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43화
아렌트에 도착하기 전, 제임스에게 들은 말이 있었다.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마커스가 저지른 일을 단죄할 방법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요?」
「정령 재판이지.」
제임스의 말에 따르면 4가문을 수호하는 네 정령은 인간과 달리 거짓말을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렇기에 그 어떤 증언이나 증거보다 우선하는 것이 바로 정령의 증언이었다.
정령 재판을 여는 방법은 생각보다 간단한데, 네 가문이 모여 그중 셋만 개정에 합의를 한다면 정령들을 한자리에 소환할 수 있다.
그들에게 질문을 건네면 반드시 진실만을 답한다고 하는데, 이러한 정령 재판은 주로 4가문 중 누군가를 심판할 때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4가문의 수장은 윌셔스 왕국에서 매우 특별한 존재로, 사실상 면책 특권을 가진 터였다.
죄를 지은 것이 확실하다고 해도 쉽게 벌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정령들의 증언으로 그 당위성을 보충하려는 것이었다.
정령 재판을 여는 것은 스스로 체면을 깎아 먹는 일이 될뿐더러, 4가 문의 고결함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하여 어지간한 중대 죄가 아니라면 정령 재판을 개정하지 않는 편이었다.
지난 백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정령 재판이 열린 적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국왕이 난색을 표했다.
“정령…… 재판?”
“예, 폐하.”
로제타는 그가 잘못 듣지 않았음을 알려 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까지 끄덕이며 힘주어 대답했다.
그러자 내내 흐뭇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국왕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는 지금 이 상황이 불편하다는 듯 헛기침을 몇 번 터트렸다.
“경사스러운 자리이니…….”
“아니요, 폐하.”
로제타는 국왕의 말을 자르는 불충을 저지르면서까지 강경하게 대처했다.
“이미 긴 시간 동안 미뤄 온 일입니다. 더 이상 단죄를 미룰 수 없음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아실 것입니다.”
국왕은 왕좌의 팔걸이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러나 로제타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선대 랭우드의 선조들이 그러했듯, 저 역시 성심을 다해 폐하를 모실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그 말인즉슨, 랭우드의 충성을 받고 싶다면 제대로 된 판결을 내리라는 뜻이었다.
그녀는 부탁을 한 것이었으나 국왕은 정중한 협박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팔걸이 끝을 움켜쥐고 있는 그의 손에 더욱 힘이 실리며 하얗게 질렸다.
로제타는 초조한 마음을 숨긴 채 국왕을 바라보았다.
그녀라고 어찌 국왕이 두렵지 않겠는가. 힘을 각성했다고 한들, 하루아침에 성격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제 옆엔 테런이, 그리고 뒤는 에스테스 공작가가 든든히 받쳐 주고 있었다.
로제타는 한 번 더 용기를 내었다.
자신이 윌셔스에서 진정한 랭우드로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오래 묵은 일들을 반드시 해결해야만 했다.
“15년 전, 저희 가문에 있었던 의문의 화재 사고에 대한 진짜 배후를 가리고 싶습니다, 폐하. 그러니 윤허하여 주십시오.”
로제타가 사건에 대해 공론화하자 연회장이 일순 술렁였다.
“시종이 실수로 불을 낸 것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맞아요. 제 기억에도 분명, 당시 왕실 수사대에서 그렇다고 발표했었어요.”
“정령 재판을 요구하는 것을 보면, 새로운 랭우드 후작님도 무엇인가 나름 짚이는 게 있어서 그러신 것 아니겠어요?”
저마다 수군거리니 그 소리가 제법 컸다.
로제타는 여론을 동요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생각을 하며, 차분히 준비한 다음 말을 이었다.
“피고 측으로는, 마커스 댄 리스턴 후작을 지목합니다.”
연회장에 또 한 번의 큰 술렁임이 퍼졌다.
귀족들 중 몇몇은 충격이 큰 모양인지 손이나 부채를 이용해 저도 모르게 벌어진 입술 위를 가리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이 자리에 리스턴 후작님이 안 계시잖아요!”
“세상에…….”
“일단 조금 더 지켜보죠. 폐하께서 어떻게 하실지.”
제게 모이는 귀족들의 눈길을 애써 무시한 채, 국왕은 골치가 아프다는 듯한 표정으로 한숨을 삼켰다.
‘15년 전처럼 조용히 묻기는 힘들겠구나.’
알고는 있었지만, 욕심을 부렸다.
드디어 완전한 4가문이 되지 않았던가.
국왕의 입장에선 로제타가 그 일을 ‘묻어’ 주었으면 했다.
시시비비를 명확하게 가려 주어야 하는 입장이었으나, 국왕 역시 신이 아닌 한낱 인간일 뿐이기에 자신에게 편하고 유리한 쪽으로 상황이 흘렀으면 좋겠다고 바라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야 물, 불, 바람, 흙이 비로소 완전해지니까.
자신의 대에서 이런 분란이 일어난 것이 못마땅했다. 꼭 자신의 치부인 것만 같아 감추고 싶은 마음만 강하게 들었다.
‘이를 어쩐다.’
국왕의 고민은 길어졌고, 대답은 미뤄졌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체이스가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보탰다.
“잘못한 자가 있다면 응당 벌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더더군다나-.”
“체이스. 너는 좀 가만히 있어라.”
바론이 눈매를 찌푸리며 말했다. 제 형의 구박에 체이스가 움츠러들며 다시 입을 다물었다.
잠시간 더 생각을 이어 나가던 국왕은 마침내 마지못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다. 그리하지. 내 정령 재판을 열 날짜를 정하도록 하겠네. 늦지 않게 결정하여 그대에게 알려 주겠다.”
일단 오늘은 이쯤에서 마무리 지은 뒤, 따로 로제타를 불러들여 타일러 볼 생각이었다.
이제 막 가주로 임명되었다고는 하나 아직 어린 영애지 않던가.
국왕은 로제타가 자신의 타협안을 받아들이고 오늘은 이쯤에서 한 발 물러설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착각이었다.
그녀는 성에 차지 않는다는 듯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개를 저었다.
“아뇨, 폐하. 지금 바로 개정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당당하고 확신에 가득 찬 그녀의 태도에 귀족들은 동요했다.
국왕은 입술을 힘주어 다물었다.
이미 사람들 사이에 인 호기심을 억누르기 힘든 상황이었다.
오히려 시간을 끌수록 각종 억측이 생겨, 자칫 잘못하다간 왕가의 존엄까지 해칠 수 있는 일.
불리한 것은 완전히 그의 쪽이었다.
‘하여간에 리스턴…….’
국왕은 마커스의 얼굴을 떠올리며 남몰래 입 안의 살을 짓씹었다.
그러다 마침내 포기한 듯 묵직한 숨을 길게 내쉬었다.
“좋네. 자네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땅과 불,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당연히 땅이었다.
불을 포기하면 마커스 하나만 내칠 수 있었지만, 랭우드를 포기하게 된다면 로제타를 사랑하는 바람의 에스테스까지 왕가에서 등을 돌릴 것이 자명했다.
하여 국왕은 결단을 내렸다.
“마커스를, 리스턴 후작을 데리고 오라.”
오랜 마음의 짐을 덜 시간이었다.
* * *
“폐하. 마커스 댄 리스턴 후작 들었습니다.”
시종장은 국왕에게 다가와 귓속말처럼 소곤거렸으나, 워낙 연회장이 조용했던 터라 많은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들었다.
오늘 파티에 참석한 귀족들 중 어느 누구도 먼저 자리를 뜨지 않았다.
모두 그 자리에서 우두커니 서서 사건의 당사자들이 다 모이기를 기다렸다.
시종장의 보고에 국왕이 어서 들여보내라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곧 문이 열리고 마커스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의 외관은 상당히 꾀죄죄한 상태였다.
포박은 되어 있지 않았다. 왕국법에서 모든 피의자는 명명백백하게 죄가 드러나기 전까진 무죄로 추정한다고 명시를 해 둔 까닭에서다.
하지만 사지를 구속하지만 않았을 뿐, 혹시 모를 도주를 막기 위해 마커스의 양옆과 뒤쪽에 왕실 근위대 기사들이 각각 한 명씩 퇴로를 막듯이 둘러싸고 있었다.
“윽. 이게 무슨 냄새람?”
“숨을…… 못 쉬겠어요.”
그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동시에 연회장에 악취가 퍼졌다.
그 냄새에 사람들은 저마다 코를 막았다. 더러는 숨을 참으며 고개를 살짝 모로 돌리기도 하였다.
저를 향한 수군거림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둔한 인사가 아니었기에, 마커스는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짓씹었다.
‘감히……. 평소 같았으면 감히 나를 제대로 바라보지도, 말 한마디 붙이지도 못했을 것들이……!’
그의 마음에 분노가 차올랐다.
하지만 지금 그가 상대해야 할 것은 저 조무래기들이 아니었기에, 마커스는 그러한 귀족들의 행동을 애써 무시하며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에게서 풍기는 냄새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고 싶다는 듯 귀족들이 거리를 벌리자, 마커스의 앞이 훤히 트였다.
그의 눈에 왕좌와 그 계단 아래에 자리를 잡은 로제타, 그리고 테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있는 그녀를 보는 순간, 이성이 딱 끊어지며 그의 속에 불같은 화가 다시 일어났다.
‘빌어먹을.’
마커스는 기사들이 도착했을 때의 상황을 떠올렸다.
제 방 창가에서 후작저 주위에 해자처럼 파여 있는 진흙과 오물이 뒤섞인 웅덩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기사들이 오자마자 그것들이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메워지더니 원래 상태로 돌아갔다.
‘힘을 이리 능숙하게 사용할 줄이야. 내가 괜한 짓을 한 것인가.’
로제타가 각성하여 되찾은 힘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듯했다.
마커스가 주먹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그의 손톱이 손바닥에 박히듯 자국을 남겼다.
눈에 불을 켜고 그녀를 노려보던 마커스가 이내 걸음을 멈췄다.
그는 억지로 로제타에게서 시선을 떼어 낸 뒤, 큰 숨을 들이켜고 국왕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폐하를 뵙습니다.”
국왕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커스는 무슨 일로 불려 온 것인지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짐짓 모르는 척 뻔뻔하게 되물었다.
“소신을 어쩐 일로 부르신 것인지요.”
“여기.”
국왕이 손으로 로제타를 가리켰다.
“랭우드 후작이 자네를 상대로 정령 재판을 신청하였네.”
그 순간 마커스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도저히 분을 참지 못하겠는지, 그가 이를 으득 갈며 무섭게 중얼거렸다.
“정령 재판? 나를 상대로 감히?”
마커스가 비릿한 미소를 떠올리곤 싸늘하게 비아냥거렸다.
“랭우드가 부재해 온 긴 시간에도, 저 마커스 댄 리스턴은 묵묵히 제 자리를 지키며 왕가에, 그리고 왕국에 헌신해 왔습니다. 그런데 정령 재판이라니요? 어디서 굴러먹다 들어온 건지 모를 어린 계집의 말 한마디에, 제게 그런 불명예를 안겨 주십니까? 폐하, 이러실 순 없으십니다.”
그의 행태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로제타가 큰 숨을 들이켠 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철면피로군요. 15년 전, 나와 내 부모님의 목숨을 노린 일에 대해서 정말 일말의 미안함도 찾아볼 수 없네요.”
“아무런 증거도 없이 어디서 감히 그따위 망발을 내뱉는 거냐! 그것도 새파랗게 어린 년이!”
그 순간 로제타가 도끼눈을 뜨고 그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그녀 역시 자신을 납치하고 억지로 힘을 각성시키려 불로 위협한 마커스에게 만만찮은 유감을 가지고 있었다.
“리스턴 후작. 이성을 챙기고, 머리를 거친 뒤 말을 입 밖으로 내세요.”
“뭐라고?”
로제타가 턱 끝을 들어 올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지고하신 폐하께서 인정한 랭우드 후작입니다. 그런 나를 폄훼하는 것은, 폐하의 뜻을 저버리는 것과 같을 것인데 그 감당을 어찌하시려고 이렇게 거침없이 막말을 하시는 건지 도무지 모를 일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