!”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제니스와 긱스, 시찰단을 비롯해서 밖으로 나와 있는 마을 주민 모두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며 허우적거렸다.
그때 저 멀리서 집채만 한 커다란 흙색 늑대가 빠른 속도로 마을을 향해 돌진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