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46화
“도대체 이게 무슨……. 하아.”
국왕은 다소 황당하다는 얼굴로, 엉망이 된 연회장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이윽고 머리가 아프다는 듯 눈을 감았다.
짜증이 잔뜩 섞인 한숨을 길게 내뱉은 그는 만사가 피곤하다는 듯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엘라임. 제발 이 정신없는 상황 좀 정리해 주게.”
그러자 엘라임이 얼굴을 가볍게 찌푸리고는 이프리트와 마커스 쪽으로 팔을 뻗었다.
정령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비틀다가 손가락으로 원을 그렸다.
그러자 검지 끝에서 반짝이는 연기가 나선형을 그리며 나오더니 이내 물줄기로 변했다.
그것은 엘라임의 손짓을 따라 위로 솟구쳐 올랐다가, 곧 물벼락으로 모습을 바꾸어 마커스를 휩싸고 있는 불길 위로 떨어져 내렸다.
정령의 힘이 깃든 물 덕분인지, 이프리트의 불은 금세 꺼졌다.
불길이 사그라지자 마커스의 상태가 더욱 잘 보였다. 얼굴과 온몸은 숯덩이처럼 새카매진 데다, 하얀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입고 있던 옷은 거의 다 타서 속살을 드러내었다. 또한, 직접적으로 불길이 닿은 피부는 붉게 달아올라 흉하게 일그러진 상태였다.
이프리트는 계속해서 날뛰고 있었는데, 그리 오래 반항하진 못했다.
-이 천지 구분 못 하는 도마뱀아. 그쯤 하지 않으면, 네 마지막 불씨 하나 남기지 않고 모조리 꺼트려 줄 테다.
엘라임이 언짢은 목소리로 경고하고, 노아스와 피르가 이프리트를 제압하듯 압박했기 때문이다.
“캬아……!”
잠시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던 이프리트는 결국 아가리를 다물었다.
그런 뒤 스르륵, 연기처럼 모습을 바꾸고는 마커스가 손에 쥐고 있는 불의 펜던트로 다시 돌아갔다.
그제야 연회장의 모두가 한시름 덜었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엘라임은 혀를 차며 연회장 곳곳에 붙은 불을 사그라뜨렸다.
그때였다.
“리스턴을 처단하라!”
여럿의 목소리가 합쳐진, 커다란 목소리가 성 밖에서부터 들려오기 시작했다.
왕국민들이 내는 목소리였다.
로제타가 연회장 안에 노아스의 힘을 빌려 흙의 장막을 세우던 시각, 성 밖에서도 커다란 웅성거림이 퍼져 나갔다.
왕국민들도 어찌 돌아가는 상황인지 실시간으로 알 수 있도록 성 밖에서도 흙으로 이루어진 연극이 펼쳐졌다.
몇몇 곳은 파티 홀처럼 진흙이 장막처럼 솟아올랐고, 또 몇몇 곳은 바닥이 모래로 변하고는 마치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장면이 휙휙 바뀌었다.
호기심에 하나둘 모여들었던 사람들은 땅 위에 그려지는 그림과, 왕궁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간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어찌 저런 흉악한 짓을!”
“순 나쁜 놈 아니야!”
그 누구보다도 4가문을 진심으로 섬겼고, 자랑스러워했던 왕국민들의 분노는 들불처럼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한마음, 한목소리로 리스턴 후작가의 징벌을 부르짖었다.
마커스는 이미 실신한 상태였다.
“으……. 끄아아…….”
하지만 정신을 놓은 와중에서도 이상한 신음을 흘리며 손가락을 움찔거리듯 움직이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퍽 괴기스럽고 흉측했다.
-얼추 상황이 정리된 것 같으니, 나는 이만 다시 돌아가겠다. 인간계는 너무 시끄럽고, 정신 산만해.
엘라임은 진절머리 난다는 듯 가볍게 머리를 두어 번 내젓고는, 이내 물방울로 변하며 다시 정령계로 떠났다.
하지만 피르와 노아스는 여전히 자리를 지켰다.
마커스의 모습에 로제타가 신물을 삼키듯 살짝 고개를 돌리자, 테런이 그녀를 끌어안아 제 가슴팍에 기대게 했다.
“보지 마, 로제.”
그녀를 다독이며 진정시킨 뒤, 테런이 국왕을 향해 굳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폐하.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마커스 댄 리스턴은 15년 전의 악행을 반성하지 않았고, 최근에 착취를 목적으로 랭우드 후작을 납치해 억지로 힘을 각성시키려 했습니다. 사욕을 위해 두 번, 아니, 세 번이나 그녀의 목숨을 위협하여, 이 윌셔스에서 땅의 힘을 영영 거두어 가려고 한 그 죄를 무겁게 치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나긋했지만, 그 말엔 힘이 어려 있었다.
테런의 말 중 어디 한 군데도 틀린 구석이 없었다. 국왕은 끙 앓는 소리를 나지막이 흘렸다.
그는 한심하다는 듯 정신을 잃은 마커스를 한번 흘겨보고는 이내 허리를 바르게 세웠다.
짧게 목을 고른 국왕이 이윽고 위엄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판결하겠다.”
그 짧은 한마디에 회장이 일순 조용해졌고, 마찬가지로 바깥에서 계속해서 들려오던 ‘리스턴을 처단하라!’라는 왕국민들의 외침도 멎었다.
모두가 자신의 말을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에, 국왕은 평소 모두의 앞에 나설 때보다 더 긴장되는 느낌을 받았다.
이윽고 그가 입을 열었다.
“이 시간 이후로 마커스 댄 리스턴이 누리고 있던 모든 권리를 회수한다. 그에게 주어졌던 리스턴 후작위도 거둘 것이며, 그간 벌여 온 악행에 대한 합당한 벌을 내리겠다. 오늘 짐이 내린 처분은 번복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국왕이 내린 처분은 온전히 마커스, 개인에게만 맞춰져 있었다.
그 사실을 눈치챈 테런과 로제타, 그리고 제임스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하지만 셋이서 시선만 교환할 뿐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정말 예상대로구나.’
사실 세 사람은 오늘 있을 일에 대해서 미리 이야기를 나누고 많은 경우의 수를 예상해 왔다.
그러다 결국 하나로 의견을 모은 것이 바로 지금 같은 상황이었다.
국왕은 어떻게든 피해를 최소화하고 싶을 테니, 마커스 개인의 문제로 상황을 몰 것이라는 것.
「이런 말이 섭섭하게 들릴 것은 잘 안다만…… 로제. 넌 앞으로 랭우드로서 새로운 입지를 다져 나가야 한단다. 물론 테런과 우리 에스테스가 널 지지해 주겠지만 객관적으로 봤을 때, 우리만으론 힘든 것이 사실이다.」
로제타는 제임스의 말에 동의했다.
왕가와 척을 지게 된다면, 제게 유리한 것은 무엇 하나 없었다.
그랬기에 리스턴 가문 전체에 대한 징벌을 요구하며 강경하게 나가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국왕은 4가문이라는 현재의 체제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가문의 힘이 약해지는 것과 가문이 아예 없어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이미 한 번, 15년 동안 랭우드가 부재하며 일어난 폐해들을 직접 겪어 보지 않았는가. 왕국의 존속을 위해서라도, 그는 리스턴 후작가를 폐문할 수 없었다.
“당장 마커스에게서 불의 펜던트를 빼앗고, 의식을 회복하는 대로 채석장으로 보내 종신하게 하라.”
채석장이라는 단어에 귀족들 사이에 술렁임이 일었다.
“폐하께서 방금 채석장이라고 하셨지요?”
일평생 귀족으로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감옥에 갇혀 햇빛을 보지 못하고 사는 것보단, 노동이 훨씬 더 가혹한 벌처럼 느껴졌다.
“사안을 생각하면 과하다곤 생각이 들지 않네요.”
“일의 엄중함을 생각해 보자면 마땅한 처벌일지도요. 15년 전의 사건 때문에 우리 모두 땅의 가호를 받지 못하고 살긴 했잖아요.”
“제 말이 그 말입니다.”
다행히도 귀족들은 그저 놀랐을 뿐, 국왕의 처분이 적절하다고 판단하는 눈치였다.
게다가 채석장은 로제타의 가문인 랭우드의 관할이었다.
실질적으로 마커스의 처분을 새로운 랭우드 후작인 로제타에게 맡긴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국왕 나름대로, 로제타를 배려해 준 것이기도 했다.
‘이쯤에서 만족해야겠지. 다른 목적도 하나 더 남았으니까.’
이제 겨우 하나의 일만 끝난 터였다.
로제타는 아랫입술을 살며시 깨물다가 놓으며 묵직한 숨을 뱉어 내었다.
그사이, 국왕의 지시로 기사들과 시종들이 실신한 마커스를 데리고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그때, 이쯤 하면 만족하지 않았냐는 듯 자신들 쪽을 바라보고 있는 국왕과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행여 제 목소리가 백성들에게 들릴까 봐 입술은 꾹 다물고 있었다.
국왕의 눈빛은 마치, 테런에게 이제 그만 목소리가 밖으로 흘러가는 것을 멈추라고 요구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테런은 태연하게 못 본 척했다.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남아 있었다.
테런이 제 뜻대로 힘을 거두지 않자, 국왕이 묵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이쯤에서 자리를 파하는 게 좋겠군.”
국왕이 왕좌에서 반쯤 엉덩이를 들어 올렸을 때였다.
“아니요, 폐하. 아직 한 가지 안건이 더 남았습니다.”
로제타가 그를 막아섰다.
일어나던 중이라 국왕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로제타의 얼굴에 어린 심각함을 읽어 낸 그가 한숨을 길게 내쉬며 다시 엉덩이를 의자에 붙였다.
“그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다른 날 하면 어떻겠나? 이제 얼굴 볼 날도 많은데.”
그가 손으로 눈썹 근처를 거칠게 문지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피곤하신 마음은 알지만, 이렇게 많은 귀족들이 모이기가 쉽지 않지 않습니까?”
정중하지만 완강함이 느껴지는 그녀의 말에 국왕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차피 이렇게 된 것. 머리 아픈 일이 있다면 오늘 모조리 다 끝내 버리자 싶은 마음에서였다.
“발언을 허한다.”
“감사합니다, 폐하. 그럼 조심스럽지만…… 말씀 올리겠습니다.”
로제타가 짧게 숨을 들이켠 뒤, 또박또박 말했다.
“랭우드 후작가는 왕세자 전하의 교체를 정중히 요청하는 바입니다.”
“……뭐?”
자리의 엄중함을 잊은 듯, 사건의 당사자인 바론이 저도 모르게 반말을 툭 내뱉어 버렸다.
새하얗게 질린 그의 얼굴은 마치 종잇장처럼 구겨져 있었다.
하지만 로제타는 그런 바론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시간부로 랭우드 후작가는 차기 국왕 후계자로 체이스 님을 지지하겠습니다.”
테런도 한 발자국 나서며 로제타에게 말을 보탰다.
“에스테스 공작가 역시, 랭우드 후작이 낸 의견에 뜻을 함께하겠습니다.”
그때, 바론에게서 거친 욕설이 튀어나왔다.
“빌어먹을.”
생각할수록 열이 오르는 모양인지 하얗게 질렸던 그의 얼굴은 이번엔 분노로 시뻘겋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이런, 미친 것들을 보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