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44화
그녀의 지적에 마커스가 이를 악물었다.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로제타에게 삿대질을 하며 윽박질렀다.
“너! 네까짓 것이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그때였다. 국왕이 그만하라는 듯 손을 들어 올렸고, 그 신호에 마커스의 입이 잘 훈련된 개처럼 다물렸다.
국왕은 짐짓 엄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리스턴 후작. 랭우드 후작에게 예를 지키도록 하라.”
국왕이 로제타의 편을 들어주자 마커스가 더욱더 분한 표정을 지었다.
로제타는 국왕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인 뒤 허락을 구했다.
“하면, 폐하. 사건의 당사자들이 모두 모였으니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국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테런이 팔을 앞으로 뻗더니 자신들을 보고 있는 귀족들을 향해 호를 그리듯 움직였다.
그의 손끝에 하얀 바람이 일더니, 사람들의 사이사이로 퍼져 나갔다.
그것은 무척이나 청량한 기운이었다.
“무엇을 한 것인가?”
“공기의 파장을 증폭시키고 소리가 들릴 수 있는 거리를 넓혔습니다. 이제 성 밖에서도 이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두 들을 수 있을 것입니다.”
에스테스 공작가 역시 제대로 된 판결을 내려 달라는 뜻을 밝힌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의 의도를 읽은 국왕은 압박감을 느낀 듯 무겁게 한숨을 뱉었다.
왕국민들도 오늘의 일을 모두 알게 될 텐데, 이제부터 내뱉을 한마디 한마디를 조심해야 했다.
마커스는 야욕이 넘치는 인물이니만큼 제게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들은 무시하는 면이 컸다.
자신이 누리는 권리는 당연한 것이지만, 따라서 베풀어야 하는 의무는 귀찮아하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같은 4가문이라 할지라도 왕국민들은 리스턴 후작가를 그리 따르지 않았다.
이 재판으로, 왕국민들이 누구를 더 지지하고 따를 것인지는 불 보듯 아주 뻔한 일이었다.
“그럼 폐하. 부디 현명하신 판결을 부탁드리겠습니다.”
테런은 한 번 더 힘주어 말한 뒤,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국왕이 피로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정령들을 한자리에 소환하기 전 랭우드 후작, 자네가 먼저 취조할 기회를 주겠네.”
“감사합니다, 폐하.”
로제타가 굳은 얼굴로 마커스를 바라보며 입을 뗐다.
“거두절미하고 묻겠습니다. 리스턴 후작. 젤다 랭우드에 대해서 아시나요?”
“젤다? 그게 누구지? 아……. 과거에 사교 모임에서 몇 번 만난 것 같기도 하고.”
마커스는 생각보다도 더 뻔뻔하게 나왔다.
로제타는 코웃음을 치며 싸늘하게 말을 이었다.
“제가 묻는 건 최근의 일이라는 걸 아실 텐데요.”
“글쎄.”
“15년 전에도, 그리고 최근에도…… 젤다와 당신이 공모하여 나를 죽이려고 했잖아요. 설마 부정하시는 건가요?”
“아까부터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마커스가 천연덕스럽게 발뺌하자, 로제타는 잠시 그를 노려보고는 찬바람이 일 정도로 매정하게 등을 돌렸다. 그런 뒤 국왕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폐하. 마커스 댄 리스턴 후작에게 15년 전의 방화 사건과 더불어, 최근 저를 납치하여 협박하려던 사건에 대한 책임도 함께 묻겠습니다.”
“그게 무슨…….”
“그는 제가 랭우드의 마지막 생존자라는 걸 미리 알았으면서도 폐하께 고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젤다 랭우드와 또다시 공모해 절 납치했죠. 저를 리스턴 후작가의 지하실에 감금한 뒤,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때, 리스턴 후작은 제게 평생 자신을 위해 살게 하겠노라고 협박까지 했습니다.”
로제타의 말에 국왕은 당황을 숨기지 못했고, 연회장에 있던 다른 귀족들 역시 동요했다.
그러다 국왕이 한 박자 늦게, 이곳의 소란이 왕궁 밖에도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을 것이란 생각에 테런을 바라보며 눈짓했다.
하지만 테런은 그런 국왕의 눈빛을 일부러 피하며 그의 의견을 묵살했다.
결국 국왕은 자포자기한 듯 길게 숨을 내쉬었고, 마커스를 향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리스턴 후작. 대답해 보게. 랭우드 후작이 말한 게 사실인가?”
“아닙니다!”
마커스는 일단 부정부터 했다.
목에 핏대까지 세운 채, 그는 로제타를 노려보며 분개하듯 소리쳤다.
“내가 그랬다는 증거라도 내밀고 주장을 하시게! 이런 모함을 하려면 하다못해 증인이라도 데리고 와야 하지 않겠는가!”
노아스를 마주한 그날 정신을 놓아 버린 젤다는 리스턴 후작가의 골방에 숨겨 두었고, 로제타를 납치하는 데 일조한 한스는 일찌감치 손을 써 없애 버리라는 명령을 내려 둔 터였다.
‘아마 지금쯤 그 시체가 어디 외진 곳에 버려졌겠지.’
며칠을 지하실에 가득 찬 진흙 속에 파묻혀 정신을 잃고 있었던 데다, 그 이후에 후작저에 반감금 되다시피 한 터라 한스가 제대로 처리되었는지 확인하지 못했다.
하지만 마커스는 로제타와 테런이 그를 발견하진 못했으리라 생각했다.
왕궁으로 오는 동안 이야기를 듣자 하니, 시찰단과 함께 이제 막 수도로 돌아온 듯했다.
시간적 여유가 없어 둘 중 누구도 한스를 확보하지 못했으리란 생각에 도리어 뻔뻔하게 나올 수 있었다.
로제타는 애매모호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사실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테런이 손을 써 죽을 위기에 봉착한 한스를 구출해 구금해 놓은 상태였다.
“좋아요. 그렇게 하죠.”
“……뭐?”
“리스턴 후작 쪽이 증인을 데려오라 하였으니 저희가 확보한 증인을 데리고 오겠습니다. 그래도 될까요, 폐하?”
국왕이 허락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테런이 어딘가로 고갯짓을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처참한 몰골의 한스가 꽁꽁 묶인 채로 에스테스 공작가의 사병에게 끌려 들어왔다.
그의 얼굴을 알아본 마커스의 얼굴이 아주 짧게 찡그려졌다.
아주 찰나라 대다수는 그 표정을 보지 못했지만, 뚫어져라 그를 바라보고 있던 로제타와 테런은 알 수 있었다.
한스는 국왕의 앞에 무릎 꿇려졌다. 로제타가 한스의 앞으로 걸어가 그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은 에스테스 공작가에서 마구간지기 보조로 일을 하던 기술자 한스입니다.”
“아, 아가씨…….”
한스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구타를 당했는지 그의 얼굴 곳곳에 푸릇한 멍이 잔뜩 들어 있었다.
그저 보기 흉할 뿐, 안쓰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로제타가 서글픈 표정으로 그를 잠시 내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한스. 나는 당신을 믿었어요. 하지만 당신은 나를 배신했죠.”
“죄, 죄송합니다. 아가씨…….”
“만약 당신에게 양심이 한 터럭만큼이라도 남아 있다면……. 부디 바른 대로 대답해요. 저자에게 이용당하기만 하고 마지막에 죽을 뻔한 당신을, 누가 살렸는지도 기억하고 말이에요.”
한스가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차라리 벌을 받을지언정 에스테스와 랭우드에게 붙는 것이 살 확률이 높다는 것을 깨달은 까닭이다.
로제타가 숨을 들이켠 뒤,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목소리로 한스에게 질문했다.
“한스. 당신은 날 납치하려는 세력에 힘을 보탠 적이 있습니까?”
“흐흡. 예……. 예…… 제가 감히……. 그랬습니다.”
“누가 당신에게 그 일을 사주했나요?”
한스는 어깨가 떨릴 정도로 한참을 흐느끼다가 입술을 한번 꽉 물고는 간신히 대답했다.
“리스턴…… 후작님이십니다.”
그의 지목에 연회장이 또 한 번 술렁였다.
“저는 도박에 빠져 생활고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던 때, 리스턴 후작 영식인 패트릭 님께서 제게 접근하여 에스테스 공작가의 생활을 넌지시 흘려 주길 원했습니다. 그러다가 최근엔 후작님이 직접 절 보자 하시곤…… 아가씨를 납치하는 데 도움을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로제타가 고개를 짧게 끄덕인 뒤, 다시 국왕과 마커스를 번갈아 돌아보았다.
마커스는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이 특유의 오만하고 꼿꼿한 표정을 유지한 채 조용히 항변했다.
“폐하. 이건 모함입니다. 저는 저자를 모르니까요.”
“……하.”
로제타는 그렇게 모르는 척 오리발만 내밀고 있는 그의 태도가 역겨웠다.
“정말 솔직해지려는 마음이 조금도 없군요.”
그녀가 싸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리석기 그지없네요. 지금 이 자리가 정령 재판이라는 것을 알 텐데도,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면요.”
정령의 증언은 그 어떤 증거보다도 우선된다.
“그대가 스스로 죄를 고백한다면, 아주 조금은 참작해서 봐줄 생각도 있었어요.”
로제타는 무감정한 눈빛으로 마커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겠군요.”
마커스는 요지부동이었다.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음에도 오리발을 내밀 수 있을 때까진 계속해서 내밀 생각인 듯싶었다.
“증거를 가지고 오기 전엔 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겠소.”
마커스의 말에 로제타가 버석한 미소를 지었다.
“아까부터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괜히 참았나 봐요. 그냥 할 것을.”
“흥,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게요?”
“어째서 피해자인 제가, 피해 사실을 입증해야 하는 것인지 모를 일이군요.”
냉소적인 그녀의 말에 마커스가 입을 다물었다.
로제타가 작지만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아무도 하지 않으려 하시니, 별수 있나요. 제가 하겠습니다.”
그녀는 국왕을 바라보며 담담히 말을 이어 나갔다.
“폐하. 정령들의 증언을 듣고자 합니다. 각 가문의 정령을 소환해 주십시오.”
국왕이 짧게 혀를 찬 뒤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약속은 약속이니 어쩔 수 없지. 엘라임. 모습을 드러내라.”
그것을 시작으로 로제타와 테런이 차례로 노아스와 피르를 불러 모았다.
하지만 마커스는 고집스럽게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가 제 정령을 소환하지 않자 국왕이 채근했다.
“리스턴은 이프리트를 소환하지 않고 무엇하고 있는가? 이것은 왕명이다. 만약 그대가 불응할 시 왕명을 어긴 죄로 다스릴 것이다.”
“폐하……!”
“어서.”
마커스는 그제야 마지못해 주머니에서 불의 펜던트를 꺼냈다.
보석이 달린 쪽을 떨어트리며 낮게 읊조렸다.
“이프리트. 나오도록.”
붉은 기운이 일렁이며, 불도마뱀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미 한차례 맞닥트린 적 있는 로제타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괜찮아, 로제. 내가 곁에 있어.”
하지만 테런이 어느샌가 옆으로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그 온기 덕분에 로제타는 더는 물러서지 않을 수 있었다.
“세상에, 저기 좀 봐요.”
“네 정령이 한자리에 모이다니…… 전 태어나서 처음 봐요.”
“저도요.”
귀족들은 탄성을 터트렸다.
좀처럼 보기 힘든 장면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모두 왕궁 중정의 샘물터에 마련된 석상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정령들을 보고 감탄하던 귀족들은 한 박자 늦게 그들을 향해 허리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정령들은 서로를 마주 보듯 서서 원을 그리고 있었다.
귀로 들린다기보단 머릿속으로 바로 음성이 들려오는 느낌이었다.
-우리를 부른 이유가 무엇인가?
4가문의 일원만 그 목소리를 들은 건 아닌 듯했다.
귀족들 중 몇몇이 갑자기 들린 목소리에 흠칫거리는 것이 보였으니까.
로제타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꼭 밝히고 싶은 진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질문할 기회는 딱 한 번이다.
엘라임이 정령들을 대표하여 대답했다. 로제타가 알겠다는 듯 무거운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켠 뒤 비장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노아스, 피르, 엘라임, 그리고 이프리트. 네 정령에게 랭우드의 로제가 묻습니다.”
로제타는 정령들을 똑바로 응시한 채 목소리를 내었다.
“15년 전, 랭우드 후작 저택의 불을 누가 낸 것입니까?”
귀족들도, 국왕도 모두가 숨을 죽이며 정령들을 주시했다.
하지만 네 정령 중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