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3 소꿉친구 납치 사건 (2)
에이미 할로웨이. 이안의 소꿉친구이자 히로인 중 한 명.
그녀에겐 가계 능력인 중립 속성 마법, [심색 분별]이 패시브로 달려 있다. 덕분에 에이미는 타인의 심성이 가진 색을 구분할 수 있다.
상대가 거짓말하고 있는지, 상대 성격이 어떤지, 상대가 어떤 모략을 꾸미고 있는지 등을 유추할 수 있게 된다.
할로웨이 가문이 온갖 권모와 술수가 난무하는 귀족 사회에서 살아남아, 백작 가문으로 발돋움할 수 있게 해준 일등공신인 셈이다.
할로웨이 백작가는 딸 만큼은 애지중지 키웠다. 그 때문에 에이미는 머리에 꽃밭이 가득한 소녀로 성장했다.
그런 그녀가 실제로 꽃밭에 가서 만나게 된 사람이 페어리테일 자작가의 차남, 주인공 이안 페어리테일.
그녀가 보기에, 이안은 심성이 고운 남자애였다. 둘은 급격히 친해졌고, 열심히 노력한 끝에 메르헨 아카데미에 동기로 입학했다.
그래선지 스토리 초반부엔 에이미의 비중이 무척이나 높았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 2막 2장, 소꿉친구 납치 사건.
이때 마테오 패거리는 타이밍이 좋았다.
납치를 계획한 당일, 에이미는 이안에게 기분 상할 일이 생긴다. 그때 마테오의 부하들이 그녀에게 접근해서 자신들을 따라오라고 꼬드긴 것이다.
에이미는 그들이 자신을 납치하려 한다는 사실을 간파해냈다. 하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을 따라갔다.
그들에겐 음습한 욕망 따위는 없었던 데다가, 이안이 자신을 더욱 소중히 여겨 주길 바라는 마음도 들었으니.
결국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는 백마 탄 왕자님이 되어 자신을 구해 줄 테니까. 그리고 자신을 평소보다 더욱 아껴줄 테니까.
그저 어리광이었다.
오히려 상대의 심성을 간파할 수 있었기에, 마테오 패거리의 꼬드김에 넘어갔던 것.
결과적으로 에이미는 이안이 구해 줄 때까지 예상외로 심한 취급을 받게 된다.
뺨을 맞거나, 발로 걷어차이는 식이다. 이안이 잘 싸우는 탓에, 마테오 부하들이 당황한 탓에, 동시에 에이미가 저항한 탓에 그렇다.
자신의 순간적인 충동과 어리석은 생각 때문에 이안이 위기에 처하는 건, 그녀로서도 원하는 게 아니었으니까.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던 장면이다.
그래서 소꿉친구 납치 사건이 끝나면, 에이미는 엉엉 울면서 이안에게 사과하게 된다. 이후로 그녀는 헌신적인 히로인이 되고, 트롤 짓도 더 이상 안 하게 된다.
아무튼.
그 정도로 심리적으로 유한 상태라면 납치하기는 쉬울 것이다.
내가 있는 이상, 에이미가 험한 꼴 당하는 건 용납 못한다.
‘에이미가 어디 있더라?’
2막 2장 후일담을 떠올렸다.
에이미는 마테오 패거리가 꼬드기기 전, 이안한테 삐치고 어디 가 있었다고 했다. 거기가 어디였더라···?
‘아, 맞아. 수국정원.’
형형색색의 수국이 예쁘게 꾸며진 정원이 있다. 에이미는 거기 벤치에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돌아다닐 걸 각오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벤치에 앉아서 씩씩대고 있는 에이미를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일단 앞머리부터 내리자. 지금은 나 혼자 있으니까.
나는 반곱슬 앞머리를 쓱쓱 내리고 에이미에게 다가갔다.
문득 여러 감정이 교차했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를 플레이하면서 에이미 정실 루트는 꽤 많이 타봤다.
항상 꽃이 만개한 것 같은 그녀의 환한 미소가 보기 좋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친숙하고 추억이 많으며. 소중히 아끼고픈 캐릭터 중 하나가 바로 에이미였다.
에이미 앞에 멈춰 서자 그녀가 어여쁜 녹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검은 토끼 귀 모양의 리본을 단 하얀색 단발머리 여성이었다. 강아지상. 눈이 크고 전체적으로 귀염상이다.
공식적으로 마주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예상대로 그녀는 얼굴에 물음표를 띄운 듯한 표정이었다.
[ 에이미 할로웨이 ]
Lv : 51
종족 : 인간
속성 : 불
위험도 : X
“에이미 할로웨이?”
“……?”
에이미는 [심색 분별]로 내 의중을 꿰뚫어 보고 있을 것이다.
숨길 건 없었다.
그러니 최대한 정중하게 제안하자.
“미안한데 널 납치하려고 하거든. 협조 좀 해 줄래?”
* * *
또라이인가?
에이미는 대뜸 눈앞에 나타난 남자가 한 말에 당황했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한동안 멀뚱히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살짝 푸른 빛깔이 내비치는 은발. 에이미를 바라보고 있는 적안은 핏빛처럼 맑아 보인다.
그가 누군지는 알고 있었다. 이름은 아이작. 마력량 E급 판정을 받은 데다 반 배정 평가 때는 꼴등을 기록. 최하위를 섭렵하고 있는 남자. 심지어 평민 출신.
안 좋은 쪽으로 유명해서 모를 수가 없는 남자였다.
그러나 에이미는 그를 깔보지 않았다. 오히려 이 아카데미 학생들이 왜 그렇게 남을 못 깎아내려서 안달인지 이해하지 못할 정도였다.
자신이 짝사랑하는 소꿉친구, 이안도 마력량 E급이 나와서 학생들의 놀림거리가 된 까닭일까.
그 실태는 에이미를 화나게 했지만, 그녀로선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다. 단지 이안의 편이 돼 주는 것밖엔.
그래선지 다른 학생들과는 다르게 에이미는 아이작에게 동정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남자가 다짜고짜 무슨 말을···?
잘못 들었나?
“납치?”
“납치.”
확인 사살을 하듯 명확하게 대답하는 아이작.
에이미는 상시 발동 중인 [심색 분별] 마법 덕분에 아이작의 심성이 가진 색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살짝 주황빛이 섞여 있는 푸르고 고운 색. 불순한 의도가 조금도 없는 색이었다.
따라서 그가 ‘납치’랍시고 하는 말은 진짜 ‘납치’가 아닌 듯했다.
당연한 얘기지. 누가 납치를 이딴 식으로 하겠어. 처음부터 힘을 행사해서 잡아가거나, 어느 정도 속이면서 꼬드긴 다음 잡아가는 게 진정한 납치 아니겠는가.
‘말 섞는 건 이번이 처음인데···, 왜 나한테 애정을?’
심성의 주황빛은 에이미를 향한 친근감과 애정, 호감을 의미했다. 주로 가족이나 친한 친구에게서 보이는 색깔. 처음 보는 사람한테서 보이면 호감을 의미하는 색깔.
언제든지 이성 간의 사랑을 의미하는 분홍빛으로 변할 수 있는 색깔이었다.
하지만 에이미가 아이작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말은 즉···.
‘나도 모르게 홀려 버린 건가?!’
길을 지나다가, 순수 미모로 아이작의 호감을 산 게 분명했다.
부끄러웠다. 그녀는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양 뺨을 가리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이 죄 많은 여자···. 어쩌면 좋아.’
아이작에게 별다른 마음은 없었지만, 덕분에 자존감이 올라간 기분이었다.
마침 에이미는 이안에게 기분이 상해 있었다. 요즘 들어 자신을 소홀히 대하기 때문. 하물며 심성의 빛깔까지 옅어졌으니···.
열심히 가꿔온 자기 외모가 이안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는 현실에 짙은 회의감마저 느끼는 요즘이었다.
물론 이성적으로는, 이안이 훈련에만 매진해서 그렇다는 걸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도 너무 소홀해졌잖아···.
훈련이야, 나야?
그렇게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는 건 자존심이 용납하지 못했다. 애초에 자신과 이안은 연인 관계도 아니니까. 이런 독점욕을 밝히는 건 사이를 틀어지게 만드는 지름길이다.
그렇다. 이안과 자신은 빌어먹을 소꿉친구. 그놈의 친구, 친구인 것이다···.
‘바보 이안. 실컷 질투해 보든가.’
에이미는 이안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푸훗. 납치라니, 재밌네. 아이작 맞지?”
에이미는 코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나랑 따로 얘기하고 싶은 거야?”
“뭐···, 그렇지?”
“기왕이면 맛있는 다과랑 홍차가 있었으면 좋겠는데. 나 입맛 꽤 까다롭다?”
“홍차 쪽은 모르겠는데, 아일로 농장에서 직수입한 특 A급 우유와 도아르크산 카카오로 만들어진 수제 초콜릿은 있어.”
“···어어?”
에이미의 눈이 호기심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고는, 아이작에게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상체를 뒤로 빼는 아이작.
그의 반응 따윈 상관 않고 에이미는 흥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그, 그건 무슨 초콜릿이야···? 처음 들어봐. 맛있어?”
흥분한 나머지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단 것’에 환장하는 에이미였다. 이 세상 단 것이란 단 것은 전부 먹어봤다고 자신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기에, 아이작이 언급한 수제 초콜릿은 그녀의 호기심을 돋우기에 충분했다.
“하나 있으니까 먹어봐.”
아이작은 주머니에서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작은 초콜릿 하나를 꺼내 에이미에게 건넸다. 초콜릿은 종이로 포장되어 있었다.
에이미는 예쁘장한 포장 디자인을 보고 감탄사를 내뱉었고.
안에 들어 있던 갈색 초콜릿을 입안에 담고는 표정이 녹아내렸다.
“어때?”
“완전 달콤해애···.”
초콜릿을 삼키고서 한동안 여운에 잠긴 에이미.
이내, 그녀는 정신을 차리고 어색하게 헛기침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래. 좋군. 이건 좋은 거야. 초콜릿 더 있지?”
“따라오면 더 줄게.”
“알았어.”
에이미는 표정을 갈무리하고는, 아이작에게 활기찬 미소를 내보였다.
“납치 당해 줄게! 어디 갈래?”
* * *
“와아, 이런 데도 있었구나!”
내가 에이미를 데리고 온 곳은 조세나 숲 어딘가에 위치한 작은 집이었다. 원래는 버려진 폐가였는데, 나름 납치 명목으로 청소해 둔 상태였다. 마테오의 부하 중 한 명이 바람 속성을 다룰 줄 알아서 먼지 털어내기가 수월했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선 자신만의 아지트를 만들고 꾸미는 컨텐츠가 있다. 이 폐가 또한 아지트로 써먹을 수 있는 곳 중 하나였다.
나는 다과가 있는 테이블에 에이미를 안내했다.
“여기 앉아 있어. 홍차 내올게.”
“…….”
에이미의 정신은 이미 테이블 위에 잔뜩 놓여 있는 초콜릿에 쏠려 있었다.
그녀를 의자에 앉혀둔 뒤, 나는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이라고 해봤자 칸막이 하나 쳐진 작은 공간에 불과했지만.
거기서 불 속성 1성급 마법, [불 생성] 마법진이 새겨진 주문서 위에 물이 담긴 주전자를 올려 끓이기 시작했다.
근데 이 상황. 뭔가··· 이거 좀 뭐랄까···.
‘너무 쉬운데···?’
될 것 같긴 했는데, 이 정도로 쉽게 에이미를 꼬드길 수 있을 줄 몰랐다. 그것도 고작 초콜릿 하나로···.
아, 물론 내가 쓴 초콜릿이 에이미 한정으로 효과적인 아이템이긴 했다.
내가 미리 마련해 둔 초콜릿은 마테오에게서 받은 납치 경비로 사 온 것이다. 비밀 상점에서 구할 수 있으며, 값은 싼 편.
그 초콜릿은 원래 히로인의 호감도를 높이기 위한 선물 아이템 중 하나이다. 단 것을 좋아하는 에이미 할로웨이에게서 효과가 가장 크게 두드러진다. 에이미 정실 엔딩을 보고 싶다면 반드시 사야 하는 필수 아이템인 것이다.
그래서 에이미가 좋아하리란 확신이 있었다.
물론 가장 크게 활약한 건 그녀의 [심색 분별] 스킬이지만.
‘뭐하냐, 에이미.’
나는 슬쩍 칸막이 너머로 고개를 내밀어 에이미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초콜릿을 향해 손을 내밀다가 다른 손으로 그 손을 붙잡으며 자신을 통제하고 있었다.
······
“너무하지 않아? 함께 지내온 세월이 얼만데, ‘나 훈련해야 해’라고 하면서 맨날 나 무시하고···.”
나와 에이미는 초콜릿과 홍차로 소박한 다과회를 열었다.
아무래도 나는 게임을 하도 플레이했던 탓에 에이미에게 할 말이 많았던 모양이었다. 대화를 시작하니 스토리가 이것저것 떠올라 말이 막 튀어나왔던 거 보면.
덕분에 분위기는 시종 어색하지 않았다.
에이미는 초콜릿과 홍차 덕분에 마음이 풀린 듯, 내게 연신 하소연했다. 당연히 이안에 관한 얘기였다.
“내가 그렇게 잘해줬는데, 배은망덕한 놈···.”
“이안 좋아하지?”
“···으으으응?!”
이미 알고 있던 내용을 한번 내뱉어보았다. 이 정도 생각쯤은 당연히 할 수 있을 만큼의 단서를 에이미가 잔뜩 늘어놓았으니.
예상대로 얼굴을 홍당무처럼 붉히며 당황하는 에이미.
“아, 저, 그, 아니? 아닌데?”
“맞는데? 딱 봐도 이안 좋아하는 거 맞는데?”
“아닌데? 아닌데?”
애써 부인하려드는 모습이 귀여웠다.
이안의 입장이 돼서 <메르헨의 마법 기사>를 많은 시간 동안 플레이해 왔다.
내가 널 얼마나 많이 봐 왔을지 모를 거다.
이 애정, 마치 딸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결혼은 안 해봤지만.
“초콜릿 없네.”
“오오, 그러네! 초콜릿! 초콜릿이···, 내가 다 먹었구나. 미안···.”
나는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에이미도 얼씨구나, 하고 그 화제를 맞받아쳤지만, 죄책감을 느껴버린 듯했다.
“초콜릿 더 먹을 거야?”
“아, 어? 아, 내가 그렇게 막 많이 먹는 편은 아닌데 말이야, 뭐, 더 준다면야 그 성의를 봐서라도 사양하긴 어렵겠지?”
뭔 개소리야···?
“조금만 기다리고 있어. 금방 가져올게.”
“응? 어디 가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문 쪽으로 향했다.
“다른 데 놔뒀거든. 간이 냉장고 같은 거 만들어서 거기다 보관해 뒀어. 내가 얼음 속성이라서. 근데 그게 좀 거리가 떨어진 곳에 있거든.”
“왜? 간이 냉장고 같은 건 그냥 여기나 앞에 설치해 두면 될 일 아니야?”
“아직 컨트롤이 미숙해서. 괜히 이 집에 피해 줄 수도 있으니까, 일부러 멀리 놔둔 거지.”
“아아~.”
완전히 납득한 표정은 아니었다. 그러나 에이미는 더 이상 질문해 들어오지 않았다.
‘얼음 마법 주문서 쓰면 되지 않아?’ 같은 지적이 오면 겔이 없다고 대답하려 했는데.
‘왜 겔이 없는데?’라고 하면 강도를 당했다고 대답하려 했는데.
‘누구한테 강도를 당했는데?’ 같은 질문이 들어오면 어두울 때 당해서 모르겠다고 대답하려 했는데···.
뭐, 다행인 거지.
아무래도 그녀는 조금이라도 빨리 초콜릿을 더 먹고 싶어 하는 듯 보였다.
“아, 같이 갈래? 나도 따라갈게.”
“납치당한 입장이잖아.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푸훗, 그렇구나~. 그렇지 그렇지. 난 오늘 저녁까지 납치당하기로 했었지?”
에이미는 피식 웃었다. 장난인 줄 아는 모양이었다. 아마 자신은 그저 대접 받는 중인 ‘손님’이고, ‘납치’는 내 농담식 표현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나라도 그랬을 법하다. 납치는 오늘 저녁까지라고 내가 말했기 때문이다.
장난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나로선 편했다. 에이미를 편안히 대해주고 싶었으니까.
“아, 오늘 즐겁다~. 돌아가면 나랑 친구하자, 아이작.”
친구라···, 잘 모르겠네. 이제 네가 좋아하는 이안이 마테오랑 마족한테 탈탈 털릴 예정이라.
나는 웃으면서 “갔다 올게.” 하고 아지트를 나섰다.
어느덧 하늘은 노을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나는 에이미를 데리고 오는 길에 조세나 숲 어느 나무 앞에 표시된 지점에 날이 선 돌멩이를 올려놨었다. 그것은 ‘에이미를 납치하는 데 성공했다’라는 의미의 신호였다.
이후, 이안은 에이미가 납치됐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을 것이고.
폐창고에 쳐들어가 마테오 패거리와 싸우기 시작했을 것이다.
‘마족 나오려면 아직 멀었지?’
마족이 나오는 시점은 하늘이 어둑해져 가는 때.
놈은 폐창고 밑에 각성 상태로 있다가, 마테오의 마력이 느껴졌을 때 튀어나올 예정이다. 농도 짙은 마나에 반응하는 것이다.
그러니 아직 멀었다. 폐창고 앞에서 상황을 지켜볼 여유는 충분할 것이다.
나는 그저 마족을 처치하고, 배드 엔딩을 막으면 될 뿐.
게다가 이번 마족을 해치우면 ‘심해 고리’라는 전리품을 얻을 수 있다. 상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아이템이다.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선 전투 중 상대의 수를 읽는 데 쓰였다.
즉, 심해 고리는 앞으로 온갖 변수에 대처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납치는 문제없었고, 딱히 변수랄 것도 떠오르는 게 없고.’
나는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폐창고로 향했다.
변수라고 한다면 마족이 조기에 나타나는 경우일 터. 마테오가 부하들보다 먼저 나서서 마나를 쓰는 경우를 예로 들 수 있겠다.
그러면 배드 엔딩을 재촉하는 아슬아슬한 상황이 될 테지만, 설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메르헨의 마법 기사>를 플레이할 때, 마테오는 무조건 부하들이 다 쓰러지고 나서야 이안에게 덤벼들었으니까.
뭐, 이번 일은 수월하게 끝나겠다.
오지랖 넓은 카야 같은 애하고도 이번엔 그 어떤 접점도 없으니까, 방해할 사람은 딱히 없을 것이다.
* * *
2시간 전.
카야 아스트레앙은 아카데미 부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이작 님, 어디 가셨지?’
어째선지 아이작이 보이지 않는다.
기껏 마테오 패거리를 찾았는데도, 그들은 아이작만 빼놓고 나돌아다니는 중이었다.
게다가 오늘따라 마테오 패거리의 행보는 왠지 수상했다.
최근 카야는 아이작을 미행한 덕분에, 그들이 조세나 숲에 있는 어느 폐창고를 은둔지로 쓰고 있다는 걸 알아낸 상태였다.
이번에도 그들은 조세나 숲에 들어가 평소처럼 폐창고로 가는 듯하더니.
갑자기 어느 나무 앞을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이후, 마테오의 부하 한 명만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폐창고로 향했다.
남은 한 명은 방향을 틀어 조세나 숲을 빠져나가 마법학부 건물, 오르핀관으로 향했다. 카야는 그를 뒤따랐다.
그 남자는 주위를 살피면서 몰래 이안의 사물함에 편지 한 장을 끼워 넣고는 잰걸음으로 달아났다.
저게 뭘까. 설마 연애 편지는 아닐 테고.
카야는 남자가 떠난 걸 확인한 후, 이안의 사물함 틈새에 꽂혀 있는 편지를 꺼내 읽어보았다.
[에이미 할로웨이를 데리고 있다.]
[조세나 숲 폐창고로 와라.]
[혼자만 올 것.]
“인질···?”
카야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갈 데까지 갔구나···!’
마테오 패거리는 악명이 자자하다. 이안 페어리테일이라는 귀족을 괴롭히려는 목적임이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설마 인질까지 잡다니···!
“···카야 아스트레앙?”
때마침 이안이 사물함에 온 참이었다.
그는 의아해하면서, 자기 사물함 앞에 서 있는 카야에게 말을 걸었다.
“그거, 내 사물함인데.”
“이안 페어리테일이죠? 이거 보세요.”
이안은 카야가 건네준 편지를 읽고서 표정이 어둡게 굳었다.
“에이미···! 마테오, 그 자식이···?”
“이안 씨.”
이후, 분노에 찬 이안에게 카야는 눈을 이글거리며 제안 하나를 했다.
도와주겠다고.
······
하늘이 노을빛으로 물든 시각.
이안은 조세나 숲을 뒤진 끝에 폐창고에 도착했고.
마테오 패거리는 낄낄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에이미 어디 있어?”
서슬 퍼런 목소리로 묻는 이안.
그의 오른손엔 훈련용 목검이 들려 있었으나, 마테오 패거리에겐 가소롭게 보일 뿐이었다.
“당장 말해. 경고다.”
“경고?”
“……!”
파아아아앗─!
이안의 등뒤, 출입문 쪽에 결계가 생겨났다. 마테오 패거리 중 한 학생의 중립 속성 마법이었다.
「결계─물리방어 특화 (중립 속성, ★2)」
기초적인 수준의 결계지만, 물리방어에 특화되어 있다. 이안이 아무리 동기들 중 신체 능력이 뛰어난 편이라고 해도, 저 결계는 쉽게 뚫지 못할 것이다.
“누가 할 소리냐?”
마테오의 목소리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E급 주제에, 경고? 경고오?”
“아니다, 그 정도 기개는 있어야 재밌지.”
마테오의 부하들이 이안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안은 한 치의 두려움도 없어 보였다. 오히려 안타깝다는 표정이었다.
“···진짜로 경고였는데.”
그때였다.
휘우우우우우우욱─!!
콰아아아아앙─!!
갑자기 폐창고의 벽이 부서지고.
격렬한 바람이 마테오 패거리에게 들이닥쳤다.
「돌풍 (바람 속성, ★4)」
“……!”
“으아아악!”
“끄어어억!”
쿠우우우웅─!
「암벽(巖壁) (바위 속성, ★4)」
폐창고에 바람 마법이 들이닥치기 전, 마테오 주위로 바위 벽이 솟아 올라 그를 지켰다. 빠르게 바위 속성 방어 마법 [암벽]을 전개한 것이다. 야생 동물 같은 반사신경이었다.
그러나 미처 바람 마법에 대비하지 못했던 나머지 마테오 패거리의 학생들은 전부 [돌풍]에 휩쓸려버렸다.
그들은 반대편 벽에 몸이 쿵쿵 처박히다, 바닥으로 쓸려 내려가며 정신을 잃어 버렸다.
폭풍이 잦아들고.
「바람 생성 (바람 속성, ★1)」
살벌한 바람이 폐창고를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 바람은 한 여학생의 통제 하에 있었다.
마테오는 [암벽]을 해제한 후, 그 바람 마법의 근원지를 살피고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돌풍]으로 뚫려 버린 폐창고의 벽면. 그곳에 담녹색 양갈래 머리를 한 여학생이 작은 녹색 마석이 박혀있는 완드를 든 채 서 있었다. 머리칼과 치맛자락은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완드 같은 무기는 마법의 위력을 높여주지만, 마력 운용이 복잡해지기에 학생 수준에선 다루기 힘들다. 무기를 다루는 1학년생은 현재 손에 꼽을 수 있는 정도.
그 만한 실력을 지닌 여학생이 나타난 것이다.
“제 경고가 장난 같습니까?”
그녀는 이곳의 어느 누구보다도 압도적인 전력을 지닌 마법학부 1학년 차석.
카야 아스트레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