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45화
다만 각자의 방법으로 그 답을 돌려주었을 뿐이다.
물론 이프리트는 침묵을 지켰고, 피르는 칼바람을 일으켜 마커스의 뺨에 긴 생채기를 내었다.
엘라임 또한 그에게 물벼락을 내렸다.
“으악! 폐하! 이게 무슨……!”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마커스가 분개했다.
그나마 그와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은 행여 그 물에 제 옷이 젖을까 황급히 뒷걸음질 쳤다.
마지막은 노아스의 차례였다.
-나는 준비가 되었다. 그러니 언제든 말하라.
그가 로제타를 바라보자, 그녀가 신호를 받기라도 한 것처럼 팔을 앞으로 뻗었다.
‘시작하자.’
보일 듯 말 듯 작게 고개를 주억거린 노아스가 앞발로 쿵 바닥을 찧었다.
로제타가 손을 천천히 뒤집으며 손바닥을 하늘로 치켜들자 그것을 신호로 발아래에서 진흙이 솟구쳐 올랐다. 그것은 마치 흙으로 만든 커튼처럼 보였다.
그 장막 위로,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저건…… 선대 랭우드 후작 각하 아니야?”
나이가 든 귀족 중에선 그 장막 위로 떠오른 얼굴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뒤이어 비열한 표정을 짓고 있는, 지금보다는 젊은 마커스의 얼굴이 겹치듯 떠올랐다.
마치 인형극 같은 느낌으로 흙으로 만든 장막은 계속해서 장면을 바꿔 댔다.
젤다와 만나 모의하는 장면과 랭우드 후작저 주위에 마커스가 자신의 수하들과 함께 무엇인가를 뿌리는 듯한 모습들이 계속해서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이윽고 젤다가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뒷문으로 빠져나오는 모습이 보였고, 마커스가 불의 펜던트을 이용해 커다란 불길을 일으키는 모습이 떠올랐다.
불은 삽시간에 퍼져 웅장하던 랭우드 후작저를 집어삼켰다.
사람들 사이로 경악이 퍼져 나갔다.
“세상에…… 정말이었네요.”
“정령들께서 거짓말을 하시진 않을 거 아녜요?”
비록 아무런 목소리도 들을 수 없었지만, 그간 있었던 사정을 알아차리는 것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저는 잊고 살았다.
그런 장면들이 만인의 앞에서 속속들이 드러나기 시작하자 마커스의 얼굴은 이제는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새하얗게 질리며 마구잡이로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는 마지막 발악을 했다.
“그만! 그만! 이프리트! 당장 저 흙을 무너트려!”
재촉이 가득한 마커스의 목소리에 불도마뱀이 움직였다. 얼마나 무거운지 그 발걸음에 연회장의 바닥이 움푹 파였다.
“캬아!”
이프리트는 붉은 혀를 날름거리다가 입을 벌려 사나운 불길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꺄아아악!”
“저쪽! 문 쪽으로 몸을 피해요!”
연회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귀족들은 저마다 비명을 지르며 그 불길을 피해 도망쳤다.
“캬아!”
이프리트는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입에서 불길을 뿜어내었다.
로제타는 마른침을 삼키며 전방을 주시했다.
‘또다시 불이야.’
불에 대한 트라우마가 상당히 심했지만, 로제타는 이번만큼은 물러서지 않았다.
“정말이지. 사람은 변하는 게 아니군요.”
그녀가 싸늘하게 중얼거리더니 마커스가 딛고 선 쪽의 땅을 노려보았다.
‘저자가 내게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걸 보고 싶어.’
조금씩 차오르던 분노는 점점 더 강해졌고, 로제타는 저도 모르는 사이 그런 생각을 해 버렸다.
‘저자는 몇 번이나 내 목숨을 위협했고, 내 가족마저 앗아 갔어. 한 번쯤은 나도…… 갚아 줘도 되는 거잖아.’
그러자 정말 자연스럽게도 그녀의 머릿속에 무엇인가가 떠올랐다.
로제타가 한쪽 입꼬리만 끌어 올리고는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저자가 내게 무릎을 꿇고, 엎드려 비는 꼴을 적어도 한 번은 봐야겠어.”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커스가 딛고 선 땅이 움푹 패며 그의 몸이 크게 휘청거렸다.
“이, 이게 뭐야?”
중심을 잡기 위해 두 팔을 내저으며 허공에서 허우적거렸지만, 무너지는 몸을 바르게 세울 순 없었다.
이윽고 마커스의 몸이 바닥에 엎어졌다.
하지만 그는 다시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으아아아악!”
마커스가 바닥을 짚으려고 할 때마다 단단한 바닥이 모래처럼 허물어졌다.
빠져나오려 할수록 벗어날 수 없는, 그것은 마치 개미지옥과도 같았다.
“왜 이러는 거야! 젠장! 빌어먹을!”
제 몸을 제 뜻대로 움직일 수 없자, 마커스는 짜증이 치솟는 듯 연달아 거친 욕설을 퍼부었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더 심각해질 뿐이기만 했지.
버둥거릴수록 모래는 더욱더 그를 아래로 끌어당겼다. 벌써 허리 아랫부분은 모래에 잠겨 빠져나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 마커스에게로 가까이 다가간 로제타가 차가운 눈길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 망할, 애송이 년이!”
모래 범벅이 된 마커스가 그녀를 올려다보며 짓씹듯 거친 말을 내뱉었다.
그가 퍼붓는 욕설을 무감한 표정으로 듣고 있던 로제타는, 마커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 말은 나보다, 지금 당신에게 더 잘 어울릴 것 같군요.”
“이, 이……!”
“그대로 망해 버려.”
그녀의 말이 끝나자 모래가 조금 더 빠른 속도로 마커스를 아래로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으, 윽!”
마커스는 빨려 들어가지 않기 위해, 마치 헤엄을 치듯 팔을 버둥거리며 무엇인가 단단한 것을 잡고 버티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손에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퍼석거리는 모래만이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부질없이 빠져나갈 뿐.
마커스는 자신의 힘만으로는 이 모래 속에서 빠져나가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십 년 넘게 자신이 공들여 쌓아 온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는 것도 깨달은 터였다.
그의 마음에 패배감이 스며들었다.
“감히, 빨간 머리 계집 주제에……!”
끝도 없이 차오르는 분노는 로제타에게로 그 가지를 뻗어 나갔다.
자신을 몰락시킨 것이 스스로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저 애송이 계집애의 탓이라고 화살을 돌려야지만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입 안의 살을 꽉 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그러다 이내 근처에 있는 이프리트를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이프리트!”
자신은 더 이상 일어설 수 없다.
그러니 자신을 이 꼴로 만든 로제타에게 본때라도 보여 줘야 성이 찰 것 같았다.
“저 계집을 죽여라. 뜨거운 맛이라도 보여 줘야 내 속이 풀리겠으니, 죽여 버려!”
“캬아!”
불도마뱀이 사납게 짖으며 다시금 로제타에게로 아가리를 벌렸다.
짧게 숨을 들이켠 뒤 길게 내쉬자 이프리트의 입 안에서 새빨간 불길이 치솟으며 튀어나왔다.
그 불은 로제타를 향해 맹렬한 기세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아, 읏…….”
그 열기를 막아 보려 로제타가 주춤 뒤로 물러서며 양팔을 들어 올려 제 얼굴을 가렸을 때였다.
“피르!”
테런이 다급한 목소리로 제 정령을 불렀다.
그러자 피르가 기다렸다는 듯 커다란 날개를 활짝 펴고, 크게 날갯짓을 했다.
휘이이이잉!
피르의 날개에서 뻗어 나온 강한 바람이 매서운 소리를 내며 연회장을 가득 울렸다.
그렇게 피르의 바람은 로제타를 지키기 위해, 망설임 없이 뻗어 나갔다.
그런 뒤 이프리트가 내뿜은 불길과 힘겨루기를 하는 것처럼 팽팽하게 맞섰다.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을 졸인 채, 피르와 이프리트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이런 식으로 정령들이 맞서는 것을 본 적이 없거니와, 과연 누가 이길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도 행여 자신이 휘말리게 될까 봐 한껏 몸을 움츠린 상태였다.
사방으로 불티가 튀고, 바람은 더욱 스산하고 무서운 소리를 내며 공포심을 배가시켰다.
한참 만에 누구 하나 우세하지도, 열세에 몰리지도 않던 둘의 싸움에 조금씩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피르가 위협하듯 매서운 울음소리를 한번 내뱉고는 강력하게 날갯짓을 한 번 더 했다.
그러자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큰 바람이 생겨났고, 그것은 이내 하얀 띠를 두르며 이프리 트의 불길을 누르기 시작했다.
콰장창!
그 기세가 어찌나 거센지 연회장의 유리창을 모두 깨트려 버리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마커스가 악에 받쳐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프리트! 뭐 하고 있나! 당장 저것들을-.”
하지만 아무리 마커스가 악을 써도 이미 수세에 몰린 상황을 타개하기란 쉽지 않았다.
한번 기세를 누르자 바람은 마치 태풍처럼 몰아치며 이프리트의 불을 찍어 눌렀다.
“캬, 아아아!”
이프리트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힘을 더 짜내려고 했으나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더운 기가 훅, 꺾였다.
이프리트가 내뿜은 불길은 강한 바람에 그대로 방향을 꺾었고, 로제타가 아닌 마커스 쪽으로 날아갔다.
“아, 안 돼……!”
모래 지옥에 빠져 있던 마커스는 그 불길을 미처 피할 수 없었다.
“크아아아악!”
서둘러 두 팔을 들어 올려 제 얼굴을 가리며 상체를 숙여 보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불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프리트의 불은 그렇게 손쓸 새도 없이 마커스를 한입에 집어삼켜 버렸다.
“끄아아아아악!”
모래 수렁에 빠져 옴짝달싹할 수 없던 마커스가 연신 귀 아픈 비명을 질러 댔다.
심지어 그를 붙잡고 있는 모래가 빠른 속도로 열기를 흡수하고 있었다.
그렇게 달구어진 모래는 상처가 난 마커스의 몸에 달라붙으며 더욱 그를 지져 댔다.
“으아아! 아악! 뜨거워!”
마커스는 연신 기괴한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이곳, 연회장에 있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감히 그를 돕기 위해 나서지 않았다.
그러기엔 불길이 너무도 세, 행여 자신까지 피해를 입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사, 살려 줘! 제발! 으아아아!”
마커스는 계속해서 비명을 지르며 모래에 처박힌 채 몸을 비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