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예쁜 애 옆에 예쁜 애-142화 (142/148)

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42화

로제타는 눈매를 내려트리며 일부러 민망하다는 듯 웃었다.

“폐하를 뵙기 적절하지 못한 옷차림이라서요. 존귀하신 분을 이렇게 꾀죄죄한 모습으로 뛸 순 없지 않겠어요?”

사실 로제타는 국왕의 청을 거절하는 까닭을 제 탓으로 돌렸지만, 진정한 목적은 다른 것에 있었다.

‘주도권을 내 쪽으로 가져와야 해.’

수도로 향하는 내내 테런, 그리고 제임스와 이야기를 나눴고, 방화 사건이 급하게 덮인 까닭에 분명 국왕의 개입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아무리 테런이 피르를 통해 로제타의 각성과 이른 귀환을 알렸다고 한들 절차가 있는 터다.

보통은 귀환한 다음 날에서 일주일 사이에 귀환 연회를 여는 편이다.

그런 공식적인 자리에서, 성과를 칭찬하고 적절한 포상을 내린다.

하지만 국왕은 그런 절차를 다 무시하고 로제타를 불러들이려 했다.

‘최소는 은폐고, 최악은 가담이야.’

하지만 지금 시종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로 미루어 보자면, 가담은 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제타가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을 천천히 늘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모든 소리에 힘을 주었다.

“절차와, 예에 맞게 준비한 뒤 다시 뵙겠습니다.”

뼈가 있는 말이었다.

시종장이 그녀가 한 말을 아무런 수정도 없이 원문 그대로 국왕에게 전한다면, 그 역시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들을 터였다.

‘나는 더 이상 로제타 클리프가 아니야.’

본래의 신분을 되찾을 것이다.

그러니 국왕 역시 그녀를 4가문 중 하나의 수장으로 인정하고 알맞은 대우를 해야 한다는 뜻을 전한 것이다.

로제타는 고개를 살짝 한쪽으로 기울이며 눈웃음을 지었다.

“폐하께, 말씀 좀 잘 전해 주세요.”

그러자 시종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침이라도 잘못 삼킨 모양인지 이내 고개를 돌리고 거칠게 기침도 토해 내기 시작했다.

로제타가 예쁘게 웃는 모습을 옆에서 곁눈질로 지켜보던 테런의 이맛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마음 같아서는 그녀의 앞을 벽처럼 가리듯 막아서고 싶었지만, 대의를 위해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여 꾹 참는 중이었다.

하지만 시종에게선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너무 어려운 부탁일까요?”

로제타가 재촉하듯 한 번 더 물었다.

그러자 대답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돌아왔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영애.”

나선 것은 체이스였다.

그는 의젓하게 허리를 바로 세운 뒤 말했다.

“아바마마께 말씀을 잘 올려 꼭 격식을 갖춰 다시 뵙겠습니다.”

“왕자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더없이 든든합니다.”

“그럼 우린 여기서 헤어지는 것으로 하죠.”

체이스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 * *

이튿날.

로제타는 레나의 도움을 받아 외출 준비를 마치고 1층으로 내려왔다.

현관 쪽에는 이미 그녀와 마찬가지로 외출복 차림을 한 테런과 제임스가 내려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카밀라와 클라리사도 세 사람을 배웅하기 위해 나와 있었다.

“로제타. 아니지, 참. 로제.”

“네, 할머님.”

로제타가 웃으며 카밀라를 돌아보았다.

“편하신 대로 부르셔도 괜찮아요.”

“아니, 그럴 순 없는 일이지.”

카밀라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찾은 이름인데……. 그런 쓰레기 같은 작자들이 붙인 이름으로 널 부를 순 없단다. 세상에 그런 무례는 없지.”

그래 봤자 고작 한 글자 차이인데.

로제타의 생각은 그랬지만, 카밀라 나름대로 자신을 생각해서 해 준 말이기에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로제타는 클라리사에게로 시선을 옮기며 다정하게 물었다.

“클라리사는 헷갈리지 않니?”

클라리사가 힘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전혀요!”

아이는 쑥스럽다는 듯이 웃으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언니를 애칭으로 부르는 것 같아서 입에 착착 달라붙어요!”

“다행이구나. 그렇게 말해 줘서 고마워.”

로제타가 클라리사의 정수리에 손을 얹고는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가 수도를 떠나 있는 동안 클라리사가 무척이나 걱정했다고 들었다.

그래서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제 얼굴을 본 아이는 눈물부터 팡 터트렸었다.

‘한참 달랬었지.’

지금은 눈물이 그친 클라리사의 얼굴을 바라보는 로제타의 표정에 따뜻함이 가득했다.

“로제. 잠깐 내 쪽으로 돌아 보려무나.”

카밀라의 말에 로제타가 순순하게 그녀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러자 카밀라가 그녀의 옷차림을 손수 매만져 주며 각이 제대로 살도록 손봐 주었다.

“조금만 더 시간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카밀라가 진심으로 아쉽다는 투로 말했다.

“앞으로 입을 날이 많을 테니, 괜찮아요.”

그녀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카밀라가 보기 드물게 입가를 끌어 올리더니, 보일 듯 말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체이스가 국왕에게 그녀의 말을 제대로 전했는지 어제저녁, 에스테스 하우스에 왕실에서 보낸 파티 초대장이 도착했다.

더더군다나 공작가에 도착한 초대장은 두 장이었다.

하나는 에스테스 공작인 테런의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랭우드의 성을 붙인 로제타의 것이었다.

본래의 제 성을 보고 있자니 왠지 새삼스러운 기분이라, 로제타는 초대 장 봉투에 적힌 랭우드라는 글자를 한참 바라보기만 했다.

「폐하께서는 제가 능력을 각성할 걸 반기는 거 맞죠?」

「그래 보여. 리스턴 후작과 손을 잡으신 건 아닌 듯해.」

파티 명목은 시찰단의 무사 귀환을 환영하는 연회였다.

하지만 이렇듯 봉투에 ‘랭우드’란 이름을 적어 보낸 것을 보면 분명 그 자리에서 로제타의 정체를 공표하고 환수했던 작위를 돌려줄 것 같았다.

일종의 서임식과 비슷할 것이었다.

하여 로제타는 최대한 정복처럼 보이는 깔끔한 옷을 골라 입었다.

물론 하루 만에 준비해야 했기에 랭우드 후작가의 문장을 수놓은 옷을 입을 수 없는 점이 큰 아쉬움이었다.

“다 되었다.”

카밀라가 손을 떼자 로제타가 빙긋 웃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잘할 수 있을 게다.”

그녀에게 기운을 불어넣어 주기라도 하듯 카밀라가 로제타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가자.”

로제타가 고개를 끄덕이며 테런의 팔짱을 끼었다.

그러자 테런이 그녀의 쪽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며 속삭였다.

“미리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찾았군요?”

“맞아.”

“생각보다 빨리 찾아서 다행이네요.”

“적당한 때를 봐서 등장시키자고.”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로제타의 눈매가 더할 나위 없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 * *

왕궁에 도착한 로제타는 남몰래 숨을 들이켜며 가슴을 쭉 폈다.

지난번 약혼식 겸 데뷔당트 때와는 달리, 이번엔 국왕보다 먼저 홀 안에 들어가 있어야 했다.

그 탓에 이미 모인 귀족들의 시선을 받아 낼 수밖에 없었다.

분명 왕실에서 급하게 초대장을 돌렸을 텐데도, 수도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참석한 듯 보였다.

단, 마커스를 비롯해 리스턴 후작가의 사람들은 아무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상태였다.

이미 암암리에 소문이 다 퍼졌는지 로제타를 바라보는 시선들이 예전과 사뭇 달랐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그들 중 어느 누구도 그녀에게 와 말을 붙이는 사람은 없었다는 점이다.

로제타는 애써 그들의 시선을 무시하며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하룻밤밖에 시간이 없었을 텐데도 홀은 마치 며칠 동안 준비하기라도 한 것처럼 완벽하게 꾸며져 있었다.

그렇게 어색한 마음으로 얼마간 있었을까? 이윽고 시종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국왕 폐하 드십니다!”

모두가 동작을 멈추고 국왕에 대한 예를 지키기 위해 고개를 조아렸다.

로제타도 한숨 돌리며, 테런과 함께 왕좌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모두 고개를 들라.”

국왕의 허락에 귀족들이 허리를 들어 올렸다.

왕좌에는 국왕이 앉아 있었고, 그의 오른편에는 바론, 왼편에는 체이스가 서 있었다.

바론은 입매를 비틀고 삐딱하게 서 있었으며, 체이스는 그와는 대조되게 바른 몸가짐으로 조금 상기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내 오늘 모두를 부른 것은 스무날 전, 우기를 위해 콘웰로 떠났던 체이스 왕자와 에스테스 공작이 이끈 시찰단이 무사히 귀환한 것을 치하하기 위함이다.”

국왕은 들뜬 목소리로 빠르게 이야기를 진행했다.

“모두 고생이 많았다. 차후 적절한 보상을 내리겠다.”

시찰단을 치하하는 말은 정말 짧았다.

국왕은 재빨리 화제를 전환하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곧바로 말 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하나 더. 이번 시찰단에서 아주 큰 역할을 해 준 이가 있소.”

국왕은 싱글벙글 웃는 낯으로 말을 이었다.

그의 시선은 일찌감치 로제타에게 닿아 있었다.

국왕은 그녀의 쪽으로 팔을 뻗었다. 마치 로제타를 다른 귀족들에게 새로이 소개하는 듯한 행동이었다.

상기된 얼굴을 한 그가 이내 고조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바로 랭우드 영애지.”

일순 회장에 침묵이 감돌았다.

로제타와 테런, 그리고 제임스는 연회장에서도 왕좌와 제일 가까운 안쪽에 자리를 잡고 서 있었다.

로제타는 마른침을 삼켰다. 왠지 모르게 뒤통수가 따가운 기분이었다. 게다가 제 뒤에 있는 이들이 저를 어찌 보고 있을는지 두려웠다.

국왕의 소개가 끝나자마자 로제타가 천천히 뒤쪽으로 몸을 돌렸다. 이내 그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귀족들이 그녀를 향해 허리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 까닭이다.

어제 성문을 들어오며 힘을 발현시켰을 때, 땅을 정돈하자 평민들에게 받은 인사와 동일한 것이었다.

그녀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는 사람은 오직 왕족들과 테런, 제임스뿐이었다.

국왕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을 이었다.

“끊긴 줄 알았던 랭우드의 손이 이렇게 다시 살아 돌아오다니! 이런 경사가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로제타는 느꼈다.

국왕은 랭우드 일가의 몰살에 가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왕가는 4가문의 수장이라고도 볼 수 있어. 힘의 균형을 맞춰야 하는데, 랭우드 후작가의 몰락을 원할 리 없었을 거야.’

이토록 자신의 각성을 반기는 사람이 그랬을 리 없다.

그렇다면 왜 그토록 그 일을 빨리 덮은 것인가.

그에 대한 답도 어쩌면 알 것만 같았다.

국왕은 정치를 하는 사람이다. 마냥 정의로울 수만은 없는 지위에 앉아 있는 것이다.

게다가 4가문의 분열은 국력과도 직결되는 문제니, 그저 덮는 것 말고는 당시엔 다른 선택지가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앞뒤가 들어맞아. 물론, 그 사정을 나와 랭우드 후작가가 이해해 줄 필요는 없지만.’

만약 자신의 등장으로 인해 국왕이 15년 전에 있었던 일에 대하여 부채감을 느끼고 있다면, 일이 조금 더 쉬워질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로제타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국왕이 말을 이었다.

“주인이 나타났으니, 본래의 것을 돌려주어야지. 그러니, 영애. 내게 가까이 다가오라.”

로제타가 테런의 손을 한번 꽉 쥐었다가 놓은 뒤,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런 뒤 왕좌 아래 무릎을 꿇고 앉았다.

국왕은 오른손에 쥐고 있던 왕홀을 뻗어 그녀의 어깨 위를 번갈아 짚었다.

“그대에게 랭우드 후작의 성을 되돌려 주마. 그대가 새로운 랭우드의 주인이다.”

“로제 안나 랭우드. 폐하와 이 윌셔스의 더없는 영광을 위해 이 한 몸 바치겠습니다.”

그녀의 충성 서약을 흐뭇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국왕이 고개를 들어 테런을 바라보았다.

“에스테스 공작도 이리 가까이 오라.”

테런이 다가왔다.

국왕이 두 사람을 따뜻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말했다.

“결국, 돌고 돌아 서로이니, 이 어찌 운명이 아니란 말인가.”

로제타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옆에 선 테런의 손을 꽉 쥐었다.

“랭우드 후작.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말하라. 그대를 위해 내가 무엇이든 들어줄 터이니.”

국왕의 그 말에 로제타가 작게 헛숨을 들이켰다.

테런이 그녀의 손을 강하게 잡았다.

그 힘에 용기를 얻은 듯, 로제타가 보일 듯 말 듯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폐하, 하나 요청을 드릴 것이 있습니다.”

“좋다. 사양하지 말고 흔쾌히 이야기하라. 그게 무엇이든 내 들어줄 터이니.”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로제타는 우선 국왕에게 깊은 감사의 예를 표했다.

그런 뒤 짧게 숨을 들이켜고는 이내 비장한 표정과 목소리로 입을 떼었다.

“랭우드 후작가의 가주로서, 폐하께 정령 재판을 개정하여 주시길 요청합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