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9 캠핑 (1)
[빙결 폭발]의 시전이 끝났다.
상처투성이로 거대 빙괴 속에 갇혀 버린 은둔의 가르지아.
이내, 빙결을 해제하자 빙괴는 푸른빛을 흩뿌리는 가루가 되어 사라졌고.
가르지아의 육체는 잿빛 가루가 되어 허무하게 흩날렸다.
“해치웠나?”
“해치웠다.”
카야가 적 부활 주문을 외자마자 곧바로 결과를 확정지어 무력화시켰다.
[축하합니다! [은둔의 가르지아(Lv 110)]을 처치하고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Level Up!! Lv이 40으로 상승했습니다!]
[스탯 8을 획득합니다!]
[멸악자] 특성이 해제되어 내 몸은 급격히 무거워졌다.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감각이었다.
투욱─.
그때, 가르지아가 품에 지니고 있던 단검 하나가 바닥에 떨어졌다.
검은 검집을 끼고 있는 단검.
나는 곧바로 그 단검을 주워들었다.
[전리품 [재해의 검집]을 습득하였습니다!]
[재해의 검집]
:: 사용 가능한 마법의 마법진을 새겨두고 마법 시전에 필요한 양만큼 마력을 주입시켜두면, 검집이 있는 자리에서 그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
한계 : 5성급 마법
재사용 대기시간 : 10분
등급 : 1티어
‘재해의 검집’. 아주 유용한 아이템이다. 이것만 있으면 전술의 폭이 크게 늘어난다.
검집에 새겨진 마법을 사용할 땐 마력을 소모하지도 않는다. 미리 마력을 주입시켜 놓고 필요할 때 사용하는 용도이기 때문이다.
꽂혀 있는 날붙이는 위장용. 그냥 평범한 단검이라 보면 된다.
“아이작 님, 그건?”
“마족이 갖고 있던 무기. 회수할 거야.”
이건 이제 제 겁니다, 흐흐.
콧노래를 부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재해의 검집을 마법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제···.”
은둔의 가르지아를 처치했으니 하수인인 재해 개미들도 전부 소멸해야 한다. 그러나 내가 놈들을 얼려 버린 탓에 차마 해방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손을 뻗어 동굴 전체를 뒤덮고 있는 빙결을 해제했다.
동굴을 얼렸던 얼음이 푸른빛 가루가 되어 반딧불처럼 흩어졌다.
대규모 빙결 해제. 불꽃놀이처럼 짤막한 순간이었으나. 아름다운 순간이기도 했다. 카야가 감탄사를 내뱉는 걸 보니 그녀도 나와 같은 마음인 듯했다.
곧, 질서정연하게 서 있던 재해 개미들이 일제히 잿빛 가루가 되어 소멸해 갔다.
그 순간 시스템 창이 내 앞에 튀어나왔다.
[축하합니다! [재해 개미(Lv 70)]를 300체 처치하고 경험치를 획득하였습니다!]
[Level Up!! Lv이 50으로 상승했습니다!]
[스탯 20을 획득합니다!]
[업적 [제노사이드]를 달성했습니다! 보너스 스탯 10을 추가로 획득합니다!]
“…….”
와, 아니, 와, 잠깐만.
<메르헨의 마법 기사> 2막 4장에서 가르지아를 처치해 재해 개미 전부가 소멸되더라도 경험치가 들어오지 않는다.
경험치를 주는 건 오로지 직접 쓰러뜨린 재해 개미뿐.
심지어 재해 개미는 한꺼번에 몰려오지 않고, 온갖 전략 전술로 플레이어를 압박해오므로 전 개체를 상대하는 일은 없다.
그러나 나는 동굴 전체를 얼리면서 재해 개미 전 개체를 건드리고 말았다.
이에 따라 재해 개미 전부를 상대한 걸로 판정된 모양이었다.
덕분에 경험치 파티가 벌어지면서, [제노사이드] 업적까지 달성한 것.
“오, 오오···!”
몰려오는 성취감에 소리를 지르려던 찰나.
카야의 눈치를 보고 헛기침하며 얼른 마음을 추슬렀다.
안 되지, 안 돼. 기뻐하는 건 카야와 헤어진 뒤다.
그때까지 이 기쁨을 잠시 묵혀두자.
···흐하핫.
“아이작 님?”
“카야,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 뭡니까?!”
카야의 비취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어린애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듯, 말똥말똥한 눈빛이었다.
[ 카야 아스트레앙 ]
Lv : 93
종족 : 인간
속성 : 바람, 얼음
위험도 : X
심리 : [ 당신의 부탁을 들어 줄 생각에 기뻐하고 있습니다. ]
기뻐해주니 좋긴 한데, 그러다 노예 마인드 된다···?
그나저나 얘도 협동 경험치 받고 레벨 올랐네.
레벨이 90대인 데다가 1레벨 오른지도 얼마 안 됐는데 여기서 또 오른 거 보면, 상당량의 경험치를 획득한 게 틀림없었다.
아마도 이번에 카야의 활약상이 컸다고 판정된 모양이었다.
뭐, 인정한다. 얘가 없었으면 난 허탕치고 돌아가야 했을지도 모르니.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었다.
이제 남은 일은 하나뿐.
“지금부터 저걸 회수할 거야.”
나는 지면에 나뒹굴고 있는 연노란빛 마석, 제프림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걸 도와줘.”
솔직히 나 덕분에 강해졌잖아? 이 정도는 부탁할 수 있지, 안 그래?
“알겠습니다!”
기꺼이 수락하는 카야.
빈 마법 주머니 하나를 건네자, 그녀는 내 반대편 구석으로 가더니 제프림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 카야는 아예 위력적인 바람 마법을 써서 구석구석에 있는 제프림들을 한 곳으로 끌어모았다. 덕분에 편리하게 제프림을 쓸어 담을 수 있었다.
“근데 이 마석들은 다 뭡니까?”
제프림을 마법 주머니에 담고 있던 중, 카야가 물었다.
굳이 거짓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무기 단조에 쓰이는 재료.”
“무기 만들 생각이십니까?”
“아니, 팔 거야. 겔 벌려고 줍는 거야.”
카야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약한 척하느라 겔이 부족하신 거군요. 저한테 말씀해주셨으면 언제든 도와드렸을 텐데.”
그건 극구 사양이다···.
카야는 마법학부 1학년 차석이자 아스트레앙 공작 가문의 여식이다.
예를 들어, 나 같은 E급 평민이 그녀와 친하게 식사하고 있는 모습을 학생들에게 보이기라도 해봐라. 어떤 번잡한 소문이 돌게 될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필요 없어.”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
돌아가는 길.
나와 카야는 지하 미로를 빠져나온 뒤, 발광 램프 빛에 의존하며 어둑한 오르막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어깨에 메단 가방이 꽤나 묵직했다. 제프림이 가득 들어 있는 마법 주머니가 두 개 들어가 있는 까닭이다. 거기다 재해의 검집까지···.
너무 든든한 거 아니냐고~.
“아이작 님.”
조용히 걷던 중, 대뜸 카야가 침묵을 깨뜨렸다.
“아까 그 검은 얼음은 뭐죠?”
역시나. 언제 물어보나 했다.
[흑빙]은 얼음 속성과 어둠 속성이 결합해 생겨난 마법이다. 단순히 검은빛을 내비치는 마법이라고 해서 마족의 마법이라고는 누구도 단언할 순 없겠지만, 이런 상황이니 의구심을 가질 법했다.
이 질문을 회피했다간 카야가 엉뚱한 상상을 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면 꾸며내서 말할까?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지.
나는 솔직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마도구 같은걸로 색을 변조한 거라든지, 그런 비슷한 겁니까?”
“마족의 마법.”
“……!”
카야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휘이잉─!
곧바로 발에 바람 마법을 휘감고 내 반대편으로 물러나는 카야.
긴장한 얼굴로 경계 태세를 보인다.
[ 카야 아스트레앙 ]
심리 : [ 당신의 정체가 마족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습니다. ]
거 봐, 이런다니까.
나는 발을 멈추고서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예전에 어느 마족을 쓰러뜨리고 아이템을 하나 얻었어.”
“아이템?”
“‘어둠의 잔재’. 어둠 마나와 내 기존 원소 마나를 결합시켜 새로운 마법을 습득시켜주는 1티어 아이템. 덕분에 검은 얼음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거야.”
아이템 ‘티어’는 희귀도를 의미한다. 숫자가 낮을 수록 희귀하고 가치가 높다는 뜻이다. 그중 1티어는 단연 최고 등급이다.
그나저나 설명충처럼 대답해 버렸나? 왠지 사기꾼처럼 보일 것 같은데….
“…….”
3초. 마치 시간이 정지한 것처럼 지나칠 정도로 고요한 3초가 흐르고.
카야는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나름의 결론을 내린 듯 보였다.
[ 카야 아스트레앙 ]
심리 : [ 당신을 믿고 있습니다. ]
나는 마족들을 쓰러뜨려 왔고, 카야에게 그 모습을 보여 줘 왔다. 그 사실만으로도 내가 마족 편이 아니라는 사실이 증명된 셈.
아마 카야도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카야는 경계 태세를 풀고 다시 내 옆으로 돌아왔다.
20분 뒤.
우리는 탄타크 지하 동굴을 빠져나왔다. 별들이 수놓인 밤하늘과 협곡, 인근 숲, 비포장도로의 풍경이 우리를 맞이했다.
마음이 풍족한 까닭일까. 이 경관이 무척이나 아름답게 보인다.
“드디어 나왔다···. 고생하셨습니다, 아이작 님.”
“그래.”
“근데 기숙사엔 어떻게 돌아가실 겁니까?”
“……?”
“……?”
···아, 맞다.
얘 어떻게 돌아갈 생각이었냐?
“야영할 건데?”
“……?”
……?
아니, 설마?
여기서 마차 정류소까진 걸어서 한 시간 거리다. 어차피 시간이 늦어서 마차 운행은 끝났을 터. 하물며 이 주변엔 숙소도 없다.
게다가 카야가 자기 몸에 바람 마법을 휘감고 날아갈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다.
사람 몸을 날려 보낼 수 있는 바람을 응축시키면서 안정적으로, 지속적으로 내보내는 행위다. 잠깐 쓸 게 아니라면 마력 소모량이 막대할 수밖에 없다.
카야 수준이라면 마력이 아무리 많아도, 어림짐작으로 약 3분 정도 날면 마나 고갈 상태가 되고 말 터.
“너, 설마 대책 없이 여기 온 거냐?”
말없이 고개를 숙이는 카야.
그녀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 카야 아스트레앙 ]
심리 : [ 어수룩한 모습을 보여 민망해하고 있습니다. ]
···그럴 수 있지.
잘 모르고 쫓아온 거니까. 내가 야영할 생각인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따라와. 재워줄게.”
“네?”
카야의 표정에 강한 의구심이 내비쳤다.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오른 것 같았다.
······
협곡 사이.
찬연한 초승달이 졸졸 흘러가는 냇가에 제 모습을 비추며 자아도취에 빠져 있었다.
바람이 막혀 있어 조용하고 바닥이 평탄했다. 한 마디로 캠핑하기에 최적의 자리였다.
나는 마법 주머니에서 온갖 캠핑 용품들을 꺼내 들었다. 우선 간이 텐트는 펼치자마자 가볍게 설치됐고, 그 안에 이불을 깔아 두고 발광 램프를 놔두니 안락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다음, 간이 의자 두 개를 꺼냈다. 웬만한 물건들은 만일을 대비해 여분을 챙겨 와서 다행이었다.
카야는 멀뚱히 서 있기만 했다. 본격적으로 야영하려는 내 모습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작정하고 오셨군요···.”
당연하지. 그냥 아무렇게나 자면 감기 걸리잖아.
물론 과소비한 경향도 컸다. 어차피 제프림을 팔면 떼돈을 벌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결과적으로 베스트 초이스가 됐지만.
“카야, 장작 좀 가져올 수 있겠어?”
“아, 모닥불 피우시려는 겁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카야는 자기 몸에 바람 마법을 휘감고는 협곡 위로 날아들어 숲속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바람 마법이라면 장작을 만들어내기 수월할 것이다. 뭐 급속도로 강해지는 데 도움도 줬고, 아이작 캠핑도 제공해주기로 했으니까 이 정도도 부탁해도 되겠지.
나는 간이 의자에 앉은 채 앞에 은은한 빛을 내비치는 발광 램프를 두었다.
‘한번 볼까.’
마법 주머니에서 재해의 검집을 꺼내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검은 검집엔 미세한 흠집이 가득했다. 쓰다듬으면 매끄러운 질감 사이사이에 까칠까칠한 감촉이 있었다.
겉보기엔 낡고 평범해 보인다. 그렇기에 상대를 방심시키기에 좋은 아이템이다.
슥─.
검집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적당히 날이 선 단검. 이건 진짜로 평범한 무기다. 그래도 단검 자체의 기능이 있으니 여러모로 유용하게 써먹을 순 있을 터다.
나는 날붙이를 내려놓고 다시 재해의 검집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 검집에는 [빙결 폭발] 마법진을 새겨둘 셈이다.
그러면 재해의 검집이 있는 곳에서 나는 마력 소모 없이 [빙결 폭발]을 써먹을 수 있다.
내가 마나를 발산하는 것도 아니다. 마법을 쓰는 시늉조차 낼 필요도 없다. 상대의 뒤통수를 후리기에 아주 적절해 보이지 않는가?
단, 쿨타임은 10분. 그리고 사용할 때마다 [빙결 폭발]에 쓰이는 마력량 만큼 검집에 마력을 저장해 둬야 한다. 사실상 매 전투마다 1회용이 되는 경우가 대다수겠지만, 그 단 한 번의 사용이 내게 승기를 가져다줄 것이다.
물론 마법진 새기고 마력 좀 주입한다고 될 일은 아니다. 내가 사용 가능한 마법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으니까.
오늘은 레벨 50을 달성했으니, 곧 있으면 [빙결 폭발]을 익힐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대인전 수행평가 전까지는 익혀두고 싶다.
“아이작 님, 다녀왔습니다.”
카야가 벌써 도착했다. 그녀 옆엔 장작들이 작은 회오리 속에서 회전하고 있었다.
정말 빠릿빠릿하구나, 군인하면 잘하겠다.
애초에 아스트레앙 가문 저택에서의 삶이 군대나 다름없었겠지만.
“잘했어.”
“……!”
[ 카야 아스트레앙 ]
심리 : [ 당신의 칭찬을 들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
강아지 같네.
···괜히 낯부끄러워진다. 내가 누군가한테 이만한 영향력을 가졌던 적이 있었던가? 초등학생 때 반장해본 거 말곤 떠오르는 게 없었다.
아무튼, 이제 불 피워야지.
나는 마법 주머니에서 마법진이 새겨진 불 마법 주문서를 꺼내 바닥에 펼쳐 놓고.
굴러다니는 돌멩이로 주문서를 고정했다.
마력을 티끌만큼 불어넣어 주문서를 자극했다. 그러자 주문서가 발동되고, 은은한 불꽃이 온화하게 피어올랐다.
「불 생성 (불 속성, ★1)」
원소 속성 주문서는 최대 2성급까지만 구할 수 있다. 주문서에 담을 수 있는 마력량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구해 온 1성급 불 마법 주문서는 실생활에서 유용하게 쓰이는 편이기도 하다.
카야는 바람 마법을 해제해 장작들을 불 마법 주문서 위에 올려 두었다. 이윽고 불이 장작들을 태우고,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모닥불이 완성되었다.
‘오우.’
느낌 괜찮은데?
“앉아라.”
카야가 그저 멀뚱멀뚱 서있기만 해서, 나는 내 옆에 설치해둔 간이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 넷!”
카야는 긴장한 이등병처럼 대답하곤 간이 의자에 앉았다.
모닥불이 전해주는 온기가 포근했지만, 아직 날씨 자체는 쌀쌀한 편이었다.
나는 담요를 꺼내 덮은 뒤, 여분의 담요를 카야에게 건넸다.
그녀는 감사하다고 하면서 나처럼 어깨 위에 담요를 걸쳤다.
이후, 나는 모닥불로 물을 데우고서 그녀에게 따뜻한 홍차를 건넸다. 자꾸 내게서 이것저것 쏟아져 나오는 게 신기했는지, 그녀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따뜻해···.”
몸이 녹아내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카야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타닥타닥, 모닥불 타는 소리가 만연하다.
우리는 홍차를 마시면서 가만히 모닥불을 주시했다. 그리 불편하진 않은 고요였다.
‘이런 여유는 오랜만이구나···.’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 빙의된 이후 처음으로 느껴보는 아늑함이었다.
이 게임에 빙의된지 한 달하고도 보름. 쭉 사력을 다해 달려왔다. 최종 보스, 악신 네피드를 쓰러뜨리려면 최대 효율로 강해져야 하니까.
그래서인지, 이 여유가 어째 어색하게 느껴졌다.
“…….”
문득 지나온 삶이 모닥불 연기처럼, 아지랑이처럼 흔들거리며 조용히 피어오른다.
후회하지 않기 위해 죽어라 노력해온 인생이었다. 끝내 이 게임에 빙의되고 말았지만, 그렇다고 좌절할 생각은 없었다.
좌절하면 그때 모든 게 끝난다는 걸, 고시 생활 내내 여실히 느껴왔으니까.
힘들긴 하다. 마법 단련, 신체 단련, 공부. 매일, 하루 24시간이 모자라게 느껴질 정도로 스스로를 굴리고 또 굴리고 있으니.
그러나 힘든 것도 익숙해지면 괜찮다. 지금도 나름 루틴 소화 잘하고 있잖아.
···역시 가만히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온갖 상념들이 머릿속을 에워싸고 만다.
그래도 이 시간에,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서 애정하는 녀석들 중 한 명이 옆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심리적으로 위안이 된다고 해야 할까.
지금쯤 차 다 마셨겠구나.
차나 한잔 더 줄 생각에 그 애정하는 녀석 쪽을 돌아보았다.
“……?”
어째선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카야. 그녀의 얼굴은 홍당무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머리 위로는 온천 마크처럼 연기가 흘러나오는 것만 같았다.
설마 아까 동굴 추위 때문에 감기라도 걸린 건가? 그때도 나한테 춥다고 말하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눈치였더만.
몸 상태가 안 좋아져서 힘들어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녀의 심리를 파악하기 위해 상태창을 열었다.
[ 카야 아스트레앙 ]
심리 : [ 당신과 함께 잘 생각에 극도로 긴장하고 있습니다. ]
···걱정한 내가 바보였다.