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 목표
메르헨 아카데미.
대륙 동부에 위치한 거대한 외딴 섬 자체가 통째로 메르헨 아카데미의 부지다.
여기는 독자적인 경제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우선 통용되는 화폐부터 다르다. 여기선 ‘겔’이라고 불리는 화폐만 쓸 수 있다.
겔을 얻기 위한 수단은 수행평가나 시험이다. 성적이나 특정한 기준에 따라 차등 부여된다. 아르바이트도 가능하지만 효율은 좋지 않다. 보충적인 수단쯤이라 봐야 할까.
현지의 돈을 겔로 환산할 수도 있다. 다만 어디까지나 매 학기가 시작되기 직전, 한 학기의 등록금까지만. 겔이 많으면 그걸로 등록금을 지불하면 된다.
겔이 부족할 경우엔 어떡하는가? 남한테 빌리거나 아카데미 은행에 가서 대출받거나 시급 적은 아르바이트를 할 수밖에 없다. 안 그러면 쫄딱 굶어야 한다. 냉혹한 곳이다.
아카데미에 처음 온 신입생들에겐 전원 5000겔이 주어진다.
교재나 교복 같은 건 전부 제공되기에, 쓸데없는 과소비라도 하지 않는 이상 다음 수행평가 때까진 넉넉하게 쓸 수 있는 수준이다.
나는 학생 식당에서 적당히 겔을 써서 점심과 저녁을 해결했다. 전부 맛있는 데다 포만감도 느껴졌다.
어째 기분이 묘했다.
오늘 트레비옹을 물리치고 입학식과 오리엔테이션까지 경험하니, 내가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 빙의되었다는 사실이 더욱 여실히 체감되었다.
도서관에도 가보았다. 아마 내 수준에 맞을 거라고 생각되는 기초마법개론을 읽어보았다.
읽을 만했다. 게임 지식 덕분인지 내용을 이해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한번 고급마법개론도 꺼내서 읽어보았다.
‘어우, 개어렵고요.’
물리학? 화학? 나는 문과라 잘 모르겠지만, 그런 걸 보는 기분이었다.
보기만 해도 현기증이 일어서 곧바로 책을 덮고 기숙사로 향했다.
메르헨 아카데미엔 기숙사가 총 네 곳이 있다. 매 학기마다 성적별로 갈 수 있는 곳이 나뉜다.
나는 상대적으로 가장 시설이 낙후된 최하위 기숙사, ‘도리스관’에 속해 있었다. 입학시험 성적으로 기숙사를 배정받은 것이다.
도리스관은 열등생들이 모이는 기숙사다. 성적으론 하위권부터 최하위권이 밀집된 곳. 주인공 이안 페어리테일도 지금은 여기에 속해 있다.
나는 내 방으로 들어갔다.
내 방엔 짐들이 전부 옮겨져 있던 상태였다. 옷이나 세면도구, 1회용품, 필기구 등등 필요한 건 이것저것 다 있었다.
그나저나 역시 좁은 방이었다. 물론 다른 기숙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좁다는 것일 뿐.
신림동 3평짜리 원룸에서 지내본 고시생 경력자로서 봤을 때, 이 정도면 충분히 넓고 깔끔하고 호화로운 편이었다.
참고로 이곳 시설은 학사 측에서 일부러 좁게 만든 것이다. 더욱 분발해서 여기서 빠져나가라고 재촉하기 위해서다. 과연 엘리트주의.
샤워 시설 같은 건 아주 잘 구비되어 있다.
“이런 곳에 처박혀 있을 쏘냐!!!”
“우왓! 뭐야?”
깜짝 놀랐네···.
다른 방에서 누가 소리친 것 같았다. 강한 탈출 의지가 느껴지는 외침이었다.
뭐, 항상 좋은 곳에서 호의호식하던 귀족들한테 이런 방은 꽤 심리적 타격이 크겠지.
나는 문을 닫고 침대에 앉았다. 1인용 침대는 푹신하게 내 엉덩이를 감쌌다.
“······.”
벌써 이 게임에 빙의된 지 3일째구나.
오늘도 잠들고 현실로 되돌아가지지 않는다면, 몇 번이나 생각했듯 내 목표는 명확했다.
이 게임을 클리어하는 것.
문제는··· 배드 엔딩의 기준인 주인공, 이안이 똥컨 뉴비와 다를 바 없다는 점이다.
지옥 난이도는 적들의 스펙부터 심히 악랄하다. 그래서 플레이어의 뛰어난 컨트롤 능력이 요구된다.
하지만 이안, 이 새끼는 오늘 시작부터 배드 엔딩을 맞이할 뻔했다.
앞으로도 이러지 않을 거란 보장이 없었다.
‘그럼 결국, 내가 강해져야 되네.’
그럼 나밖에 없다. 이 세계의 배드 엔딩을 막을 수 있는 존재가.
앞으로 이안을 죽이기 위해 아카데미 땅 밑에 마나 형태로 잠들어 있던 마족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올 것이다.
이안은 빛 속성을 타고난 인간이기 때문이다. 빛 속성은 마족의 약점이다. 그 덕분에 이안이 레벨 차이가 현격한 마족을 쓰러뜨릴 수 있는 것이다.
빛 속성 능력, 신성력은 오로지 신의 축복을 받은 고고한 성녀만이 사용할 수 있다. 즉, 평범한 인간인 이안이 빛 속성을 타고난 건 있을 수 없는 일.
하지만 이안은 인간과 신성력을 사용하는 천족의 혼혈이다. 그래서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는 체질을 타고난 것이다. 차근차근 떡밥 뿌리다 나중에 반전이라면서 나오는 내용이다.
물론 나뿐만 아니라 이안도 어느 정도는 착실히 강해져야만 한다. 빛 속성은 쓸 데가 많고, 나중에 신성력을 사용하지 않으면 무적인 마족이 나오기까지 하니까.
그때는 이안이 최종 무구 ‘창명검’으로 빛 속성 8성급 궁극기 [낙원추방]을 써서 무적 상태를 풀어 줘야만 한다. 즉 스토리 진행에 필요한 최소의 강함까지는 갖춰야 할 필요가 있었다.
‘최종 보스가 제일 문제네.’
가장 큰 문제는 최종 보스, ‘파멸의 악신 네피드’다.
지랄 맞게 어려운 보스다. 지옥 난이도에선, 플레이어가 가능한 한 최대치로 스펙을 쌓았어도 한 대라도 맞으면 게임 오버다. 네피드는 세계 멸망급인 9성급 마법을 펑펑 써대기 때문이다.
봉인되어 있던 악신 네피드를 부활시키는 법진은 무려 이곳, 메르헨 아카데미에 있는 ‘바르토스관’ 옥상에 새겨져 있다.
하지만 보는 것도, 건드리는 것도 불가능하다. 9성급의 절대 인식 저해 마법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건물을 부수면 어떻느냐고? 게임 이벤트 Q&A 때 어느 유저가 정확히 그 질문을 했다.
답변 내용은 확실히 기억한다. ‘법진이 시공간을 초월해 새겨져 있어서 건물을 부숴봤자 무의미하다’였다.
결국 악신 네피드는 무조건 때가 되면 부활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네피드만 잡으면 끝이란 거지.’
이안한테 마족을 보내는 당사자가 바로 네피드니까.
현재 네피드는 심연에 봉인되어 있어서 바깥세상에 마력을 조금밖에 흘리지 못한다.
네피드가 흘려보낸 마력은 땅 밑에 마나 형태로 잠들어 있는 마족들을 깨우는 데 쓰인다. 그래서 이안을 죽이려고 소수의 마족들을 틈틈이 보내는 것이다.
아무튼, 나는 그 마족들을 다 처치해나가면서 배드 엔딩을 막아야 하고.
‘이 게임을 클리어하기 위해, 최종 보스를 이길 수 있을 만큼 강해져야 한다···.’
내가 아이작인 이상 목표는 명확했다.
‘···잠재력 한번 보자.’
[ 잠재력 ]
보유 스탯 : 25
◆ 성장 속도
- 신체 단련 효율(D+) : 16/100 [UP]
- 마법 단련 효율(D-) : 10/100 [UP]
- 학습 효율(D) : 12/100 [UP]
◆ 원소 저항력
- 불 속성 원소 저항력(E) : 0/100 [UP]
- 물 속성 원소 저항력(D) : 6/100 [UP]
- 얼음 속성 원소 저항력(C-) : 24/100 [UP]
- 번개 속성 원소 저항력(C) : 29/100 [UP]
- 바위 속성 원소 저항력(E) : 2/100 [UP]
- 바람 속성 원소 저항력(D) : 13/100 [UP]
- 중립 속성 마법 저항력(D) : 8/100 [UP]
◆ 대 종족 전투력
- 대 인간 전투력(E) : 4/100 [UP]
- 대 이 종족 전투력(E) : 1/100 [UP]
- 대 천족 전투력(E) : 0/100 [UP]
- 대 마족 전투력(S) : 100/100 [MAX]
스탯을 어디에 투자해야 할까.
앞으로의 일을 생각해 보자.
곧 있으면 반 배정 평가가 있다. 이때 마족이 나올 예정이다.
문제는, 그 마족을 잡으려면 나보다 강한 녀석들뿐인 배틀 로얄에서 5시간가량을 버텨야 한다는 악조건이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대 인간 전투력]을 높여서 생존 가능성을 높이려고 한다면, 악신 네피드를 이기기 위한 길에서 멀어지게 된다.
나는 조금이라도 빨리 성장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면 [신체 단련 효율]이랑 [마법 단련 효율]을 최우선으로 올려야겠지.’
나는 [신체 단련 효율]에 10, [마법 단련 효율]에 15 스탯을 분배했다.
띠링-♪
[잠재력 [신체 단련 효율]이 D+급에서 C급으로 향상되었습니다!]
[잠재력 [마법 단련 효율]이 D-급에서 C-급으로 향상되었습니다!]
당장에 반 배정 평가 때까지 극적인 효과는 기대할 수 없겠지만, 오른 수치만큼 좋은 효율이 나길 바라야겠지.
‘이제 단련 계획 세워야지.’
···꽤 피곤했나.
책상에 앉아서 양피지를 펼치고 계획을 적어나가던 중.
나는 까무룩 잠들어 버렸다.
* * *
메르헨 아카데미의 최고 등급 기숙사, ‘샤를관’은 화려한 외관답게 각 방마다 호화롭기 그지없었다.
이곳은 각 학부, 각 학년당 수석부터 10등까지의 상위권 학생들만 지낼 수 있는 초호화 시설이었다.
개인이 부릴 수 있는 사용인을 위한 시설도 마련되어 있으며.
학사 자체적으로도 샤를관에서 지내는 학생들을 위한 고급 인력을 마련해 둔 상태였다.
그곳에서, 마법학부 신입생 차석인 카야 아스트레앙은 책상에 앉아서 턱을 괸 채 상념에 잠겨 있었다.
어두운 방 안, 발광 마법이 걸려 있는 램프의 은은한 불빛이 고급스러운 잠옷차림의 그녀를 조용히 비추고 있었다.
“앞뒤가 안 맞아···.”
카야는 오늘 있었던 일을 연신 되새김질하고 있었다.
오늘 아침, 청은색 머리칼의 남자가 마족을 쓰러뜨렸을 때.
카야는 범람하는 듯한 어마어마한 마력을 느꼈다.
그런 남자가 마력량 측정 시간에 최하위 등급인 E급이 나왔다.
모순이었다. 마력 측정기가 고장 났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청은색 머리칼의 남자가 마나를 흘려보내지 않았을 가능성은? 없다. 원소의 기운이 흘러나오는 걸 똑똑히 확인했으니까.
게다가 그때 카야 자신이 그의 나약한 마력을 느끼기까지 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청은색 머리칼의 남자가 마족을 쓰러뜨렸을 때 보여줬던 능력은 자신보다 훨씬 뛰어났다.
카야는 바람과 얼음 속성을 다룰 줄 안다. 그래서 얼음 마법에 안목이 있었다.
그의 5성급 마법, [빙결 폭발]을 봤을 땐 장인이 십수 년 동안 정성 들여 만들어 낸 걸작을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런 숙련자가 E급? 실소가 터져 나올 지경이다.
하지만 페르난도 교수는 마력 측정기가 잘못될 리 없다고 단언했고.
청은색 머리칼의 남자, 25번은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있었다.
학생들이 낄낄 웃고 조롱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마치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최대 마력량을 임의대로 바꿀 수 있는 게 대마법사의 경지···.’
말만 들어선 상상이 안 간다. 마나 자체를 임의대로 바꿔서 최대 마력량을 속일 수 있다고? 신체 세포 하나하나를 제멋대로 바꿀 수 있다는 허황된 말과 뭐가 다른가.
아니지, 애초에 대마법사 자체가 상식을 초월한 존재들이니 그럴 수 있다 치더라도···.
아무리 그래도 자기 또래의 학생이 대마법사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건 말이 안 되지 않는가.
‘대마법사’는 대륙 최고의 마법사로 인정받는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영광스러운 칭호다.
마탑주, 상위권 길드의 길드장, 황실 근위법사 같은 이미 성공할 대로 성공한 1티어 마법사들도 대마법사 앞에선 새끼손톱 만큼도 비할 바가 못 된다···.
높은 사회적 권력을 쥐고 있는 카야의 아스트레앙 공작 가문조차도 대마법사 앞에선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야 한다.
대마법사는 하늘의 축복과 최고의 재능, 뼈를 깎는 노력이 총 동원돼야만 될까 말까 한 경지.
애초에 25번 남자는 강대한 마나를 품고 있긴 했어도, 카야가 여태 봐온 1티어 마법사들보다는 조금 약한 수준이었다. 대마법사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보기에는 부족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해봤자 그의 마력량이 E급으로 측정된 모순을 설명할 순 없었다.
‘그 검은 머리 남자도 모르겠단 눈치였고.’
카야는 청은색 머리칼의 남자가 떠난 후, 공터에 기절해 있던 이안 페어리테일이라는 남자를 깨우고 치유 마법으로 상처를 아물게 했다.
여담이지만, 그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회복했다. 카야의 치유 마법은 촉진제에 불과하다는 것처럼.
그리고 치유하는 과정에서 이안에게 물었다. 마족을 쓰러뜨린 남자를 아느냐고.
전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애당초 그의 관심은 이미 잿빛 가루가 되어 사라진 마족에게만 쏠려 있었다.
그런 사람한테 계속 물어보는 건 시간 낭비일 것 같아서, 카야는 말을 아끼기로 했다.
‘25번이 강하다는 건 나만 아는 비밀이 된 건가?’
마족 출현 건은 자신이 학사에 전달하겠다고 이안에게 말했다. 보고는 마력량 측정이 끝난 뒤, 페르난도 교수에게 했다.
늦게 보고했다고 볼 순 없었다.
마족은 집단적 행동과는 거리가 멀고, 나타나면 자연재해쯤으로 여겨지는 존재들이다. 즉, 이미 마족이 해치워진 상황에서 딱히 보고에 조급해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마족을 쓰러뜨린 당사자인 25번 남자의 마력량 측정 결과와, 페르난도의 설명을 듣고.
카야는 사실과는 조금 다르게 보고했다.
마족은 이미 죽어가고 있었고, 얼마 안 가서 소멸했다고. 그래서 누가 마족을 처치한 건지 모르겠다고.
왜냐하면, 믿기지 않는 가능성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정말, 정말로, 그건 정말로 말도 안 되는데···.”
불가능하다는 인식이란 껍질이 겹겹이 쌓여 있던 그 가능성은, 서서히 껍질을 벗겨 가며 제 형상을 드러냈다.
마침내, 카야는 그 가능성을 입에 담았다.
“25번, 그 남자가 대마법사의 경지에 이른 게 맞다면···? 만약 오늘 마족을 쓰러뜨렸을 때조차도 마력량을 임의로 조절한 거라면···? 그렇다면 그 남자는 여태 역사에 기록되어온 대마법사들을 뛰어넘는, 천재 중의 천재란 건가···?”
절대불변의 진리라고 여겨져 왔던 건 예외가 나타났을 때 언제든 뒤집힐 수 있는 법이다.
인류는 귀납적으로 추론해온 것뿐.
하지만 오늘, 바로 그 ‘예외’가 나타난 거라면?
그 ‘예외’가 청은색 머리칼을 가진 남자, 25번이라면?
“굉장한 거잖아···!”
전율. 흥분이 몰려왔다.
자신은 지금 전설이 될 존재와 동기라는 얘기니까.
심지어 그의 정체를 먼저 안 사람이 자신이란 얘기니까!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알아선 안 될 엄청난 진실을 마주해 버린 기분이었다.
카야는 부들부들 떨면서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아냐, 아냐. 진정해.”
교수님께선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잖아. 신중하게 생각하자.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생각해 보면, 있을 수 없는 일인 게 분명했다. 사실상 공상의 영역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만약 진짜라면? 진짜, 진짜라면?
그가 어떤 사정이 있어서 본래의 힘을 숨긴 채 아카데미에 들어온 거라면?
카야는 자기도 모르게 여기까지 생각이 이르렀던 것이다. 그래서 25번 남자가 어마어마한 거물이라는 가정하에, 약자인 척하려는 그의 눈치를 봐서 마족을 해치운 공로를 함구하는 쪽으로 마음이 쏠렸던 것이다.
‘알아볼 필요가 있겠어.’
내일 25번 남자에게 말을 걸기로, 카야는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