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예쁜 애 옆에 예쁜 애-138화 (138/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38화

로제타가 정신을 잃자 흙벽은 금세 허물어졌다.

땅 울림도 거짓말처럼 단번에 멎었고, 댐 쪽에서부터 흘러나온 물줄기도 약해지다 못해 힘을 잃었다.

테런은 정신을 잃은 로제타를 안아들고 곧장 시찰단의 숙소로 돌아왔

때마침 체이스와 함께 숙소로 돌아온 제임스가 문 앞에서 테런과 마주쳤다.

하지만 테런의 신경은 온전히 로제타에게만 쏠려 있어 두 사람이 돌아온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체이스는 테런의 품에 안겨 축 늘어진 로제타를 보고 상당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에스테스 공작! 클리프 영애가 왜 정신을 잃은 건가요?”

“왕자님. 우선은 영애의 상태를 살피고 안정을 취하게 하는 것이 우선일 것 같습니다. 잠시 후에 제가 아들놈을 부르겠으니, 그때 사정을 물어보시지요.”

“그, 그러는 게 낫겠습니다.”

테런을 쫓아 급하게 뛰어오던 긱스와 제니스가 체이스를 향해 꾸벅 인사를 하고는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공작님! 좀 침착하세요! 그러다 넘어지기라도 하시면 아가씨는 더 크게 다치신다고요!”

테런을 뒤따라오던 제니스가 일침을 날렸다.

그제야 테런의 급한 걸음이 조금씩 느려졌다. 그 사이를 틈타 제니스가 테런을 앞질러 걸었다.

그런 뒤 방문을 열고 로제타를 눕히기 쉽도록 이불을 걷어 주었다.

테런이 로제타의 몸을 침대에 누이자, 제니스가 눈치껏 로제타가 신고 있는 신발을 벗겼다.

로제타는 거의 흙투성이였기 때문에 침대는 금세 더러워졌다.

하지만 이 방에 들어와,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 중 그 누구도 그것을 불결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의사, 아니 치료사라도 불러 주게.”

테런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로제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긱스가 바로 대답했다. 제 상관이 조금이라도 마음을 놓길 바라서였다.

“제니스 양이 각하를 뒤따라오는 동안 불렀습니다. 곧 도착할 겁니다.”

“……고맙군.”

제니스는 테런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긱스에게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말했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니스는 발소리를 죽이며 곧장 방을 나섰다.

잠시 후, 그녀가 다시 돌아왔는데 손에는 따뜻한 물을 담은 대야와 조금 해지긴 했으나 빳빳하게 말려서 개킨 천이 여러 장 들려 있었다.

“공작님, 잠시만요.”

테런은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치료사님도 곧 오시겠지만, 그 전에 아가씨를 조금 닦아 드려야 할 것 같아요.”

“고맙네. 내가 정신이 없어, 세심한 것까지는 신경을 쓰지 못했어.”

테런은 순순히 제니스가 앉을 자리를 내어 주었다.

제니스는 꼼꼼하게 로제타의 얼굴과 손, 발 등을 닦았다.

“나머지는 내가 하지.”

제니스가 자리를 비켜 주자 테런이 곧장 로제타에게로 가까이 붙어 앉았다.

긱스의 옆에 선 제니스는 멀뚱하게 서 있는 그의 팔을 살짝 잡아당겼다.

“응?”

“뭐 하고 계세요? 나가요, 긱스 님. 저희가 이렇게 여기 있는 것도 눈치 없는 일이에요.”

“아? 아, 그래요.”

그렇게 긱스는 제니스가 이끄는 대로 따라 나왔다.

등 뒤로 문이 닫히기 무섭게 제니스가 목소리를 살짝 깔고 말을 붙여 왔다.

“그런데요, 긱스 님.”

“듣고 있습니다.”

질문해도 된다는 허락인 것만 같아 제니스가 기대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저 아가씨…… 랭우드의 자손, 맞는 거죠? 대가 끊긴 줄 알았던 그 후작가 말이에요!”

긱스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신중하게 고민하던 그의 미간이 한없이 좁아졌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은 하나였던 모양인지 그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자 제니스가 손뼉을 마주치며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역시 그랬군요! 그럼 아까 그 커다란 늑대는 땅의 정령이겠네요!”

“아마도요.”

“정말 다행이네요! 그런데 긱스 님, 왜 그렇게 얼굴을 찌푸리고 계세요?”

순수하게 기뻐하며 탄성을 터트리던 제니스가 긱스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제야 긱스는 자신이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곧장 얼굴을 풀었다.

‘그래. 제니스 양과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게 맞는 거지.’

윌셔스의 4가문 중 하나였던 랭우드의 재건이 아닌가!

심지어 로제타가 랭우드 후작 영애 본인이라니! 테런에게도 잘된 일이었고 제게도 잘된 일이었다.

‘잠깐만……? 그럼 앞으로 내가 할 일도 줄어들겠네!’

좀처럼 일이 진행되지 않던 도로포장 사업에 드디어 진척이 생길 것 같았다.

그제야 긱스가 참고 있던 숨을 몰아쉬며 제니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일이 줄어들 것이라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절로 콧노래가 흥얼거려졌다.

결국 두 사람을 엮어 준 것은 자신이 아니던가.

“이렇게 일이 잘 풀릴 줄이야! 과거의 나, 매우 칭찬한다. 긱스 라스크, 이 멋진 녀석!”

스스로 칭찬을 해 주다 보니 콧대가 한껏 높아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진심으로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보다도 테런의 가까이에서 그를 지켜봐 왔기에 알았다. 약혼녀가 죽은 줄로만 알고 있었던 테런이 그동안 얼마나 힘들어했는지.

어디 그뿐인가? 모르긴 몰라도, 로제타 역시 그동안 적잖은 고생을 하며 자라 온 것으로 알고 있다.

“인연은 인연인 게지. 아니, 운명인 건가.”

조금 길을 둘러온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아무렴 어떤가. 이제부터 더 잘 풀릴 것을.

긱스가 어깨를 쭉 펴며 걸음을 옮겼다.

* * *

긱스와 제니스가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로제타는 조금씩 정신을 차렸다.

미간을 찌푸리던 그녀의 입술 사이로 잠긴 듯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으음.”

테런은 그 작은 소리에도 곧장 반응했다.

“정신이 들어?”

로제타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니 수심에 잠긴 테런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오라버니.”

입 안이 텁텁했다.

마른 입술을 달싹이자, 테런이 눈치껏 그녀에게 물잔을 건넸다.

“받쳐 줄 테니 잠깐 일어나 보자.”

테런은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에 물잔을 도로 놔둔 뒤, 로제타의 등을 단단하게 받쳐 주며 일으켜 세웠다.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로제타는 침대 헤드에 기대며, 테런이 다시 내민 물잔을 받아 들었다.

마른 입 안에 청량감이 퍼져 나가자 비로소 제정신이 드는 기분이었다.

로제타가 단숨에 물컵을 비우자, 테런이 익숙하게 빈 잔을 받아 들며 말했다.

“치료사가 다녀갔어. 별다른 외상은 없다는데, 어디 아픈 덴 없는 거야?”

그녀를 살피는 표정에 걱정이 가득했다.

테런은 15년 전처럼 로제타에게 말을 낮췄고, 그녀 역시 그것에 별다른 위화감을 느끼지 않았다.

“괜찮아요. 아픈 데도 없고.”

그제야 테런이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금방 정신을 차려서 다행이야.”

그는 로제타를 꽉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로제타는 잠시 얼떨떨해하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테런의 등에 가만히 제 두 손을 올리며 다독거렸다.

“마을 사람들은 어때요? 죽거나 다친 사람은 없나요?”

“아무도 없어. 모두 멀쩡해.”

“다행이에요.”

로제타가 한시름 덜었다는 듯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테런은 더욱 힘껏 그녀를 끌어안았다.

“걱정 끼쳐서 미안해요. 그래도 나 잘했죠?”

“……그래.”

로제타가 이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야 바로 설 수 있겠어요. 로제 안나 랭우드로, 당신의 옆에.”

* * *

완전히 정신을 차린 로제타는 테런의 부축을 받으며 자신이 만든 골짜기로 향했다.

그곳으로 이동하는 동안 살펴보았지만, 마을은 별다른 피해가 없는 듯했다.

몇몇 물건들이 조금 떨어졌을 뿐인데, 그마저도 주민들이 부지런히 움직여 거의 다 수습이 된 터였다.

로제타가 상상한 대로 마을 전체가 통째로 움직인 덕분이었다.

로제타와 테런이 어느덧 흙벽이 세워졌던 마을의 경계에 다다랐다.

그 광경을 본 로제타가 진심으로 놀라 두 손으로 벌어진 제 입술을 가렸다.

“세상에……!”

그사이 침전물이 많이 가라앉은 모양인지, 안에 고인 물은 휩쓸려 내려올 때와 달리 제법 투명한 푸른빛을 내며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얼핏 호수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거대한 크기였다.

그녀가 테런과 함께 도착했을 땐, 이미 마을 주민 대다수가 나와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로제타의 시중을 들어 주었던 제니스가 촌장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런 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입술만 달싹거리고 있는 촌장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그제야 그가 로제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촌장이 먼저 그녀에게 감사와 존경을 표하자 그의 뒤에 서 있던 마을 주민들 또한 우르르 허리를 굽혔다.

“아가씨께서 저희 마을 사람들의 목숨을 살려 주셨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 고마움을 어찌 다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의 감사 인사를 받으며, 로제타는 주민들의 얼굴을 꼼꼼히 확인했다.

“다친 사람은 없어 보여서 다행이군요.”

테런에게서 이야기는 들었지만, 다시 한번 제 눈으로 그들의 안전을 확인하고 나니 비로소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로제타는 제니스와 마을 주민들을 향해 따뜻하게 웃어 보인 뒤, 시선을 호수 쪽으로 주었다.

“그나저나 이걸…… 어떻게 해 드려야 주민들이 조금이라도 편할까요?”

로제타의 말에 촌장과 마을 사람들이 무슨 말인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눈빛을 교환했다.

“원래는 없던 지형이잖아요.”

“아!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는 댐보단 이쪽에 이렇게 큰 호수가 생겨서 무척이나 다행이란 생각을 했어요.”

“맞습니다!”

“오히려 물길을 끌어오기가 훨씬 쉬워졌습니다! 더는 고생하지 않아도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제니스의 말을 거들 듯 마을 주민들이 한마디씩 보탰다.

로제타가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그렇게 생각해 주는 거라면 다행이네요.”

“다만…….”

제니스는 호수 건너 댐 쪽을 흘깃 바라보며 웅얼거리듯 중얼거렸다.

“저쪽 편으로 갈 일이 많다 보니, 그 점이 조금 걱정되긴 하네요.”

하지만 제니스는 얼른 웃는 낯으로 말을 마무리 지었다.

“그래도 지금이 훨씬 좋아요. 저편으로 건너가는 방법이야, 다리를 놓으면 될 테니까요.”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로제타가 불쑥 이런 말을 꺼내었다.

“굳이 다리를 놓을 필요가 있을까요?”

그러자 테런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웃음기를 머금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따로 설명을 듣지 않아도 눈치챈 듯싶었다.

그는 그녀의 말에 힘을 실어 주기라도 하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하기는요. 굳이 공간을 메우려 하기보다는 이쪽 땅과 저쪽 땅을 가로질러 갈 수 있는 길을 하나 내면 어떨까 싶군요. 그거라면 랭우드 영애께서도 그리 큰 힘을 쓰지 않아도 될 테고요.”

로제타를 부르는 테런의 호칭이, 클리프 영애가 아니라 ‘랭우드 영애’로 바뀌었다.

하지만 이곳에 모인 그 누구도 그 호칭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땅의 힘을 목격했는데 부정할 생각 따윈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 힘으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기도 했고 말이다.

테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카르나 마을의 촌장과 주민들이 좋은 생각이라며 입을 모았다.

로제타는 한 번 더 의중을 확인코자 그들에게 물었다.

“모두 동의하시면 바로 시작할게요.”

“반대할 이유가 없습니다. 저희가 직접 공사를 해서 다리를 만들어도 되는 일인데, 그리 해 주신다면 오히려 깊이 감사드릴 일이지요.”

“그러시다면 한번 해 볼게요.”

웃으며 대답한 로제타가 테런의 얼굴을 한번 슬쩍 바라보았다.

그러자 용기를 심어 주려는 듯 그가 로제타와 시선을 마주친 뒤 눈을 휘며 그녀의 손등을 다정하게 두드려 주었다.

살짝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이내 테런의 손을 놓고 몇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호수 앞에 선 그녀가 잠시 눈을 감으며 숨을 골랐다.

“노아스.”

그녀가 작지만 또렷하고 분명한 발음으로 제 정령을 소환했다.

그러자 언제나 그랬듯, 그녀의 발아래에서 흙이 거품처럼 일어나더니 이내 토토의 모습을 한 노아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동시에 서서히 노아스를 둘러싸고 있던 경계가 뚜렷해졌다.

노아스가 모습을 드러내자 시찰단과 마을 주민들 사이에 조용한 탄성이 흐르듯 지나갔다.

갑자기 나타난 존재에 경외심이 든 까닭이었다.

-랭우드의 아이야, 이번엔 무엇을 도와주랴.

하지만 정령의 목소리는 오로지 로제타만 들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 호수를 가로지를, 다리 역할을 할 땅을 만들고 싶어.”

-알았다. 어떻게 내어 주랴?

노아스의 질문에 로제타가 생각을 정리하듯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런 뒤 이 호수 위에 만들 길의 모양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수백 명이 동시에 올라 걷거나 뛰어도 절대 무너지지 않을 튼튼한 그런 땅이 이곳에 솟아오르길 바라.’

로제타가 참았던 숨을 길게 몰아 내쉬며 감았던 눈꺼풀을 다시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호수의 물이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오오오오!”

“저기를 좀 봐! 물이 갈라지고 있어!”

불룩해졌던 수면이 이내 갈라지며, 호수 한가운데 짙은 갈색을 띤 평평하고 탄탄한 땅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우와아아아!”

“땅이다! 진짜 땅이 생겼어!”

“랭우드의 재림이다! 진짜 땅의 후손이 돌아왔어!”

우레와 같은 외침이 사람들의 입에서 튀어나와 공처럼 튀어 다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