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41화
“아마 옴짝달싹할 수 없을 거예요. 제가 가서 풀어 주지 않는 이상은 말이죠.”
“가둬 놨다고? 어떻게?”
“노아스의 힘을 이용했어요.”
로제타가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기본적으로 제 힘은 상상하면 이뤄지는 거더라고요. 그래서 생각했어요. 리스턴 후작저 주변의 땅을 꺼지게 해 섬처럼 고립시키고, 행여 그 사람이 바깥으로 나오고자 하면 진흙 세례를 퍼붓게끔요.”
아마 지금쯤이면 땅이 꺼지고, 그 빈 곳에 악취가 나는 진흙이 가득 차올라 마치 물이 끓듯 부글거리고 있을 것이다.
테런이 조금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상당히 거리가 먼데 그게 가능해?”
로제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반신반의했는데 되는 것 같더라고요. 노아스가 안 된다는 말을 하지 않았는걸요. 게다가 땅은 이어져 있잖아요.”
“하기는.”
“모든 땅과 흙이 노아스의 관할이니, 마커스, 그자가 어디에 있든…… 허공에 떠 있는 것만 아니라면 제가 직접 노아스의 힘을 이용해 그를 속박하거나 고립시켜 둘 수 있어요.”
테런이 로제타의 손을 강하게 쥐었다가 풀어 주며, 이내 그녀의 손등 위를 가만히 두드려 주었다.
“잘했어.”
“칭찬받으니까 좋네요.”
로제타가 그를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었다.
맞잡고 있는 손의 온기가 너무도 평온하고 좋았다.
‘내가 언제나 찾았던 그 따스함이야.’
클리프 남작의 사생아로 살 때, 늘 막연하게 누군가의 온기를 그리워했었다.
그리고 기억을 되찾고 보니, 그것이 바로 테런의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로제타가 입꼬리를 늘이다가 용기를 내어, 저 역시도 테런의 손가락 끝을 살짝 당기듯 맞잡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신은 빙의자라고 보긴 힘들었다.
현대의 홍장미가 로제 안나 랭우드로 환생을 한 것이었는데, 화재 사건과 버려졌다는 충격에 잃어버린 기억이, 하필이면 환생 이후의 것이었다.
즉, 정확하게 말하자면 로제로 태어나 살았던 6년간의 기억을 잃어버리고, 그보다 더 앞선 생의 일을 떠올린 셈이었다.
‘공작님이 그렇게 긴 시간 그리워했던 것도 나고, 15년 전 그와 마음을 나눈 것도 나야.’
원작의 로제의 것을 빌려 쓴 게 아니라, 본래 제 것이자 제 자리다.
그 사실은 로제타의 마음을 무엇이라 형용할 수 없는 벅찬 것으로 가득 차게 만들었다.
‘만약 내가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지 못했더라면…….’
그래서 원작의 내용대로 클라리사를 학대하고 테런의 손에 죽음을 맞이하게 됐더라면…… 그건 더없는 비극이었을 것이다.
조금 먼 길을 돌아가야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라도 제 자리를 찾아 다시 테런을 만날 수 있음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제. 이제 곧 수도야.”
테런의 말에 로제타가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굳게 닫힌 성문이 눈에 들어왔다.
망루에서도 시찰단이 들고 있는 어기를 발견한 모양인지, 곧 천천히 문이 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제부터네요.”
로제타는 각오를 되새기려는 듯 숨을 들이켰다.
힘이 들어가 단단하게 굳은 그녀의 어깨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테런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감싸 안았다.
* * *
시찰단이 언덕에서 내려와 성벽에 다다랐을 때, 거대한 문은 거의 다 열린 채였다.
시찰단의 가장 앞에 선 로제타와 테런이 먼저 성문으로 들어섰다.
제법 많은 인파가 모여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미 수도에도 시찰단이 예상했던 것보다 빠르게 복귀한다는 소문이 흘러들어 와 이렇게 구경하러 나온 듯싶었다.
‘조용하네…….’
신기하게도 이렇게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데 전혀 떠들썩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왕국민들은 숨을 죽인 채 시찰단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로제타는 움츠러들지 않으려 노력하며 앞만 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로제타의 옆에서 환한 빛이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사람들 사이에 강한 술렁임이 일었다.
옆으로 시선을 준 로제타가 가만히 제 정령의 이름을 불렀다.
“노아스.”
잠깐 정령계로 돌아갔었던 땅의 정령이 어느샌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 그녀의 옆을 든든하게 지키고 있었다.
-내가 항상 옆에 있음을 잊지 말아라.
머릿속으로 노아스의 목소리가 흘러들어 오자, 로제타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옆을 눈부시게 밝혔던 빛이 걷히자, 노아스의 몸이 불투명해졌다. 그와 동시에 사람들 사이에서 나직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세상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어마어마하게 큰 크기의 늑대를 보고 놀라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두가 웅성웅성할 그때, 누군가가 의기양양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저것 봐. 내 말 맞지? 내가 며칠 전에 집채만 한 늑대를 봤다고 했잖아! 그때 내가 헛것을 봤다고 놀렸던 거 어서 사과해!”
아무래도 로제타가 리스턴 후작가에서 탈출하던 모습을 본 모양이었다.
그 사람의 말을 들은 노아스가 난처하다는 듯 로제타에게 또 머릿속으로 말을 걸었다.
-지금이라도 다시 네가 친숙하게 여기는 그 개의 모습으로 바꾸는 편이 낫겠나?
로제타는 잠깐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어. 그냥 이대로 가자, 노아스.’
사람들에게 비치는 모습이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보다도 그녀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노아스가 토토의 모습을 한 채 제 옆을 걸어 봤자, 사람들에겐 그저 개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노아스가 본 모습을 드러내는 편이 여러모로 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외양은 늑대와 다름이 없어도 위압감을 주는 크기를 가지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녀의 예상대로, 사람들은 동요했다.
“그런데 저 늑대……. 혹시 그거 아니야?”
“그거라니, 뭐?”
“땅의 정령님 말이야. 옛날에 우리 어머니가 말씀해 주셨던 모습이랑 똑같은데?”
“하지만 랭우드 후작가의 분들은 15년 전에 모두 죽었잖아.”
누군가 답답하다는 듯 버럭 소리 질렀다.
그리고 그것을 기점으로 사람들 사이에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로제타에게 모두의 시선이 모이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커다란 늑대가 옆을 지키는,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여성.
아무도 감히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지 못했으나, 모두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떠오른 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무엇인가가 폭삭 내려앉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
“어이, 조심해!”
땅이 꺼지고, 누군가가 갑자기 꺼진 구덩이 속으로 떨어진 모양이었다.
다행히 그리 깊진 않은 모양인지, 넘어진 사람은 주변인이 내민 손을 붙잡고 다시 땅을 딛고 위로 올라왔다.
어찌 된 상황인지 빠르게 파악한 로제타가 다급하게 정령을 돌아보며 불렀다.
“노아스!”
-알았다.
그녀의 머릿속을 바로 읽은 것인지, 노아스가 가볍게 앞발을 쿵 찍었다.
그러자 그곳을 중심으로 땅이 잘게 진동하더니, 이내 빠른 속도로 마치 나무의 뿌리가 자라듯이 뻗어 나갔다.
아마 사람들도 느꼈을 것이다. 제 발아래로, 딛고 선 땅이 너울지듯 움직였다는 것을.
“세상에.”
그리고 믿을 수 없는 장면은 다시 일어났다.
방금 전 아래로 푹 꺼진 구덩이에서 흙이 차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꺼진 땅은 다시 원상 복구가 되었다.
하지만 로제타는 살짝 찌푸린 미간을 풀지 않았다.
“나중에 전체적으로 손본다고 해도, 일단 지금은 이곳부터 정비하는 게 좋겠군요.”
수도엔 많은 사람이 살고, 또 드나든다.
적어도 땅 문제로 더 다치는 사람이 없게끔 하는 것이 시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더 이상 힘을 숨길 필요가 없다는 점이 그녀가 결심을 더욱 빠르게 내리도록 했다.
“노아스. 부탁할게.”
정령이 고개를 끄덕인 뒤 한 번 더 가볍게 발을 굴렀다. 그러자 다시금 기운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땅은 마치 물결 모양으로 부드럽게 움직이며 먼 곳까지 뻗어 나갔다.
부풀어 올랐다가 다시금 제 자리에 내려앉은 땅은 한눈에 보기에도 종전과는 달랐다.
푸석푸석하기만 하던 흙에는 윤기가 흘렀으며, 지반은 무척이나 단단해졌다.
로제타는 그제야 한시름 덜었다는 듯 구덩이 쪽에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이내 두 눈이 동그래졌다.
“……!”
어느 누가 먼저 시작한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시찰단의 양옆으로 늘어선 사람들이 그녀를 향해 천천히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행동에는 존경심이 담겨 있었다.
로제타의 가슴속에 무엇인가가 벅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마음을 다 안다는 듯, 테런이 그녀의 손을 더욱 힘껏 잡았다.
만약 그의 온기가 아니었더라면, 주책맞게 울어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떨리는 입술을 간신히 물고, 그녀가 작게 숨을 들이켜며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어?”
로제타와 테런을 비롯해 시찰단의 속도가 천천히 느려졌다.
그들의 앞을 막아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하얀 정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옷은 왕궁에서 일하는 자들이 입는 것이었다.
테런과 로제타가 먼저 멈춰 서자, 그들의 뒤를 따르던 시찰단도 멈췄다.
왕궁에서 나온 시종이 늠름하게 어깨를 활짝 편 뒤 서너 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무사 귀환을 축하드립니다. 체이스 왕자님. 그리고, 에스테스 공작님, 제임스 공.”
시종은 체이스와 테런, 제임스를 향해 차례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아직도 말이 끝나지 않았다는 듯 시선을 돌려, 맨 마지막에 테런의 옆에 있는 로제타를 가만히 응시하였다.
그러다가 그녀를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가 다시 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호칭은 생략한 상태였으나, 그 역시 로제타가 누구인지는 이미 아는 눈치였다.
호칭을 부르지 않은 이유는 하나였다.
15년 전의 사고로 인해, 랭우드의 작위는 현재 왕실에 환수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경거망동해서 성을 부르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종이 로제타에게 보이는 태도에는 4가문을 향한 존경이 담겨 있었다.
‘이 상황에 대해 알고 있구나.’
짧게 목을 고른 뒤, 시종이 웃는 낯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긴 여정으로 고단하시겠지만, 국왕 폐하께서 도착하는 대로 곧장 입궁하시라는 말을 전하셨습니다.”
테런과 로제타가 시선을 교환했다.
그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로제타가 알겠다는 듯 턱을 당겼다. 그런 뒤 국왕의 시종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모두의 시선이 로제타에게 모였다.
그녀는 떨리는 입술을 한번 꾹 힘주어 닫았다가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운을 떼었다.
그녀는 자신을 주시하는 시종을 바라보며 싱긋 웃어 보인 뒤 입을 열었다.
“오늘은 입궁하기가 조금 힘들 것 같은데…… 어떡하면 좋죠?”
“……예?”
시종이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