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 최약체는 마족 한정 먼치킨이 되었다-5화 (5/334)

EP.5 대마법사의 경지

오전에 기초마법개론 오리엔테이션을 마쳤다. 하도 <메르헨의 마법 기사>를 플레이해온 덕분인지 내용 자체는 이해하기 쉬웠다. 별 내용 없기도 했지만.

수업을 마친 뒤엔 점심 먹으러 학생 식당에 갔다.

“야, 저 사람.”

“어제 E급 그 사람이네? 진짜 여긴 어떻게 들어왔대?”

“수준 떨어져···.”

혼자 테이블에 앉아 50겔짜리 점심을 먹던 중이었다.

다른 테이블에서 나를 향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롱하는 내용이었다.

그냥 들으라는 듯이 목소리를 낮출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부쩍 느꼈는데, 아무래도 내가 마력량 E급이라는 사실이 학생들 입에서 열심히 오르내리는 중인 것 같았다.

약육강식을 표방하는 아카데미답게, 깔볼 상대가 있으면 학생들은 대놓고 깔보는 경향이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E급 약골이 맞으니까. 같은 마력량 E급인 이안 페어리테일보다 레벨도 낮으니, 최약체나 다름없다.

즉, 사실상 나는 여기 있는 누구도 이길 수 없다는 얘기. 쩌리 중의 상쩌리란 얘기다.

‘무시하자.’

오늘로 게임 속 세상에 온 지 4일째다.

역시나 평범하게 잠들어선 현실로 되돌아갈 수 없었다.

결국 여기서 지내야 한다.

그러니 괜히 학생들에게 밉보였다간 아카데미 생활만 힘들어진다. 무시하는 게 상책.

어차피 이제부터는 단련에 온 시간을 쏟아야 하므로 다른 데에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오늘 아침에, 나는 오전 수업까지 시간이 좀 남아서 양피지에 계획을 적어 내렸다. 한동안 게임을 플레이했던 기억을 열심히 되살려야 했다.

우선.

나는 학부 수석을 노릴 생각이다.

성적은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지를 보여주는 직관적인 지표가 된다. 적어도 내 동기들 중에선 가장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루체라는 높은 벽이 있지만, 뛰어넘을 셈이다.

부차적인 얘기지만, 낮은 성적을 받는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낙제를 반복하면 퇴학이니까. 그러면 아카데미에서 쫓겨나고, 그냥 전부 망하는 거다.

그리고 나중엔 전설 무기인 ‘힐드의 서리낫’을 찾으러 갈 계획이다.

힐드의 서리낫은 얼음 속성 최종 무구로서, 원래 게임에선 2학년 2학기 파트부터 구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게임 스토리에 구속받는 이안 페어리테일이 아니기에 상관없을 것이다.

‘최대한 1학년이 끝나기 전에 얻고 싶은데···.’

힐드의 서리낫을 얻으려면 ‘빙설룡 힐드’가 내려주는 시련을 통과해야 한다. 그걸 위해선 [얼음 속성 원소 저항력]을 최소한 60 이상은 끌어올려야 한다.

조금이라도 빨리 힐드의 서리낫을 얻을 수 있을 만큼 강해지자.

그리고 설정상, 이 세계관에서 원소 속성 마법은 체질에 따라 최대 두 종류까지만 구사할 수 있다. 예외는 요정의 힘 말곤 없다.

현재 빛 속성 마법을 구사할 수 있는 이안이 차후 불, 물, 얼음, 번개, 바위, 바람 중에서 어떤 원소 속성을 고르게 될지 모르겠다. 그건 원래 플레이어 선택으로 정해지는 거니까.

만약 얼음 속성을 고른다면 힐드의 서리낫이 그의 최종 목표가 되겠지만···. 미안 하게도 그건 내 차지다. 똥컨 뉴비 따위한테 줄 건 없다.

그러니 부디 얼음 속성을 고르지 않길 비는 수밖에.

‘그리고 클리어해야지.’

나는 이 게임을 클리어하기 위해, 강해질 수 있는 대로 강해질 셈이다.

이 악물고 노력해서 목표를 이뤄내는 건 내 주특기다. 고시 생활을 통해 얻어낸 나만의 자산이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는 고시 생활 동안에도 틈틈이 했다. 하루 공부를 마치면 휴식 겸 보상 차원에서.

쉬는 날엔 온종일 했고, 고시 패스 후엔 다시 주구장창 했다.

이제 나는 아예 <메르헨의 마법 기사> 게임 속에 들어와 있다. 최종 목표를 이루기까지 장기전이 될 것이다.

여기서도 가감 없이 악 써 주마.

“후후후, 후후···.”

“형님, 저 새끼 웃는데요?”

아, 나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스스로에게 심취해 있던 모양이다.

내 웃는 모습을 보고 누가 뭐라 했지만, 굳이 신경 쓰진 않았다.

식사를 마친 뒤.

나는 수업동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

대뜸 누가 뒤편에서 인사를 건네왔다.

발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니 익숙한 여학생의 모습이 눈에 비쳤다.

검은 머리끈으로 묶은 담녹색 양갈래 머리카락.

에메랄드처럼 빛나는 두 눈동자는 아름다운 비취색이었다.

교복 차림의 그녀는 마법학부 신입생 차석, 카야 아스트레앙이었다.

[ 카야 아스트레앙 ]

Lv : 90

종족 : 인간

속성 : 바람, 얼음

위험도 : X

그런데··· 카야가 왜 나한테 말을 걸지?

E급 나부랭이니까 노력 좀 하라고 꼰대처럼 조언하기 위해서인가?

카야라면 그럴 법 하다. 이 녀석은 오지랖이 넓으니까.

“임시 3반의 25번···, 맞죠?”

‘E’급이 준 인상 때문인가. 용케 내 번호를 기억하고 있네.

“아, 네. 제 번호를 기억하고 계시네요?”

그냥 신기해서 대답했을 뿐인데, 갑자기 카야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벼, 별로 관심 있어서 기억한 건 아닙니다···!”

그녀는 고개를 옆으로 휙 돌리곤 새침한 투로 대답했다.

부끄러워하는 모습이었다. 그녀는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 조금만 당황해도 저런 반응을 보이고 만다. 일종의 방어기제다.

이야, 무진장 친근하네. 게임에서 하도 봐온 녀석이라 그런 걸까.

괜히 아빠 미소가 흘러나올 것 같아서,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카야를 쳐다보기만 했다.

“흠흠.”

카야는 헛기침하고는 다시 나를 쳐다보았다.

“저 기억하십니까? 같은 임시 3반의··· 카야 아스트레앙.”

“네, 차석이니까.”

“…….”

돌연 어색한 공기가 감돌았다.

이 느낌 뭐지? 방금 내가 한 말에 이상한 점이 있었나?

‘아.’

아, 맞다.

카야 아스트레앙. 그녀는 이 나라, 제르베르의 서방을 책임지고 있는 아스트레앙 공작 가문의 차녀.

즉, 모르는 사람 하나 없는 이름 높은 귀족이다.

반면에 나는 성씨조차 없는 평민.

그런 내가 ‘차석이셔서 기억했습니다’ 정도로만 말하기엔, 그녀의 신분은 지나치게 높은 것이다.

‘아스트레앙 가문이라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같은 말도 덧붙였어야 자연스러웠겠지.

지금이라도 뭔가 예를 갖춰야 하나···?

제게 말 걸어 주셔서 영광입니다···? 아니, 좀 오반가.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다행이다.

카야는 곧바로 질문을 던져 내 고민을 날려 보냈다.

“아이작입니다.”

“아이작···, 아이작···.”

카야는 내 이름을 확실히 기억하려는 듯 두 번 곱씹었다.

그 반응만으로도 은근히 고맙네.

아무래도 공작 가문의 여식을 두고 실수한 기분이지만, 카야에게 찍혀서 괴롭힘 당할 걱정은 없었다. 그녀는 심성이 착하니까.

문제는, 길을 지나면서 나와 카야의 모습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는 학생들이었다.

그들의 입 모양을 살피며 대화 내용을 유추해보았다.

‘카야 님이 E급 평민 따위한테 말을 걸었어···?’

‘왜지?’

‘E급이니까 한심해서 한 말씀 하러 오신 건가?’

‘카야 님이잖아. ‘불쌍해서’ 한 말씀 하러 오신 거지.’

대충 이런 대화가 오고 가고 있는 듯했다.

아무튼 마법학부 신입생 차석이자, 마력량 B+급인 아스트레앙 가문의 여식이.

마력량 E급의 신입생 최약체이자, 신분도 평민인 놈한테 말을 건 상황.

어쩔까···.

부자연스럽긴 하지만 지금이라도 ‘존엄하신 공작가의 영애님을 뵙습니다!’하고 상체를 직각으로 숙여 버리는 게 나을까.

“아이작 씨,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왜 정체를 숨기고 계시죠?”

“···네?”

···이건 또 뭔 소리야?

“정체요···?”

“저한텐 못 숨깁니다. 당신, 지금 자기 정체를 숨기고 있죠?”

긴장한 기색이 보이는 카야.

이게 뭔 개소리인가.

···설마? 잠깐만.

‘··알겠다.’

카야는, 내가 악의의 트레비옹을 쓰러뜨리는 광경을 목격한 게 분명했다.

없는 줄 알았는데, 있었던 모양이다.

‘설마 그때도··?’

이어서 떠오른 기억은 어제의 마력량 측정 시간.

페르난도 교수가 ‘최대 마력량 속이기는 대마법사의 경지’라면서 뭐라 뭐라 떠들어 대자, 카야 혼자 심각해하던 얼굴이 기억났다.

만약 내가 트레비옹을 쓰러뜨리는 광경을 목격한 게 맞다면, 그 표정이 충분히 납득 간다.

나는 카야보다 압도적인 전력을 보여줬다. 그런데 마력량 측정 결과, 가장 하찮은 E급이라니···, 당연히 말도 안 되지.

···잠깐, 설마 얘? 지금 나를 대마법사의 경지에 이른 천재 중의 천재라고 생각하는 건가···?

“대마법사의 경지···. 자신의 마력량을 숨길 수 있는 거죠?”

일부러 아무도 못 듣도록 나지막이 묻는 카야.

머리가 지끈거려온다….

카야는 루체에게 열등감을 느끼지만, 범접할 수 없는 격이 느껴지는 상대에겐 동경심을 품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나는 후자의 모습으로 비쳐졌을 것이다.

그런 상대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성격.

그렇다. 이 녀석은 똑부러지고 야무져 보이지만, 실상은 바보 중의 바보인 것이다.

일단, 카야의 착각은 곤란했다. 만일을 위해서라도 그녀가 ‘아이작은 사실 강해’ 따위의 말을 입에 담아선 안 됐다.

나는 초반에 무조건 사람들한테 ‘나약한 평민’ 정도로 여겨져야 했으니까.

아이작로서 잠시 동안 마테오의 부하가 되어야 할 이유가 있고.

일단, 그것보다.

‘가장 위험한 문제는···.’

‘내’가 마족을 쓰러뜨렸다는 사실이 학사에 보고됐는지 여부다.

만약 보고됐다면 이건 진짜, 진짜로 위험한 문제다.

‘···아니겠네.’

그러나 나는 바로 아닌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마족을 쓰러뜨린 내 공로가 보고됐다면 학사가 나를 가만 놔뒀을 리 없다. 좋은 의미로 상을 주려 했을 터.

특히 아카데미 최고 전력 중 하나이자, 학생회장인 ‘앨리스’가 가만 있었을 리 없다. 아, 그녀는 나쁜 의미로. 왜냐하면 그 년이 흑막이기 때문이다.

내 소식이 귀에 들려왔으면 어떻게든 접근하려 했을 것이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 스토리를 보다 보면, 앨리스가 주인공 이안은 페어리테일 자작 가문이라 섣부르게 건드리지 못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따라서 나처럼 별 볼 일 없는 평민 따위는 언제든지 죽여도 상관없다는 얘기다.

즉, 그 앨리스 또한 조용하다는 것은.

‘함구했다?’

어째서?

카야가 왜?

···이렇게 머리 아픈 상황이라면 어쩔 수 없다. 바보의 장단에 어울려줄 필요가 있어 보였다.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잠깐의 침묵.

이후 눈을 한번 지그시 감았다가 뜬 뒤, 나지막이 한숨을 내뱉고서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다른 사람한테 내 얘기한 적은?”

“……!”

유구한 클리셰, 힘을 숨긴 찐따. 줄여서 힘숨찐. 나는 그 역할을 흉내 내기로 했다.

“없습니다···.”

“…….”

“…….”

“…….”

“아니, 그, 입학식 날 마족이 나타났던 건 학사에 보고하긴 했는데···. 일부러 누가 마족을 처치했는지는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손발이 오글거리는 걸 애써 참아내며 카야의 눈치를 살폈다.

분위기 흐름을 파악한 건지, 카야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자신의 추측이 맞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 보였다.

“어째서?”

“당신이 본래 힘을 수, 숨기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여서···.”

‘어쨌든 내 눈치 봐줬단 거네. 고맙다···.’

다행이다···, 십년감수했네.

하마터면 나도 모르는 새에 게임 오버 플래그 한번 제대로 꽂을 뻔했다.

학사가 카야의 보고를 받고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는 대충 짐작이 간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 세계관에서 마족은 자연재해쯤으로 여겨지는 존재다. 이미 처치되었다면 더 볼 것도 없다.

중요한 건 ‘학생들의 안위’. 뭐, 다들 무사하니까 며칠 동안 피해자인 이안만 집중 마크하고 끝냈겠지.

참고로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선 마족이 워낙 많이 등장하는 탓에 학사 측은 큰 고충을 겪게 될 예정이다. 교장이나 이사장이 이런저런 책임 추궁을 당하는 건 물론, 아주 야단법석이 된다.

그래도 학사 측은 어떻게든 아카데미 커리큘럼에 지장이 가지 않도록 문제를 해결해나가긴 한다. 별로 비중 있게 다뤄지진 않지만,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 가장 골치 아픈 역할은 그들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쯤 앨리스는 누가 마족을 쓰러뜨렸는지 신경 쓰고 있겠지.

그녀는 마족 출현에는 관여하지 않고 있어서, 어디서 언제 마족이 출현할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새로운 마족을 출현시키는 게 네피드의 뜻이라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다.

네피드의 뜻이란 심플하다. 자신한테 위협이 될 만한 요소를 제거하는 것.

그래서 앨리스로선 마족을 쓰러뜨린 자를 경계할 수밖에 없다.

‘일단 분위기 유지하고.’

나는 눈을 감고 일부러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심기가 거슬린 척이었다.

“카야라고 했지?”

“네, 네···?”

다시 눈을 뜨고, 얼음장처럼 차갑게 그녀를 노려보았다.

“누구한테도 내 얘기, 입에 담지 마라.”

“…….”

그대로 얼어붙은 카야.

구석에 몰린 사슴이 자신을 잡아먹으려는 짐승을 눈앞에 두고 벌벌 떠는 모습 같았다.

그녀는 자신보다 압도적인 기량을 보여주는 존재 앞에선 그리 나약한 존재인 것이다.

···여기까지 하자.

카야는 정실 루트를 타면 그녀는 이안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별별 억측을 다 할 만큼 상상력이 풍부하니, 알아서 안 좋게 생각할 것이다.

나는 그대로 유유히 자리를 떠나갔다.

카야가 이성을 되찾고 무슨 말을 꺼내기 전에 얼른 도망쳐야 했다. 이렇게 된 이상 그녀에게 내 밑천을 드러내선 안 된다.

다행히 그녀는 겁에 질린 얼굴로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조용히 말했으니 우릴 지켜보고 있던 학생들에게는 안 들렸을 것이다.

‘근데 이렇게만 말해도 되나?’

뭐, 괜찮겠지.

* * *

“내 생각이 맞았어···.”

카야는 아이작이 가만히 선 채 사시나무처럼 떨고 있었다.

마치 늑대를 앞에 두고 죽음의 공포를 느낀 새끼 양처럼, 덜덜.

다리에 힘이 풀려서, 한 발짝이라도 움직였다간 그대로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심장이 거칠게 달음박질했다. 극심한 공포가 밀물처럼 밀려와 그녀의 전신을 휘어잡고 있었다.

경고···, 그건 경고였다.

아이작의 적안은 아주 선명한 핏빛이었다.

어제 보았던 정체불명의 강력한 마족을 단숨에 압살했던 모습이 겹쳐 보이자, 그의 적의가 자신을 향한 조금 전의 상황이 몹시 공포스럽게 느껴졌다.

아이작이 자기 정체를 숨기고 다니는 존재임이 확실하고.

조금 전 대화로 짐작하건대, 그는 어떤 연유가 있어서 약자인 척하고 다니는 것이 틀림없었다.

“어떡하지···?”

카야는 아이작을 떠보려 했던 자신을 원망했다.

그에게··· 찍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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