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40화
무리하여 시찰단에서 빠진 이후, 저를 보는 국왕의 시선이 예전보다 더 좋지 않다는 걸 그도 알고 있었다.
아무리 안하무인에 쇠심줄 같은 신경을 가진 바론이라도, 눈치가 보였다.
하여 마커스에게서 그 말을 듣자마자 그는 로제타를 데리고 제 아버지에게로 데리고 갈 생각이었다.
그녀를 찾은 것은 마커스이기에 공을 빼앗는다면 빼앗는 격이었으나 뭐 어떤가 싶었다.
나중에 자신이 왕위에 오른 뒤 조금 더 편의를 봐주고 잘 챙겨 주면 되겠지, 하고 가볍게 생각했다.
“어쩌다가 놓쳤어!”
“아직 땅의 힘을 각성하지 못한 상태라……. 그 힘을 일깨워 주려고 했습니다.”
아무리 신분이 높다고 한들 제 아들뻘이다.
새파랗게 젊은 놈이 저를 상대로 불같이 역정을 내는데, 마커스의 기분이 좋을 리 만무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바론의 잔소리는 폭격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그런 일이 있었으면 내게 가장 먼저 고했어야지! 어쩌자고 자네 혼자 일을 벌여서 이 지경으로 만들어!”
“……죄송합니다.”
바론은 연신 헛숨을 토해 내었다.
아무리 제 머리가 둔하더라도 일이 제법 골치 아프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이맛살을 찌푸린 채, 손가락으로 제 눈썹을 세게 문지르며 물었다.
“어디로 도망간 겐가?”
“아직…… 모르겠습니다.”
“참 나.”
짜증이 치민 바론이 거칠게 혀를 찼다.
“일을 벌였으면 치밀하기라도 해야지!”
마커스는 자존심을 굽히고 어렵사리 입을 떼었다.
로제타가 제게서 도망쳤으니, 더 이상 그녀의 의사를 강제하거나 제어할 수가 없는 상태였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몰라도, 돌아오는 대로 자신의 악행을 폭로하려 들 테다.
‘하필이면 로제타가 기억까지 되찾은 상태라…….’
자신이 아무리 4가문 중 하나인 불의 후작이라 할지라도, 로제타가 15년 전의 사건까지 들먹이게 된다면 실각은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마커스는 우선 제가 살길을 마련해 놓고자 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국왕을 구워삶아 먹는 것이었으나, 아마 포섭하기 어려우리라.
그는 이미 한번 자신의 죄를 눈감아 주었다.
15년 전. 국왕은 랭우드의 멸문에 리스턴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렇게 빨리 사건을 무마하여 덮을 수 있었던 것이다.
4가문의 힘이 곧 윌셔스 왕국의 국력.
국왕의 입장에선 랭우드의 멸문이 뼈가 아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정황을 밝히기 위해 리스턴의 죄를 드러낼 수 없었다.
리스턴 후작가를 벌한다고, 랭우드 후작가가 살아 돌아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마커스. 자네에게 마지막으로 베푸는 자비네. 이후로 나는 자네와 리스턴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며, 일절 어떠한 도움과 편의도 줄 수 없네. 그것이 자네가 짊어져야 할 벌이 될 걸세.」
그 일을 마지막으로, 마커스는 국왕과 큰 척을 졌다.
물론 대외적인 자리에선 적당히 말 몇 마디 정도는 섞었지만.
어쨌든 그랬기에 국왕이 이번 일에 대한 내막을 알게 된다면, 자신을 도와줄 가능성은 현저히 낮았다.
하여 마커스는 차기 국왕인 바론과 결탁하여 손을 잡았던 것이었다.
“우선은 제가 잘못했습니다, 전하. 하지만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라 빨리 대책을 세우는 편이 더 낫지 않겠습니까?”
“대책은 무슨 대책!”
바론이 아까보다 더욱 얼굴을 찌푸리며 소리를 질렀다.
“괜히 나까지 엮지 말게!”
바론은 마커스에게 철저하게 선을 그었다.
그가 그런 반응을 보일 줄 몰랐던 마커스는 당황한 표정을 고스란히 얼굴에 드러냈다.
“잘 듣게, 후작. 이 일에 대해선 난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그러니 자네 혼자 해결하고 난 끌어들이지 말게.”
바론은 똑똑히 들으라는 듯 마커스에게 삿대질을 하며, 한마디 한마디 힘주어 말했다.
“내가 아무리 그동안 그대와 뜻을 같이해 왔다고 한들, 그건 어디까지나 뒷주머니에 푼돈 몇 푼 채우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어디서 감히 이 일에 나를 엮나? 누굴 진창에 처넣을 일 있어!”
마커스는 바론의 말에 부아가 치밀었다. 하지만 그가 한 말 중 틀린 게 무엇 하나 없었기 때문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다 자신이 벌인 일일 뿐, 랭우드의 애송이와 관련한 것 중 바론이 손을 댄 일은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내 경고, 명심하는 게 좋을 거야. 썩 저리 비키게!”
바론은 더 말을 섞기 싫다는 듯 마커스를 지나쳐 서재 문을 열고 나갔다.
“빌어먹을!”
마커스가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벅벅 긁고는 초조한 듯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왕궁으로 들어가, 국왕을 알현하고 선처를 바라야 하는가 싶었다.
그러나 아마도 국왕은 랭우드를 받아들이고 리스턴을 팽할 것이다.
마커스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어.”
마커스가 마침내 마음을 정한 듯 몸을 돌려세웠다.
하지만 그는 제 저택을 나설 수 없었다.
바론이 리스턴 후작가를 나서자마자 저택 주변의 땅이 폭삭 무너졌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다리를 놓지 않으면 건널 수 없을 정도로 깊고 넓은 폭이었다.
그렇게 리스턴 후작가는 그 누구의 방문도, 외출도 허락되지 않은 채 수 일 동안 고립되었다.
시찰단과 로제타가 수도 아렌트로 돌아오기 전까지.
* * *
시찰단은 빠르게 수도로 복귀했다.
날씨가 궂지 않다 보니, 이동에 속도를 붙일 수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이유는 로제타 덕분이었다.
이동하는 내내, 노아스가 시찰단보다 빠르게 땅을 박차고 쏜살같이 내달렸는데, 정령이 지난 길은 순식간에 단단해졌다. 수십 마리의 말이 동시에 뛰어도 괜찮았다.
“이야. 역시 랭우드의 힘은 다르군요.”
긱스가 조금 얼떨떨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그의 옆에서 말을 몰던 제임스가 피식 웃었다.
“자네는 처음 보는 건가? 랭우드의 이능을 말이야.”
“아, 예. 그렇습니다. 선대 후작님이 살아 계셨을 땐 아직 어렸으니까요.”
“제 아버지보다 능력이 월등히 더 좋은 것 같아. 감이 좋은 것 같거든.”
“좋은 후작님이 되시겠네요.”
제임스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테런과 함께 이동하던 로제타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데 실레스틴은 괜찮은 건가요?”
테런은 그녀가 불안하지 않도록 곧바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정령계에서 조금 더 힘을 회복하고 나면 소환에 응할 수 있을 거야.”
“다행이네요.”
이프리트에게 당한 실레스틴은 기절한 상태로 곧바로 정령계로 돌아갔다.
테런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로제타는 한시름 덜었다는 듯 길게 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비는 완전히 그쳐, 먹구름이 모두 물러가고 파란 하늘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로제타는 살짝 웅얼거리듯 중얼거렸다.
“예상보다 우기가 빨리 끝나서 어떡하죠? 사람들이 싫어하지 않을까요?”
“그렇진 않을 거야.”
지금까지 있었던 우기보다는 강수량이 조금 적은 편에 속했다.
하지만 그래도 행사를 취소하는 것보다는 훨씬 상황이 나은 터였다.
“그리고 지속할 수도 없었어. 아티팩트가 깨져 버렸으니까.”
“아…… 그랬죠.”
로제타가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국왕이 체이스에게 맡긴 물의 힘이 담긴 아티팩트가 카르나 마을에서 부서졌다.
체이스의 힘에 강력하게 반응해, 마치 폭주하듯 힘을 내뿜으며 비를 쏟아지게 했다.
테런은 그 점에 주목했다. 힘이 폭주했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것을 운용한 체이스에게 잠재된 능력이 생각보다 훨씬 크다는 뜻이었으니까.
하지만 테런은 그 부분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지금은 우기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 있으니까.”
그는 그렇게 말한 뒤 로제타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로제타는 테런이 말한 중요한 일이라는 것이, 바로 자신의 자리를 찾는 일이란 걸 바로 알아들었다.
사실 로제타에 대한 소문은 이미 널리 퍼진 상태였다.
때로는 발 없는 말이 더 빠른 속도로 퍼지곤 하는데, 이 경우가 그런 경우였다.
시찰단이 지나온 자리마다 순식간에 도로가 재포장되었고, 어마어마하게 큰 늑대의 모습을 한 정령이 나타난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라면 그 어떤 설명을 듣지 않아도 눈치챌 수 있었다.
태양이 타오르는 것처럼 붉은 머리카락.
아아, 땅의 랭우드가 사라진 것이 아니었구나. 자신들은 다시 땅의 가호를 받을 수 있겠구나, 하는 것을.
사람들은 경외를 담아 그녀에게 허리를 굽혔고, 로제타는 그럴 때마다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조금 피곤한 것도 같은 기분이었다.
순식간에 저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자 그것에 대한 부담감도 상당했다.
가뜩이나 어린 시절, 붉은 머리카락으로 인해 멸시의 시선을 받으며 자라 왔다.
그렇기에 사람들이 저를 주목하는 것이 상당히 껄끄러웠다.
하지만 이 부분은 자신이 익숙해져야 하는 부분이라는 것 또한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더는 자신이 예전의 사생아 남작 영애가 아니라, 노아스의 능력을 각성한 랭우드의 주인이기에.
그래서 로제타는 허리에 더 꼿꼿이 힘을 주며 몸을 바르게 세우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작은 목소리로 테런에게 물었다.
“그런데 이렇게 미리 시선을 모아서 좋을 게 있을까요?”
“제법.”
그가 바로 고개를 끄덕인 뒤 설명을 이었다.
“직접적으로 리스턴과 맞붙기 전에, 우리에게 유리한 쪽으로 여론을 형성해 두는 것은 결코 나쁜 일이 아니야.”
왕실의 위엄은 국민들이 표하는 강한 신뢰와 존경으로 세워지는 것.
그렇기에 국왕은 귀족들의 눈치는 보지 않지만, 국민들의 눈치는 살핀다.
하여 왕국민들 사이에서 로제타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국왕은 그녀의 존재를 무시하지 못하게 된다.
테런이 노린 점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녀의 존재감을 키워, 최근에 있었던 일도…… 그리고 15년 전의 일도 더 이상 덮어서 흐지부지 못하게 만드는 것. 죄를 지은 자는 그 벌을 받게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나름의 순기능도 있었다.
이제부터는 자신이 그녀의 옆에 꼭 붙어 있을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마커스의 반격에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여 그가 허튼 수를 쓰지 못하도록, 국민들로 하여금 로제타를 지키게 만드는 역할도 겸하고 있는 것이었다.
“걱정하지 마, 로제. 왕국민들은 더 이상 널 터부시하지 않을 거야.”
로제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아렌트로 돌아오는 길에 많은 대화를 나눴는데, 그중 절반이 바로 마커스에 관한 이야기였다.
“수도로 들어가는 성문을 통과하자마자 리스턴 후작부터 찾아내 구금해야겠어.”
“아.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예요.”
“어째서?”
“그자는 이미 제가 가둬 놓은 상태거든요.”
로제타가 눈매를 굳힌 채 싸늘하게 입술 끝을 끌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