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애 옆에 예쁜 애 147화
바론이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얼마나 힘이 실렸는지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것이 육안으로도 보일 정도였다.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네까짓 것들이……!”
“바론.”
국왕의 엄중한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당장 단에서 내려와 테런과 로제타의 멱살을 쥐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왕세자는 발언에 있어 신중하도록 하라.”
국왕은 언짢은 목소리로 재차 바론을 제지했다. 그 음성에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기색이 역력했다.
‘멍청한 놈 같으니.’
국왕은 속으로 바론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아직 테런이 힘을 거둬들이지 않아, 왕국민들에게 이 연회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소리가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을 것이었다.
‘어찌 그걸 잊느냔 말이야. 못난 놈 같으니.’
아무리 화가 나기로서니, 중요한 사실을 주지하지 못하고 제 감정에 치우쳐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바론의 태도가 몹시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될 자에게 필요한 덕목 중 하나는 냉철함이었다.
바론은 그것이 매우 부족했다.
아무리 고슴도치도 제 자식은 함함하다고 한들, 국왕의 눈에도 그것이 빤히 보일진대 다른 이들은 오죽하겠는가.
국왕은 눈살을 찌푸리며 남몰래 혀를 차고는 힐끗 체이스를 돌아보았다.
‘아무래도 모르고 있던 모양이군.’
체이스는 소란 떠는 바론에 비해 침착해 보이긴 했지만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국왕은 다시 로제타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졌다.
“영애, 아니, 랭우드 후작은 지금 자신이 한 발언이 미칠 파장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 맞는가?”
“네. 제 말의 무게 또한 잘 알고 있습니다.”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지, 로제타가 앞으로 모은 두 손을 꼭 쥔 채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내가 또 묻지 않을 수가 없네. 갑자기 그러한 발언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바론과 체이스, 형제를 반목시켜, 윌셔스 왕국에 새로운 파벌을 형성하겠다는 뜻인가?”
“아닙니다.”
조용하지만 압박감을 주는 말투에도 불구하고 로제타는 차분하게 대답을 이었다.
“제가 누릴 권리만큼 이행해야 하는 의무, 그 외에 정치적인 사견은 조금도 들어 있지 않습니다.”
“한데 그런 말을 한 저의가 무엇인가?”
“윌셔스 왕국의 국민 중 한 사람으로서, 조금 더 나은 자질을 갖춘 분이 지도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입니다.”
국왕의 눈매가 더욱 가늘어졌다.
“지금 후작이 한 말은, 바론보다 체이스가 더 자질이 있다는 소리로 들리는군.”
“그러합니다.”
로제타는 바론의 눈치 따위는 조금도 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의 행동을 본 바론이 어금니를 악문 채로 ‘망할 년이 진짜.’ 하고 욕설을 뇌까렸다.
큰 목소리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작은 크기도 아니었다.
분명 왕국민들에게도 들렸을 거란 생각에 국왕은 혀를 찼다.
“왕세자는 가만히 좀 있으라. 그리고 후작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그 근거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게.”
“이번 시찰에서 체이스 님께서 보여 주신 힘을 보았습니다.”
“체이스의 힘? 그렇다면 더더욱 말이 되질 않는군. 2왕자가 사용한 물의 힘은, 내가 준 아티팩트 덕분에 발현된 것이 아닌가?”
로제타의 말에 국왕은 이해하기 힘들단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였다.
“그에 대한 설명은 제가 드리겠습니다. 폐하.”
테런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이미 보고를 받아 알고 계시겠지만, 체이스 왕자님의 힘에 감응해 아티팩트가 폭주하였습니다.”
그 말에 체이스가 입술을 꾹 다물며 어깨를 움츠렸다.
핏줄인 국왕도, 바론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소년의 태도를 눈여겨본 것은 테런이었다.
“왕자님을 탓하고자 올린 말씀이 아닙니다. 그저, 폐하께서 그날 있었던 일을 조금 더 상세하게 아실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서 꺼낸 말이지요.”
로제타가 테런의 말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해 체이스를 바라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뒤에야 체이스가 아주 조금 어깨를 쭉 폈다.
국왕은 끊긴 이야기가 조바심 난다는 듯 손짓까지 해 보이며 재촉했다.
“계속 설명해 보게.”
“그날 무너진 댐에서 터져 나온 물길을 막아, 수장될 뻔한 카르나 마을을 살린 것이 랭우드 후작이라는 것은 아실 겁니다.”
“그래. 거기까진 내가 들어서 알고 있지.”
“저와 랭우드 후작은 물의 아티팩트가 폭주했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그것은 체이스의 힘이 미숙해서 그런 것 아니겠는가?”
“조심스럽지만, 저희의 생각은 다릅니다. 폭주하려면 그만한 동력이 받쳐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테런은 체이스의 힘이 아직 제대로 발현되지 않아서 그렇지, 내재된 힘이나 능력은 높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설득되는 모양인지 이야기를 듣는 중간중간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국왕은 얼굴에서 마지막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
“그럴 수도 있겠군. 하지만 나는 자네들이 한 말을 영 믿기 힘들군.”
“그렇다면 폐하.”
로제타가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한번 시연해 보라고 하심이 어떠시겠습니까?”
“시연?”
“예. 때로는 백번 말로 설명을 듣는 것보다 한번 눈으로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할 테니까요.”
“흠. 그거야 그렇지.”
로제타가 의견을 이어 나갔다.
“소신들의 말을 믿지 못하시겠다면 이 자리에서 바론 님과 체이스 님이 직접 엘라임을 소환해 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국왕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아무리 왕좌에 앉아 있다고 한들, 4가문 중 과반에 해당하는 두 가문이 요구하는 일을 무시하기는 어려웠다.
더더군다나 지금은 귀족들은 물론, 백성들의 귀도 열린 자리이지 않던가.
앞으로 왕가가 그들의 지지와 존경을 얻을 수 있을는지 없을는지는 지금 이 한순간의 결정에 달렸다.
국왕이 좀처럼 결단을 내리지 못하자 테런이 한마디를 더 보탰다.
“그리고 바론 전하는 그간 마커스 댄 리스턴과 결탁해 불법을 저질렀습니다.”
“불법이라니?”
“랭우드의 힘이 부재하는 동안, 두 사람은 합심해 모조 보석을 만들어 유통했습니다. 진주나 제이드 같은 유색 보석을 위조하여 부당한 이득을 편취한 것이죠.”
“즈, 증거가 있나!”
바론이 당황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제게로 쏟아지는 국왕의 책망하는 시선으로부터는 벗어날 수가 없었다.
테런은 호기롭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아무런 증거 없이 가볍게 올릴 말씀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는 턱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을 이었다.
“폐하께서 원하시면 언제라도 보고서를 올릴 수 있습니다.”
“후우…….”
국왕이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얼굴 주름이 더욱 깊어져 있었다.
하지만 차오르는 분노를 어찌 달래야 좋을지 도무지 알 수 없었던 모양인지, 그가 의자의 팔걸이를 꽉 움켜쥐었다.
국왕은 고민을 거듭했다.
이미 바론에 대한 악평은 귀족 계층을 넘어 평민들에게도 퍼져 있었다.
그는 길게 숨을 몰아쉬며 답답한 속을 조금이라도 환기하고자 했다.
‘어찌 되었든 둘 다 내 아들이 아닌가.’
둘 중 누가 차기 국왕이 된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손해 보는 일은 없었다.
핏줄이 끊기는 것도 아니었으며, 조금 더 나은 후계자를 세우는 것은 자신의 명성을 지키는 것에도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그리고 바론에게도 공평하게 제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셈이 되지 않는가.
‘분명 바론, 저 철부지는 내게 찾아와 징징거릴 것 같지만.’
어찌 되었는 자신은 할 도리를 충분히 다한 것일 테니 저도 막무가내로 떼를 쓸 수만은 없을 것이었다.
‘그러게 미리 좀 갈고닦을 것이지.’
국왕은 남몰래 혀를 찬 뒤 숨을 들이켰다. 그런 뒤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론, 그리고 체이스. 둘 다 회장의 중앙으로 나오거라.”
모두가 숨죽였지만, 단 한 명만은 그렇지 못했다.
“아바마마!”
당황한 바론이 당황과 짜증이 섞인 목소리를 버럭 내지르며 국왕을 불렀다.
언제나 자신에겐 물렀던 아버지였으니 이번에도 제 편을 들어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아바마마께서도 제게……!”
“바론, 경거망동하지 말아라. 지금이 어떤 자리더냐? 이곳은 사석이 아니다. 한데도 네가 내 말을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지금 왕명을 거역하겠다는 뜻이더냐?”
바론의 입이 조개처럼 다물렸다.
살그머니 주위를 둘러보며 눈치를 살피던 그의 얼굴에 낭패감이 어렸다. 그 누구에게서도 자신을 도와주려는 기색을 찾아볼 수 없었다.
‘젠장!’
아주 잠깐 마커스가 후작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이미 늦은 터였다.
그사이, 국왕은 반대쪽을 돌아보며 둘째 아들도 가볍게 채근했다.
“체이스 너도. 어서 중앙으로 나가거라.”
“……예, 아바마마.”
체이스가 제 형의 눈치를 보다가 쭈뼛거리며 먼저 나서자, 바론이 못마땅하다는 듯 연신 혀를 차며 걸음을 옮겼다.
그는 체이스가 자신의 경쟁자라는 사실에 분노하고는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섰다.
두 사람의 자세는 시작부터 달랐다. 체이스는 몸가짐을 바르게 했고, 바론은 이 자리가 치욕스럽다는 듯 매우 불량하고 삐딱하게 서 있었다.
국왕은 한숨을 삼키며 제 아들들에게 말했다.
“엘라임을 소환해 보도록 하라. 둘 다 기본 소양은 있을 테니, 목소리는 정령계로 가 닿을 것이니. 먼저 바론부터 시작하지.”
국왕은 손을 들어 직접 첫째 아들을 지목했다.
하지만 바론은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영 자신 없는 표정이 얼굴에 가득했다.
“아바마마.”
“어서.”
시간을 끌려는 바론의 말을 잘라 버리며, 국왕이 재촉했다.
바론은 제 아버지가 더는 자신을 옹호해 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엘라임.”
그가 중얼거리듯 성의 없게 툭, 정령을 불렀다.
연결이 되어 있다면 아무리 작은 부름에도 응하는 것이 정령. 하지만 연회장은 조용했다.
엘라임이 등장할 때 특유의 청량한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귀족들 사이에 수군거림이 일었다.
“왜 나오지 않는 거죠?”
“폐하의 직계시잖아요. 그리고 어릴 때부터 정령 친화 수업을 들으셨을 텐데…….”
“쉿. 들리겠어요.”
여럿의 목소리가 합쳐지니, 그것이 바론의 귀에 들어가지 않을 리 없었다.
그의 얼굴이 금세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어금니를 악문 듯 아래턱이 단단해졌다.
“엘라임! 어서 나오라고!”
그는 열이 받은 듯 악다구니를 쓰며 정령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바론의 목소리는 연회장의 벽 곳곳에 부딪히다 튕겨 나올 뿐이었다.
엘라임은 끝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바론의 고함은 그저 공허한 외침으로 사라졌다.
“그만.”
국왕이 한숨을 푹 내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만하라, 바론.”
바론이 씩씩거리다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얼굴에 짙은 패배감이 묻어 있었다.
국왕은 눈두덩이를 피로가 묻은 손으로 문지르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은 체이스.”
지목받은 체이스가 앵무새처럼 입술을 꼭 다문 뒤, 두 손을 힘껏 마주 잡았다.
적잖이 긴장되는 듯 크게 숨을 들이켰다가 길게 내쉰 소년은 무척이나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에, 엘라임.”
체이스는 과연 엘라임이 자신의 목소리에 반응할지 반신반의한 얼굴로 목소리를 내었다.
솔직한 마음으론, 차라리 제 부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런 소년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연회장에는 금세 청량한 기운이 스미는 것처럼 퍼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윽고 체이스의 바로 앞, 허공에 조금 전 정령계로 돌아갔던 엘라임이 다시 모습을 드러내었다.
-왜 불렀느냐?
체이스를 비롯한 모두의 눈이 놀람으로 동그래졌다. 놀라지 않은 것은 오로지 에스테스 공작 부자와 로제타뿐이었다.
“어, 어째서 나온…….”
하지만 엘라임이 머무른 시간은 무척이나 짧았다.
-조금 더 힘을…… 키워야…….
아직 어린 왕자의 힘만으로는 인간계에 오래 머물 수 없었던지, 엘라임은 모습을 드러내기 무섭게 다시 물방울로 변해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그 순간이 아무리 짧아도 정령이 소환에 응해 모습을 드러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바, 방금 엘라임께서 나오신 게 맞지?”
“네, 저도 분명히 보았어요.”
“그렇다면 랭우드 후작님의 말씀대로 바론 님보단 체이스 님이…….”
국왕이 보기에도 물을 다루는 힘의 차이가 너무도 극명하게 갈렸다.
그는 재차 짙은 한숨을 무겁게 내쉬었고 한심하다는 눈빛을 바론에게 보냈다.
“젠장. 빌어먹을.”
바론은 고개를 떨군 상태로 이를 갈다가 이내 자리를 박차고 회장을 뛰쳐나갔다.
아무도 그를 붙잡는 사람은 없었다.
“쯧쯧.”
그런 행동마저 어리석어 보여, 국왕은 혀를 차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부쩍 수척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바론 티모시 윌셔스를 왕세자의 직위에서 해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