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39화
자신을 향한 환호성에 깜짝 놀란 그녀가 어깨를 굳혔다.
어느덧 로제타의 옆으로 다가온 테런이 가만히 그녀의 손을 쥐었다.
“오라버니?”
로제타와 시선을 맞춘 그가 따뜻하게 웃으며 잡고 있던 로제타의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얼떨결에 그녀가 환호하는 주민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는 모양새가 되었다.
사람들의 환호성은 더욱 커졌고, 잠깐 움찔했던 로제타는 이내 어깨를 바르게 폈다.
그녀의 눈동자에 뿌듯함과 자신감이 조금씩 차오르기 시작했다.
“이게, 내가 잃어버린 로제의 삶이었군요.”
오직 테런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았던 그녀의 목소리엔 왠지 모르게 먹먹함이 어려 있었다.
그렇게 한참 손을 흔들어 주고 난 뒤 로제타가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팔 아파요.”
그제야 테런이 그녀의 팔을 내려 주었다.
그러곤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쥐며 나지막이 말했다.
“이제, 수도로 돌아가자.”
로제타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초록빛 눈동자에서 일순 온기가 사라졌다.
그녀는 각오를 되새기듯 크게 숨을 들이켰다가 도로 내쉬며 말했다.
“그래야죠. 오래 묵혀 둔 빚을 갚아야 하니까요.”
딱딱하게 굳은 얼굴만큼이나 차가운 목소리였다.
* * *
콘웰에서의 시찰 일정은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땅을 고르던 인부들은 모두 일당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고, 남은 공사는 우선 보류되었다.
다 로제타가 땅의 힘을 각성한 덕분이었다.
사람의 손으로 땅을 일구고 돌을 깔아 박는 것보다 로제타가 정령의 힘을 쓰는 것이 비교할 수 없이 더 나았다.
이 윌셔스 왕국에서 정령의 가호만큼이나 확실한 힘은 없었기 때문이다.
로제타가 카르나 마을의 호수에 만는 흙다리, 그리고 콘웰의 중심부로 향하는 도로를 새롭게 다진 것이 그 증거였다.
“제가 랭우드라는 것을 밝히면 모두 놀라겠죠?”
“그렇겠지.”
테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누구도 로제, 너의 정당성에 의문을 품거나 제기할 순 없을 거야.”
이미 힘을 각성한 터였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능력을 발현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오히려 로제타의 입지를 더 공고히 다질 수 있었다.
무엇보다 도로 사업의 예산을 줄이라 닦달해 왔던 국왕이 가장 먼저 쌍수를 들고 환영할 터였다.
로제타는 카르나를 떠나기 전, 마을 뒤편의 부서진 댐으로 갔다.
노아스의 힘을 빌려 댐의 터진 부분들을 메꾸고 원래보다 더 튼튼하게 다져 주었다.
수도로 돌아가는 시찰단의 구성원은 한 명이 더 늘었다.
바로 제니스였다.
로제타의 제안에 제니스는 너무 좋은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고 그녀의 두 손을 꼭 잡은 채 눈물도 흘렸다.
테런과 결혼하게 되면 에스테스 공작가의 안살림은 로제타가 맡게 된다.
그리고 국왕으로부터 랭우드의 후계자로 인정받고 가문을 물려받게 될 가능성도 컸다.
그렇게 된다면 멸문으로 인해 뿔뿔이 흩어졌던 랭우드를 반드시 재건하여 운영하여야 한다.
후작가의 가신들을 다시 하나로 모아야 하기도 하겠지만, 자신의 사람도 필요했다.
로제타는 제니스가 제 사람이 되어 주리란 확신이 들었다.
“정말 열심히 보좌하겠어요, 아가씨.”
“나야말로 앞으로 잘 부탁해요. 제니스 양.”
로제타가 제니스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감격스럽게 쳐다보던 제니스가 이내 힘껏 맞잡았다.
* * *
에스테스 하우스는 최근 분위기가 무거웠다.
특히나 호위 기사들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자숙하는 분위기였다.
예비 공작 부인인 로제타의 생사가 불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사고에 관해선 카밀라의 재량으로 비밀에 부쳐졌다. 로제타가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바라면서.
예비 공작 부인과 관련한 일이니, 가주인 테런에게 곧장 보고하는 것이 옳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테런이 현재 국가적인 대사를 수행하고 있는 중이었기에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다.
하여 카밀라는 공작가의 기사단을 움직였다.
정복을 입고 수색을 하면 에스테스에 우환이 있음을 소문내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기사들 모두 사복을 입게끔 했다.
비밀리에 수색을 시킨 이유는 로제타의 안전을 위해서였다.
혹시라도 그녀의 신병이 안 좋은 무리에게로 넘어갈 수 있기에 조용히 찾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이라고 판단했다.
하여 바론이 예고도 없이 들이닥칠 때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그를 맞이하고 돌려보냈던 것이다.
하지만 에스테스 공작저 사람들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로제타는 며칠째 모습을 드러내지도, 소식을 전해 오지도 않고 있었다.
“더 이상은 기다릴 수 없겠다.”
에스테스 공작가의 기사단만으론 로제타를 수색하는 것에 한계가 느껴졌다.
카밀라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그녀는 굳은 얼굴로 착잡한 마음을 숨기며 말했다.
“로제타는 영리한 아이야. 운신이 자유로운 상태라면 공작저에 스스로 찾아오지 않을 리가 없지.”
그녀 나름대로 로제타를 아끼기도 했으나, 손자인 테런이 걱정되었다.
테런이 어렵게 마음을 내어 준 사람을, 이토록 허무하게 또 잃게 만들 순 없었다.
“폐하를 알현하고 수색대를 편성해 달라고 말씀을 올려야겠구나.”
클라리사가 코를 훌쩍였다. 수심에 잠긴 표정으로 그 옆을 지켰던 레나가 어린 공녀의 어깨를 안아 달래 주었다.
“곧장 궁으로 들어가야겠다.”
“예, 대부인. 와튼 님께 말해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그렇게 카밀라가 어두운색의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뒤 1층으로 내려왔을 때였다.
키이이이-.
저 멀리서 피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모두가 고개를 들어 올리자 에스테스 하우스로 빠르게 날아오고 있는 정령의 모습이 보였다.
카밀라는 클라리사의 손을 붙잡고 현관 포치로 나왔다.
그런 뒤 하늘을 향해 제 왼손을 뻗자, 두 사람을 발견이라도 한 모양인지, 피르가 하늘에서 급강하했다.
집채만큼 커다랬는데, 카밀라의 손에 사뿐히 내려앉았을 땐 손만 한 크기로 줄어들었다.
피르가 부리로 무언가를 물고 있었다.
보통의 전서구라면 다리 부근에 편지를 묶었겠지만, 피르가 어디 보통 새이던가. 그러니 이리 물고 날아온 것일 터였다.
봉투는 총 두 개였다. 처음에 카밀라는 두 개를 모조리 잡았는데, 피르가 문 것을 놓지 않았다.
살짝 고개를 흔들기까지 하는 것으로 보아, 둘 중 하나는 다른 곳에 전해야 한다는 뜻인 것 같았다.
카밀라가 다시 봉투를 하나만 짚자 그제야 피르가 순순히 건네주었다.
그런 뒤 다시 날갯짓을 하며 푸드덕 하늘로 날아올랐다. 정령이 움직이는 방향은 왕궁 쪽이었다.
“갈 길이 바쁜가 보구나.”
떠나는 피르의 뒷모습에 살짝 눈길을 주었던 카밀라는, 다시 정령이 가져온 편지를 바라보았다.
봉투를 열어 편지지를 꺼내자 낯익은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테런의 글씨였다.
안에 적힌 내용을 읽어 내려가던 카밀라의 눈이 점점 좁아지다가 이내 크게 뜨였다.
맨 마지막 줄에 테런의 서명을 확인한 카밀라는 다시 처음부터 끝까지 빠르게 내용을 읽어 내렸다.
“이게 무슨…….”
그런 뒤 크게 숨을 들이켰다가 길게 내쉬었다.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 무척이나 궁금해하는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클라리사의 머리를 가만히 쓸어 주며, 한결 밝고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외출은 취소해야겠다.”
“네?”
“클라리사. 로제타의 걱정은 더 이상 하지 않아도 되겠어.”
“할머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로제타는 지금 네 오라비와 함께 있다고 하는구나.”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클라리사의 눈이 동그래졌다.
“언니가요?”
카밀라는 망설이지 않고 곧장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곧 수도로 돌아온다고 하는구나. 다행히도 무사한 것 같아.”
그 말에 클라리사가 긴장한 어깨에서 힘을 쭉 뺐다.
그런 손녀의 어깨를 가만히 두드려 주던 카밀라가 입꼬리를 씩 당겨 올렸다.
“우린 좀 분주해지겠구나.”
그녀는 편지를 다시 접으며 레나와 와튼을 비롯한 사용인들에게 말했다.
“결혼 준비를 서둘러야겠다.”
눈치채지 못하였는데, 어느 순간 비가 완전히 그쳐 있었다.
카밀라는 해가 나기 시작하는 하늘에 잠깐 시선을 주었다가 뒤돌아섰다.
* * *
수도의 리스턴 후작가.
“윽. 냄새.”
서재 소파에 길게 누워 있던 바론이 마커스가 들어오기 무섭게 손가락으로 제 코를 꾹 눌러 숨을 참으며 말했다.
바론은 코끝을 찌르는 악취 때문에 반사적으로 움직인 것이었지만, 마커스는 아주 심한 모멸감을 느꼈다.
그는 울컥거리는 감정을 참아 내듯 입 안의 볼살을 꽉 깨물며 노기를 씹어 삼켰다.
헛기침하자, 또다시 목구멍에서 모래 같은 것이 몇 알 올라와 입 안을 까끌까끌하게 만들었다.
전부 로제타가 각성한 날 지하실에 차오르던 진흙을 먹어서 생긴 일이었다.
몇 번이나 입을 헹구었었지만, 흙은 마치 목구멍에 박히기라도 한 듯 그가 기침을 할 때마다 튀어나왔다.
어디 목구멍뿐일까. 머리카락 사이사이에서도 자꾸만 흙이 떨어져 나왔다.
심지어 그날 로제타가 불러냈던 흙에서는 고약한 냄새까지 났다.
피부가 붉어질 때까지 박박 씻어도 냄새는 사라지지 않았고, 향수를 들이붓듯 뿌려도 숨길 수가 없었다.
원체 비위가 약했던 바론은 마커스가 제 쪽으로 한 걸음씩 다가올 때마다 헛구역질을 했다.
“아, 좀! 윽. 후작. 그냥 거기 서서 말하게. 진짜 속이 너무 뒤집힌단 말일세.”
결국 바론은 더 참지 못하고 튕겨 나가듯 소파에서 일어나 서재의 창문 쪽으로 달려갔다.
벌컥 창문을 연 그가 창틀에 배를 기대듯이 하고 연신 헛구역질을 했다.
그런 바론의 행동에, 마커스는 아래 턱이 단단해질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저라고 뭐 이런 냄새를 풍기고 싶어서 풍기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일단 당장 아쉬운 사람은 자신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마커스는 모욕감을 견디며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러는 사이, 창문에 대고 헛구역질하던 바론이 한참 만에 몸을 들어 올렸다.
“아, 좀 한결 낫군.”
고개를 숙인 탓에 피가 몰려 시뻘게진 얼굴로,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도대체 지하실에 그런 똥물은 왜 모아 둔 건가? 자네, 내가 알지 못하는 뭐…… 좀 위험하고, 그런 은밀한 취미 생활이라도 있는 겐가?”
“아닙니다. 그런 것.”
“그러면 그런 더러운 것을 왜 지하실에 그리 가득 채워 둔 거야?”
“제가 채워 둔 게 아니라…….”
“그러면 뭐?”
바론이 건성으로 손짓하며 빨리빨리 이야기하라는 듯 굴었다.
하지만 마커스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다가, 간신히 쥐어짜 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랭우드의 아이가 그랬습니다.”
“그건 또 무슨 생뚱맞은 소리야?”
바론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갑자기 여기서 15년 전에 모두 죽은 랭우드의 이야기가 왜 나오는 거야? 똥통에 빠지더니 정신마저 나가 버린 겐가? 그게 아니라면 설명해 보게.”
“그게…… 랭우드 후작가의 자손이 살아 있었습니다.”
“……뭐?”
“전하께서도 이미 아는 자입니다.”
“내가 안다고? 랭우드…… 혹시?”
바론의 머릿속에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한 사람이 불현듯 떠올랐다.
“테런의 약혼녀를 말하는 건가?”
마커스가 보일 듯 말 듯 작은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론은 진심으로 놀랐다.
“세상에.”
생각지도 못한 사실을 들었다는 듯 그가 제 손으로 얼굴을 덮다가 아래 쪽을 세수하듯 만졌다.
그러다 황급히 마커스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나?”
이미 패트릭에게 들어 마커스가 로제타를 납치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당연히 이 저택 안 어딘가에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바론의 질문에 마커스가 입 안의 볼살만 깨물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어디에 있냐니까?”
바론의 재촉에 마커스가 고개를 살짝 떨군 채, 웅얼거리듯 대답했다.
“……놓쳐 버렸습니다.”
“뭐? 놓쳐? 어쩌다가!”
마커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에게서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자 바론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자네 미친 게야? 대체 어쩌자고 그 계집을 놓쳤는가!”
바론은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며 분개했다.
처음에는 로제타를 안을 생각으로 찾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정체를 알고 난 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아! 아버지한테 점수 좀 딸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