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2 소꿉친구 납치 사건 (1)
햇볕이 비추는 정오. 선선한 바람이 피부를 쓰다듬고 있었다.
오늘도 마테오에게서 학식을 얻어먹은 나는, 그와 함께 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수다를 떨고 있었다.
예상대로 마테오에게서 자기 패거리가 돼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3일간 나를 챙겨 주면서 학식 사준 일에 감동한 척하고, ‘너라면 따를 수 있다’라는 인상을 풀풀 풍기면서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고마운 건 사실이었다. 덕분에 빚쟁이가 되는 일 없이 배 채우고 단련에 치중할 수 있었으니까.
“신분의 귀천? 개나 주라지. 내 목적은 평민을 무시하는 귀족들에게 복수하는 거다. 나는 여기서 더욱 강해져서, 평민의 위상을 드높일 거야.”
별 관심도 없는 다짐을 늘어놓는 마테오. 나는 ‘흠, 그렇지’, ‘그래’, ‘맞아!’ 따위의 말로 맞장구쳐주며 감복한 척했다. 확실하게 마테오의 신임을 얻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회사에서 부장 장단에 맞춰주는 신입사원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언젠간 평민이 무시 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 거다. 특히 E급 평민이라며 무시 받던 너라면 잘 이해하고 있겠지. 내 뜻에 편승해라, 아이작.”
“···알았다. 편승하마.”
얼마 안 가 박살날 허황된 다짐이다.
배드 엔딩을 막아야 하니, 잠시 놀아줘야지.
······
나는 마테오 패거리의 일원이 되었다.
나 이외에도 마테오 패거리는 3명 더 있었다. B 클래스 1명, C 클래스 2명. 모두 평민 출신이었다.
“아니, 이거 꼭 이래야 하나···?”
마테오 패거리로서 나는 앞머리를 올려야 했다. 나는 이마를 까는 게 썩 잘 어울리는 인상은 아니었다.
아무튼 교복 재킷을 어깨에 걸쳐 가오 잡고 있는 마테오를 선두로, 나와 3명의 부하들은 함께 몰려 다녔다.
마테오, 열심히 흑역사 갱신 중이시구요.
하나같이 앞머리를 까올리고 다녀서 그런 걸까. 오르핀관 복도를 지나는데 학생들의 시선이 우리에게로 쏠리는 게 느껴졌다.
“야, E급이다.”
“E급 저거, 살아남으려고 마테오 패거리에 들어갔네.”
“쟤 반 배정 평가 때 꼴찌였잖아. 풉.”
···아니구나, 그냥 날 비웃으려고 쳐다보는 거였네.
역시 메르헨 아카데미. 학생들의 빻은 인성 굉장합니다.
“내 친구한테 뭐라 했냐?”
“앗···! 아, 아냐, 아무것도···.”
오, 마테오가 시비를 걸어줬다.
B 클래스 상위권의 마테오는 나름 인정받는 실력자다. 웬만한 학생들은 그를 건드릴 엄두조차 못 낸다.
메르헨 아카데미는 배움의 장으로서 신분의 귀천이 덜하다는 흔해 빠진 설정을 갖고 있다. 물론 없다는 얘긴 아니지만. 그래도 실력이 가져다주는 위상에 힘이 실린다는 얘기다.
‘자식···.’
코 쓱.
비록 나는 꼬봉이긴 하지만, 녀석이 가진 사내의 우정엔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감격한 건 내 편을 들어 준 행동까지만이다. 지금의 마테오는 심성이 어수룩하고 글러 먹었기 때문에 사람 자체는 영 별로다.
“이안 페어리테일?”
그때, 나 이외의 다른 꼬봉이 녀석이 주인공의 이름을 불렀다.
마테오가 학생들에게 시비를 걸던 중, 이안이 그 사이를 비집고 끼어든 탓이었다.
마테오와 이안의 시선이 교차했다.
침묵.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저 자식, 또 마테오 형님께 뭐라 하려고···?”
“건방진 놈.”
동기인데 형님이라 하는 건 좀 그렇지 않냐, 친구들아.
“또 남한테 시비 거는 거냐, 마테오?”
와, 이 세계에 와서 이안의 목소리는 처음 들어 봤다.
날이 선 미성. 주인공다운 목소리. 수도 없이 게임을 플레이해 오며 들어왔던, 무척이나 친숙한 목소리였다.
괜히 반가운 마음이 들어 인사할 뻔했을 때.
마테오가 이안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를 무섭게 내려다보았다.
“이안 페어리테일···, 자작가의 차남···. 역시 넌 거슬린다.”
“거슬리면 어쩔 거냐?”
“내 목표를 위한 발판, 귀족을 향한 내 적의의 본보기로 삼을 셈이다.”
“미련한 새끼.”
좋아, 잘 싸우고 있어. 스토리대로 잘 흘러가고 있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 스토리에 따르면, 이안과 마테오는 이미 한번 엮여서 싸우기 직전까지 갔을 터다.
훈련장에서 마테오가 마법학부 C 클래스 학생에게 1대 1 대련을 신청한 게 화근이었다. 상대는 평소에 평민을 업신여기던 차별주의자 귀족. 마테오는 그를 아주 신명 나게 패버린다.
당시 같은 훈련장에 있던 정의감 투철한 주인공, 이안은 보다 못해 나서서 마테오를 막아서고.
두 사람은 신경전을 벌인다.
그리고 몇 마디 나누다가 마테오가 선심 쓰는 척 빠져 줬겠지.
그것이 내가 알고 있는 스토리다.
이번이 두 사람의 두 번째 만남이리라.
“내가 거슬리나? 그럼 한 판 붙어보든가.”
이안을 자극하는 마테오.
“너 따위랑 싸우지 않아. 넌 상대할 가치도 없어.”
“약한 주제에 입만 살아선.”
신경전은 짧게 끝났다.
잠깐의 눈싸움 이후, 마테오는 양쪽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이안을 무시하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부하인 나와 3명의 남학생들은 마테오를 뒤따랐다.
그들은 삼류악역답게 이안에게 혀를 내밀거나 이런저런 조롱을 해대며 지나갔다.
물론 나도 따라 했다.
마족이랑 싸울 때 기절 좀 하지 마라, 제발.
······
“항상 이안과 붙어 다니는 여자가 있어. ‘에이미 할로웨이’. 할로웨이 백작가의 여식이다.”
조세나 숲 어딘가.
나를 포함한 마테오 패거리는 어느 널찍한 폐창고 안에 모여 삼류악역 다운 작전 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 여자를 납치한다.”
“나, 납치입니까?!”
놀라는 부하들. 나도 일부러 놀란 척했다.
마테오가 내뱉은 작전은 역시나 스토리대로였다.
2막 2장, 소꿉친구 납치 사건. 이안의 소꿉친구인 에이미 할로웨이를 마테오 패거리가 납치하면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이안과 마테오 패거리가 본격적으로 싸우게 되는 계기다.
“에이미 할로웨이에게 심한 짓을 하겠단 말은 아니다. 납치하고 어딘가에 가둬두기만 할 뿐이지. 녀석은 이안을 불러오기 위한 미끼일 뿐이야.”
“형님, 그 말은···?!”
“평민인 우리를 깔봤다간 얼마든지 심한 짓을 당할 수 있다는 경각심을, 귀족들에게 일깨워주는 거다.”
이안은 마테오의 부하들을 모두 쓰러뜨린 후, 마테오와 1대 1로 맞붙게 된다.
그러던 중에 마족이 나타난다. 나름 강한 편인 마테오의 마나에 반응하고 깨어난 것이다.
목적은 역시나 빛 속성 체질인 이안.
그러나 마족은 방해꾼인 마테오를 먼저 공격한다. 이때 마테오를 지켜 줄 사람이 이안밖에 없다. 부하들이 모두 기절했기 때문이다.
이안은 한번 마테오를 지켜 주고, 둘은 일시적 동맹을 맺어 가까스로 마족을 쓰러뜨린다. 이후 마테오는 이안에게 사과하고, 두 사람은 친구가 된다.
그나저나 마테오 패거리가 작전 짜는 모습은 처음 보는지라 왠지 재밌었다. 이들의 작전 회의 장면은 게임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 첫 번째 본보기가 이안 페어리테일, 그놈이다. 그놈은 억지로 싸우려 들지 않아. 그래서 싸울 이유를 만들려는 거지. 그놈에게 절망을 안겨줄 생각이다.”
“역시 형님!”
게임할 땐 그냥 삼류악당이구나, 하고 별생각 없었는데···.
이렇게 보니 마테오는 진짜 바보에다 극단적이기까지 한 놈이었다.
부하 놈들도 수준은 같았다. 전부 마테오의 뜻에 따르겠다거나, 우리 평민들의 무서움을 보여주자면서 맞장구쳐주었다.
여기서 내가 마테오 패거리에 들어온 목적 두 가지가 드러난다.
첫째는 마족 처리.
둘째는···.
“그럼 납치는···.”
“내가 할게.”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내가 마테오 패거리에 들어온 목적 둘째는.
이안의 소꿉친구이자 내가 애정하는 캐릭터 중 하나, 에이미 할로웨이를 안전하게 납치하기 위해서다.
“맡겨줘. 나도 너 돕고 싶다, 마테오.”
마테오 패거리는 이안이 뜻밖에도 싸움을 잘해서 당황한 나머지.
의도와는 다르게 에이미를 꽤 험악하게 다루게 된다.
아마 갈등을 고조시키기 위한 스토리 장치였겠지만, 나는 그게 싫었다.
······
“크크크큭···.”
“크하하핫···.”
왜 마테오 패거리는 웃는 것도 악당처럼 웃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왠지 즐거워서 나도 분위기에 편승해 악당처럼 웃어댔다.
소속감 같은 거라고 해야 할까. 뭐, 금방 해체될 집단인데 실컷 만끽하다 가야지.
우리는 함께 밥을 먹었고, 마테오가 누군가에게 시비 걸면 옆에서 한 번씩 째려 봐주었고, 아지트인 폐창고에 모여 평민의 고달픔, 귀족에게 무시 받았던 경험담 따위를 공유하기도 했다.
“크크크큭···.”
“크하하핫···.”
크하하핫···.
재밌었다.
‘내일이면 끝이네.’
작전 결행일은 내일.
어째 마테오 패거리의 수가 두 명 더 늘긴 했지만, 알 바 아니었다.
어차피 이안한테 다 쳐 발릴 엑스트라들이니까.
지옥 난이도라고 해도 급격히 어려워지는 건 인간 이외의 종족뿐이다. 인간은 어려움 난이도로 레벨이 고정돼 있다.
게다가 아까 전에 우연찮게 본 이안의 레벨은 ‘45’였다. 여기 있는 마테오의 부하들 레벨은 40 초중반대.
반면에 이안은 신체 능력과 육탄전에 있어서 매우 뛰어나다는 비교우위가 있다. 동급 레벨 사이에서 녀석은 깡패인 셈이다.
즉 아무리 마족에게 처맞고 다니는 이안이라고 해도, 이 정도 엑스트라들은 가볍게 쓰러뜨릴 수 있을 것이다.
이안이 마테오를 한번 지켜 주기까지 하면 상황 종료. 그때 내가 나서서 마족을 처리하면 된다.
만에 하나, 방해만 없다면 말이다···.
* * *
아스트레앙 공작 가문 저택에서의 삶은, 여느 영애의 그것과는 심히 동떨어져 있었다.
니스 전쟁에서 지대한 공을 세워 공작 작위를 하사받은 제랄드 아스트레앙. 검성(劍聖) 중 하나로 손꼽히는 그는 천재 마법사 히스토리아와 결혼하며 아스트레앙 가문 혈통을 이어갔다.
검성과 천재 마법사 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난 담녹빛 머리칼의 여자애.
그녀에게 검성 아버지란 ‘맹목적으로 따라야 할 존재’였다.
“아스트레앙 가문, 기상.”
““기사앙!!””
확성기로 아버지가 그리 말하면 아무리 깊은 꿈을 꾸고 있던 와중이라도 재빨리 일어나 자리를 정돈해야 한다.
“메를린 아스트레앙!”
“장녀! 메를린 아스트레앙!”
“카야 아스트레앙!”
“차녀! 카야 아스트레앙!”
호명시 이름 앞에는 반드시 ‘차녀’를 붙여야 한다. 말투는 절도 있게.
일어나면 즉시 저택 앞으로 집합.
“전방에 힘찬 함성 5초간 발사.”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앗─!!””
“아침 구보를 실시한다. 아스트레앙 가문, 뛰어!”
““얍!!””
“가앗!”
아직 해가 온전히 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때, 축축한 공기를 마시며 아침 구보하는 것은 기본.
“공부 안 하고 아르웬이랑 놀았습니까, 안 놀았습니까?”
“놀아씁니다! 제성합니다!”
“좌로 굴러.”
“자로 굴러!!”
“우로 굴러.”
“우러 굴럿!!”
“팔굽혀펴기 5회 실시한다. 몇 회?”
“5해!!”
“5회, 시작.”
“하낫, 두울···! ···끄헉!”
고작 6살 어린애한테 그러는 건 좀 너무하지 않았나, 싶기도하고.
“지금 바로 취침한다. 실시.”
“시씨!!”
···아니, 과거 좀 떠올리려고 했더니 이따위 기억들뿐이네.
그 외에도 이성 간 접촉 금지, 간식 제한, 놀이 제한, 기타 등등···.
아이를 군인처럼 키워야 반듯하게 자라날 수 있다는 제랄드만의 교육 철학은 카야를 내내 옥죄어 왔다.
그나마 자애로우신 어머니, 히스토리아의 너그러운 교육 방침 덕분에 카야는 숨통을 틀 수 있었고, 여느 귀족다운 곱상한 말투도 지켜낼 수 있었지만.
그래도 아버지 앞에선 군기가 바짝 잡혀 있어야만 했다.
그런 긴장감 넘치는 생활을 해왔던 탓일까. 카야는 신경 쓰이는 상대를 유심히 관찰하는 습관을 기르게 되었다. 아버지의 눈치를 봐야 했으니.
그리고 지금, 그녀의 관심 대상은 오로지 한 사람뿐.
메르헨 아카데미 마법학부 입학시험 차석, 카야 아스트레앙.
그녀는 반 배정 평가 결과, 최상위 클래스인 A 클래스에 배정되었다.
A 클래스에 소속되었다는 기쁨은 잠시뿐이었고, 그녀의 머릿속은 아이작으로 들어찼다.
며칠간 고민한 끝에 아이작을 지켜보기로 결심.
어느 날, 수업이 끝나자마자 곧바로 아이작을 찾아다녔다.
얼마 안 가 길을 지나고 있던 그를 발견했다.
어째선지 그는 마테오 패거리와 함께 몰려다니고 있었다. 요즘 자주 구설수에 오르내리고 있는 소수 집단이었다.
다 함께 앞머리를 올리고 다니는 걸 보니, 아이작도 그 패거리에 소속된 게 분명했다.
귀족한테 반발심을 가지고 있는 집단이라 했던가? 귀족들한테 시비 걸고 다닌다는 얘기를 들었던 것 같다.
저 패거리의 리더 격인 마테오 조르다나가 아무리 실력 있는 학생이라고는 해도, 귀족들한테 밉보여서 좋을 건 없을 텐데···.
뭐랄까, 정신적으로 미숙한 사춘기 어린애 집단 같았다.
그런데···.
‘아이작 님이 어째서 마테오 패거리에···?’
대마법사의 경지에 이른 강자.
카야 자신은 티끌만큼도 헤아리지 못할 깊은 뜻을 지니고 있을 바로 그, 아이작.
어째서 그가 저따위 양아치 집단에 들어가 있단 말인가?
카야는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이작을 미행했다.
그는 ‘크크크큭, 크하하핫’ 따위의 거추장한 웃음소리를 내며 마테오 패거리에 완전히 감화되어 있었다.
‘아이작 님이 악당처럼 웃고 있어···?’
기둥 뒤에서 고개만 슬쩍 내민 채 아이작을 감시하던 카야는, 차마 입을 다물지 못했다.
분명 저 마테오 패거리의 강함은 아이작 님의 발끝에도 못 미칠 터! 아이작 님 수준이라면 저따위 패거리는 우습게 보일 게 자명했다.
그런데 어째서···?
‘···저 마테오 패거리에 뭔가가 있는 건가?’
떠오른 결론은 하나. 자신 따위는 헤아릴 수 없는 깊은 뜻이 아이작에게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아이작 님이 저런 허접한 집단에 들어갈 리 없을 터.
아이작은 호기심을 자극하는 남자였다.
메르헨 아카데미에 들어왔으니 학업과 단련에 집중해야 하는데···. 요새 아이작에 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했다.
저만한 강자가 자기 실력을 숨기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지.
자신 따위는 감히 상상도 못 할, 얼마나 스펙터클한 과거사를 가진 건지.
그와 화록청의 요정 실피아하고는 무슨 관계인지.
···이런 것들은 아이작이 대답해주지 않으니 아직은 알아낼 방법이 없더라도.
적어도 그가 왜 삼류 양아치 집단에 들어갔는지는 직접 알아낼 수 있으리라.
‘집중 감시하는 수밖에···!’
왠지 ‘스토킹’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지만, 그녀는 그런 거 아니라며 자신을 타이르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